카톨릭의 총본산이자 반석 위의 교회인 성 베드로 성당과 광장

Posted by 자발적한량
2008.11.21 16:17 일상탈출을 꿈꾸며/이탈리아

 바티칸이라는 이름은 테베레 강 오른쪽, 로마 북서부의 언덕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이곳에 있던 네로 황제의 정원과 원형 경기장은 초기 기독교인들의 순교지였고 서기 64년에 순교한 베드로가 대표적인 순교자입니다. 이후 이곳에는 베드로의 무덤이 자리잡게 되어 서기 2세기경부터 사람들이 찾아와 경배를 드렸고,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인 서기 324년 베드로의 무덤 위에 최초로 성당이 세워졌습니다. 당시에는 성당만이 아니라 부속 건물과 민간 건물들로 함께 들어서 있었습니다. 9세기 중엽 교황 레오 4세 때 들어 주위에 성곽을 쌓았고 이 성곽은 산탄젤로 성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의 석상


 아비뇽 유수 이후인 1377년 교황청은 다시 로마로 복귀했고 15세기 중엽 니콜라우스 5세 이후 바티칸은 모든 교황 업무를 총괄하게 됩니다. 바티칸 시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로마에 거주하는 추기경 등의 고위 성직자들과 국무장관이나 지사의 허가를 얻어 바티칸 시국 안에 거주하는 교황청 개인 봉직자와 그 가족들입니다. 이들의 대부분은 이탈리아 인과 스위스 인들입니다. 언어는 이탈리아 어를 사용하지만 프랑스 어와 영어도 사용합니다. 라틴 어도 물론 사용하구요. 바티칸 시국의 주 수입원은 신자들의 기부금이 주를 이루며 그 외에 바티칸 소유의 부동산 임대 수입, 바티칸 은행의 투자사업, 우표와 출판물의 판매, 관광 수입 등입니다. 세출의 대부분은 3,000명의 고용원 임금과 해외 공관 유지, 종교회의 비용에 사용됩니다.


 1871년 리소르지멘토라는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나 분열되어 있던 이탈리아가 통일되면서 세속 권력을 상실하게 된 바티칸은 1929년 이탈리아와 라테라노 협약을 맺고 이탈리아로부터 교황청 주변지역에 대한 주권을 인정받아 바티칸 시국으로 재탄생합니다. 가장 작은 국가가 된 바티칸 시국의 영토에는 성 베드로 성당과 그 일대, 성당과 궁전을 포함한 로마 소재 13개 건물, 카스텔 간돌포에 있는 교황의 하절기 관저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티칸은 이렇듯 독립국가이기 때문에 들어가기 전 간단한 입국심사를 거칩니다. 여권검사를 하는 것은 아니며 짐검사 정도.. 참! 바티칸은 스위스 용병이 지킵니다. 유일한 군인이죠.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한 옷을 입습니다.

일요일 정오가 되면 저 창문을 열고 교황께서 손을 흔들어줍니다.


 성 베드로 성당은 교황 율리우스 2세 당시인 1506년 건축가 브라만테의 설계에 의해 4세기 초에 세워진 바실리카 식 옛 성당을 대체하기 위해 지어졌습니다. 성당은 이후 여러 번에 걸쳐 증개축을 반복했고 이 증개축 작업이 이루어질 때마다 기라성 같은 건축가와 예술가들이 동원되었습니다. 라파엘로, 페루지노, 상갈로, 미켈란젤로 등이 이들이며 후일 베르니니와 마데르노도 합류하게 됩니다. 원래 성당은 베드로가 순교한 지점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브라만테는 옛 건물을 헐어낸 후 가로 세로의 길이가 똑같은 그리스 십자가 형태의 건물 중심에 원형 지붕을 얹고, 네 구석에 작은 원개들을 얹는 구상에 따라 4개의 큰 지주와 4쌍의 아치를 완성합니다. 그는 옛 건물을 거의 남김없이 헐어냈기 때문에 ‘파괴의 거장’이라는 뜻의 ‘마에스트로 뤼낭트’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당시 한 젊은이가 이곳에 들러 공사장을 둘러보곤 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미켈란젤로였습니다.

후진. 성당의 가장 깊고 성스러운 곳으로 베드로의 주교좌가 꾸며져 있습니다.


 율리우스 2세의 부름을 받아 로마에 온 미켈란젤로는 성당 안에 교황의 영묘를 건립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브라만테의 설계에 동의하면서도 미켈란젤로는 브라만테의 작업에 토를 달기 시작했고 이를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브라만테는 젊은 천재를 매장시키기 위해 온갖 음해를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음해의 결과가 바로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천지 창조입니다. 한번도 대형 벽화를 그려 본적이 없는 미켈란젤로는 이 도전이 주어지자 망설임 없이 받아들였고, 4년 남짓한 세월 그야말로 눈이 빠지고 허리가 휘어지는 고생 끝에 서구 회화사 최대의 걸작을 완성해 냅니다. 이 작업은 당시 관례와는 달리 거의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홀로 이룩한 것이기에 더욱 값진 것이죠. 미켈란젤로는 계속 계획을 수정하는 율리우스 2세에 대해서도 고운 시선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브라만테가 죽은 뒤 라파엘로가 긴 회당을 추가한 라틴 십자가형의 설계를 계획하였으나 라파엘로마저 곧 숨을 거둡니다. 이후 공사는 상갈로에게로 넘어가지만 1546년에 공사에 착수한지 얼마 안 되어 그 역시 세상을 뜹니다. 1546년 교황 바오로 3세는 마침내 72세가 된 미켈란젤로에게 공사의 전권을 일임합니다. 그는 그리스 십자가 형태의 설계를 적용해 브라만테의 설계로 돌아가는 듯했지만, 브라만테와는 달리 네 구석의 작은 원개를 없애고 건물 전체의 긴밀한 조형성과 다이나믹한 공간을 대궁륭을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통일한다는 탁월한 구상을 창안해 냈습니다.


 일체의 보수를 사양하고 오직 신에 대한 사랑과 사도 베드로에 대한 존경에서 일에 몰두한 미켈란젤로는 1564년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마칠 때까지 대원개의 기초 공사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단일 원개를 중심으로 원형의 성당을 짓기로 한 데에는 완벽한 도형인 원이 영원과 부활을 상징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그토록 미워했던 브라만테였지만 미켈란젤로는 브라만테의 재능을 인정하고 그의 업적을 받아들이는 솔직한 인간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천재 미켈란젤로에 대한 질시와 음해는 계속되어, 그는 노인이 되어서도 온갖 루머와 음해 속에서 작업을 해야만 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신앙심에서 우러나와 작업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모든 보수를 거절했습니다.


 직경 42.4m, 바닥에서 천장의 십자가까지의 높이가 약 133m에 달하는 이 원개 공사는 그가 남긴 목형과 함께 1588년 자코모 델라 볼타에게 인계되었고, 다시 도메니코 폰타나의 손으로 이어져 1590년 드디어 완성을 보게 됩니다. 파사드라 불리는 성단의 전면은 카를로 마데르노의 작품입니다.성단 앞에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베르니니가 설계한 계단이 있고 계단 양 옆 좌우에는 19세기 때 제작된 베드로와 바울의 조각이 서 있습니다. 카를로 마데르노의 작품인 성당 전면은 1612년에 완공되는데, 거센 비판을 받았습니다. 45m의 높이에 무려 115m에 달하는 길이를 가진 성당 전면은 실제로 돔을 가리고 있어 비판의 여지가 있었습니다. 정문 위의 발코니가 바로 교황이 대중들에게 나타나 손을 들어 모든 인류 만민에게라는 뜻의 ‘위르비 에토르비’로 시작되는 축복을 내리는 곳입니다. 성당 전면의 위 부분에는 예수님과 세례 요한 그리고 베드로를 제외한 11명의 사도들이 올라가 있습니다. 양 끝에는 19세기 때 주세페 발라디에가 만든 시계가 올라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성 베드로 성당은 120년 동안, 브라만테에서 미켈란젤로를 거쳐 베르니니까지 무려 12명의 대건축가의 손을 거치며 공사가 진행된 끝에 완성됩니다. 그 사이 교황만 20명이 바뀌었습니다. 현재 성당은 길이 211m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를 갖추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당들과 비교를 쉽게 하기 위해 성당 바닥에 유명 성당들의 크기를 적어 놓았습니다. 참고로 12세기에 공사를 시작해 성 베드로 성당보다 300년 정도 먼저 완공된 고딕 건축의 걸작 파리 노트르담 성당의 길이는 130m입니다.


 성 베드로 성당 내부는 외부와 마찬가지로 성소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로 하나의 미술관이자 박물관입니다. 성당 안에는 500개의 기둥, 50개의 제단, 450개의 조각이 있으며 6만 명이 미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계단을 올라서면 성당 현관에 서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성소인데요. 성당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고개를 좌우로 돌리면 철창 너머로 하나씩의 조각이 보입니다. 왼쪽에 있는 것이 서기 800년 로마에 와서 교황으로부터 대관식을 집전받은 최초의 황제 카를 대제이고 반대편에 있는 조각은 기독교를 공인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상으로 1670년 바로크 최고의 조각가이자 성 베드로 성당을 완성한 베르니니가 만든 작품입니다. 바닥을 보면 모자이크가 있는데, 1300년 옛 바실리카 분수를 장식하기 위해 그 유명한 중세 화가 조토가 제작한 것입니다.

정말 아름다웠던 성 베드로 성당


 현관에는 5개의 문이 있습니다. 가장 왼쪽에 있는 문이 죽음의 문이고, 중앙문은 청동의 문인데, 1445년 안토니오 아베르리노가 만들었습니다. 6개의 틀 속에 각종 종교적, 신화적 일화들을 조각했습니다. 가장 오른쪽에 있는 문이 포르타 산타, 즉 성스러운 문입니다. 16개의 청동 틀 속에 부조가 들어가 있는 이 문은 50년 주기로 찾아오는 성스러운 해인 성년을 맞아 오직 교황만이 열고 닫을 수 있습니다. 문의 이름도 여기서 유래합니다. 청동문을 통해 성당 안으로 들어서면 바닥에 반암을 박아 표시해 놓은 원을 밟게 됩니다. 이 원은 서기 800년 성탄절에 거행된 대관식 날 카를 대제가 왕관을 받기 위해 무릎을 꿇었던 곳입니다. 이 원을 지나면 반암으로 만든 두 개의 거대한 성수반이 나옵니다.

교과서에서 본 기억이 나는 피에타


 미켈란젤로가 25세 청년일 때 만든 이 작품은 아마도 그 예술적 가치를 떠나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와 성모의 이미지를 또렷하게 심어준 성물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경건 혹은 동정심 등을 뜻하는 피에타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의 시신을 끌어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를 표현한 회화, 조각 등 미술 작품을 일컫는 말입니다. 1500년 미켈란젤로가 이 작품을 완성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너무나 놀라운 작품 앞에서 25세 청년이 만들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기에 다른 사람이 조각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에 격분한 미켈란젤로는 밤에 몰래가서 성모 마리아의 가슴 부분에 자신의 이름을 조각해 넣었는데, 자신이 한 짓이 어리석었음을 깨닫고 이후 자신의 작품에 이름을 넣지 않았다고 합니다. 피에타는 이렇게 해서 미켈란젤로의 서명이 들어가 있는 유일한 작품이 되었다고 하네요. 1498년 프랑스 주교가 주문해 제작된 작품입니다. 수년 전 피에타를 모방하고 싶었던 조각가가 그의 천재성에 따를 수 없는 것을 느끼고 광분하여 정과 망치로 피에타를 부숴버리는 사건이 일어난 이후, 피에타를 복원하고 방탄유리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성당 곳곳에는 역대 교황들의 대리석상과 성화들이 걸려 있습니다. 이 곳에 있는 그림들은 모두 모자이크화입니다. 그것도 천연색을 띈 대리석을 붙여서 그린 모자이크....

성 베드로 영광의 옥좌


 성 베드로 성당 내부에서 가장 화려한 이 제단은 1658~1666년 사이에 완성된 베르니니의 작품입니다. 밑에는 서방과 동방의 4명의 교부들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이 조각들의 크기만 해도 작은 것은 4m 50cm이고 큰 것은 5m 50cm에 이릅니다. 제단 상부는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하늘에서 비치는 빛을 타고 내려오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주위는 구름에 둘러싸인 천사들이 에워싸고 있죠.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의 날개 길이만 1m 75cm에 달합니다. 전체적으로 극적 효과와 역동적인 움직임에 민감했던 조각가 베르니니의 바로크적 취향을 가장 잘 드러낸 걸작입니다. 제단에는 4세기 때 만들어져 베드로에게 봉헌된 의자의 잔해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성 베드로 광장


 좌우 너비는 240m입니다. 정면 끝은 성 베드로 대성당의 입구에 해당합니다. 회랑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향해 팔을 벌리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하였습니다.  성 베드로 광장. 산피에트로광장이라고도 합니다. 이탈리아 바로크양식의 거장인 화가이자 조각가인 베르니니가 1656년 설계해, 12년 만인 1667년 완공하였습니다. 입구에서 좌우로 안정된 타원꼴이며, 가운데서 반원씩 갈라져 대칭을 이룹니다. 오벨리스크 왼쪽 뒷편에보이는 것이 교황청 건물입니다. 교황의 거처 등이 있죠.


 무려 288개의 도리아 식 기둥들이 4열로 늘어선 이 회랑은 세상의 모든 곳이 성소로 향한다는 상징성을 시각적으로 표현해 낸 빼어난 작품입니다. 회랑 위에는 베르니니의 제자들이 제작한 140명에 달하는 성자와 순교자들의 조각이 올라가 있습니다.

십자가가 장식된 오벨리스크


 광장 중앙에는 로마의 3대 황제 칼리굴라가 자신의 경기장을 장식하기 위해 40년 이집트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가 우뚝 서 있습니다. 이 오벨리스크는 로마로 옮겨진 뒤 경기장에 세워졌으나, 후에 경기장에서 죽은 순교자들을 기념하기 위해 1586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습니다. 뒤에 오벨리스크 꼭대기에 알렉산데르 7세 가문의 문장과 십자가가 장식되었는데,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약탈 문화재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인식될 만큼 많은 굴곡을 겪은 건축물입니다. 높이는 25.5m, 무게는 320t입니다.

도메니코 폰타나의 분수대


오벨리스크 탑을 중심으로 양쪽에는 바로크 양식으로 조각된 두 개의 분수대가 있습니다. 대성당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오른쪽의 분수대는  대성당 정면을 설계한 카를로 마데르노의 작품이며, 왼쪽의 것은 오벨리스크 탑 이전 공사의 책임자 도메니코 폰타나의 것입니다. 이 두 분수대 역시 광장의 아름다운 조화와 균형을 위해 세워졌는데 종교적인 의미로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물로써 죄를 깨끗이 씻어야 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더욱 큽니다. 실제로 반세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에 순례왔던 모든 사람들이 이 양쪽 분수대의 물을 손으로 떠서 자신의 머리 위에 뿌린 후 성당 안으로 들어 갔다고 합니다.


 교황 레오 13세는 1881년, 바티칸 고문서 도서관을 개방하며 카톨릭 역사학자들에게 객관적 진실을 존중하도록 권고하면서. “하느님은 우리의 거짓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라틴 어로 바티카누스라 불리는 바티칸을 교황 레오 13세가 권고한 대로 가장 객관적으로 표현하면 면적 0.44km², 인구 950명의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입니다. 하지만 이 간단하고 객관적인 정의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아니 틀렸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죠. 예수의 지상 대리자인 교황이 사는 바티칸은 하나의 상징일 뿐,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자 온 인류의 구원자인 예수의 나라가 면적 0.44km²에 인구 1,000명이 채 안 되는 손바닥만한 땅덩어리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가 예수의 나라이며, 카톨릭을 믿는 모든 사람은 바티칸의 국민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카톨릭이라는 말 자체가 보편적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뜬금없이 한 신부님과..


 바티칸을 방문하는 모든 이들은 이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곳은 그 상징성에 있어 성소이며,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전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기독교의 모든 것이 들어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바티칸이 과거와 현재의 공간만이 아니라 미래의 공간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본질적으로 기독교는 창세기에서 시작해 묵시록으로 끝나는 시작과 끝을 믿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바티칸 시국의 상징성은 미래와도 관련되어 있으며 영적으로 예민한 자들은 작은 징조도 천주와 성령의 현시로 간주하게 됩니다. 바티칸을 방문하고자 하는 이들은 그러므로 영적 감각을 갖고 역사를 기원 전후로 나누어 놓은 인류사 최대의 사건인 예수의 출현과 그로 인해 가능했던 기독교 역사 2000년을 바티칸 시국의 상징성이 표현된 성당과 예술품 하나하나를 통해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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