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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발견된 삼국지 영웅 조조 무덤의 진실... 풀리지 않는 의혹 8가지

자발적한량 2018.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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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 우리나라에도 이문열, 황석영 등의 소설가들이 번역한 삼국지가 있죠. 누구나 한번쯤 읽어보셨죠? <삼국지연의>는 황건적의 난, 십상시의 난으로 어지러웠던 중국의 후한 말기부터 시작해서 조조의 위나라, 유비의 촉나라, 손권의 오나라 등 위촉오 시대를 거쳐 사마염의 진나라(서진)가 천하를 통일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죠.



중국의 삼국시대 당시 가장 강대했던 나라는 위나라였습니다. 조조는 스스로 승상의 자리에 올라 한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헌제를 꼭두각시 삼아 천하를 호령했죠. 만약 유비와 손권이 연합해 조조의 남하를 막아낸 적벽대전이 아니었다면 천하를 통일한 것은 조조였을 수도 있습니다. 조조 자신은 위왕에 봉해진 뒤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지만 아들 조비가 헌제의 양위를 받아 황제에 오르며 위나라를 세운 뒤 무제로 추존됐죠.




천하를 주름잡았던 난세의 간웅 조조 맹덕. 그는 건안 25년(220) 음력 1월 23일 66세를 일기로 사망했는데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가 죽기 전 자식들과 시첩, 신하들을 모아놓고 조비를 자신의 후계자로 정하고, 시첩들에게 향을 나누어준 뒤 자신의 무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又遺命於彰德府講武城外, 設立疑塚七十二, 勿令後人知吾葬處. 恐爲人所發掘故也.


창덕부(彰德府)에 명령을 내려서 강무성(講武城) 밖에 비슷한 무덤 일흔 두 기를 만들어 어느 것이 나의 무덤인지 후세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했다. 누가 파내지 않을까 두려워서였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나관중이 지어낸 허구에 불과합니다. 서진의 진수가 쓴 역사서인 정사 삼국지 위서의 무제기를 살펴보면, 건안23년(218), 조조는 자신이 죽으면 평소 입던 옷으로 염을 하고 금, 은, 동, 철은 물론 보석이나 진주 같은 보물도 넣지 말라고 했다고 나옵니다. 또한 척박한 산에 장례지내고, 봉분도 만들지 말고 나무도 심지 말고 사당도 세우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관에 옻칠은 3번만 하고 진주구슬로 찬합을 만들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구요. 




그런데 중국 베이징청년보에서 허난성 시가오쉐촌에 위치한 동한시대 무덤군에서 조조와 그의 부인 2명의 무덤으로 공식 확인됐다고 보도했습니다. 허난성은 지난 2009년 12월 평원지대의 무덤군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조조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릉을 발견, 연구 분석을 진행해왔는데요. 이 묘원 안에서는 남성 1명과 여성 2명, 총 3구의 유해가 나왔는데 허난성 문화재고고연구원은 무덤 구조와 소장품, 역사기록 등을 분석, 무덤의 주인공이 조조라고 최종 결론을 내렸습니다. 여성 2구의 시신은 그의 부인 류씨와 변씨이며, 주묘 부근에선 전사한 뒤 시신을 찾지 못한 조앙의 의관총인 것이라고 하는데요. 이 무덤이 조조의 것이라는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무덤의 규모가 왕후의 것임

2. 유물의 연대가 후한~북위시대임

3. 고분의 위치가 역사적 기록과 일치함

4. 조조의 유언대로 부장품이 매우 소박하다.

5. 무덤에서 발굴된 유골은 60대의 것으로 조조의 나이와 거의 일치함

6. '위무왕이 사용하던 창' '위무왕이 사용하던 돌배개'라는 명문이 발견됨




2010년 중국 국가 문물국에 이어 2018년 허난성 문화재고고연구원도 무덤의 주인이 조조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여전히 진위 논란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첫번째 근거는 조조의 부인인 변씨의 유해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 변씨는 죽은 뒤 조조의 무덤에 합장되었는데, 이 무덤에서는 변씨의 유해와 태황태후의 인새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인새야 도굴당할 수도 있다고 치지만, 이 무덤에서 발견된 여성 유골 2구의 추정 나이는 40대와 20대. 40대 여성 유골이 변씨이며, 20대 여성 유골이 일찍 숨졌다는 첫째 부인 류씨로 추정된다고 하는데, 변씨는 사망 당시 70세였기 때문에 나이가 맞지 않죠. 또한 변씨가 합장되었다는 기록 외에 다른 여성이 합장되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두 여성이 류씨와 변씨가 아니라면, 이는 순장을 하지 말라는 조조의 유언과도 배치됩니다.



두번째 근거는 사후 위무제로 추존된 조조의 위무제 인새가 발견되지 않은 점. 조조의 무덤은 유언에 따라 검소하게 만들어졌지만 위나라가 세워지고 태조무황제로 추존된 후 석실을 추가해 금으로 만든 인새를 보관했다고 하는데요. 이 무덤에는 금새도, 석실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태황태후 변씨의 인새가 없듯 조조의 인새가 발견되지 않은 것도 도굴 당했다 칠 수 있지만, 석실이 발견되지 않은 점은 문제가 있죠.




세번째 근거는 부장품 중 진주와 마노 등 구슬류가 발견되었다는 점. 기록을 보면 조조의 유언에 따라 구슬 종류는 전혀 넣지 않았다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네번째는 무덤양식. 이 무덤의 양식이 후한말의 고등급 묘장의 특징을 갖추고 있는데, 천자나 왕의 등급은 아니라는 것. 부장품은 아무리 간소하게 하더라도 양식 자체를 한 단계 낮은 구조로 만들었다는 것은 그가 천자의 예에 따라 안장되었다는 기록과 어긋나죠.




다섯번째는 이 무덤에서 발굴되었다는 석패들 중 다른 곳에서 발견된 것이 있다는 점. 학자들이 발굴한 것이 아니라 도굴범들에게서 석패를 압수하며 이 무덤에서 도굴했다는 진술을 받았을 뿐이라고 합니다. 다른 곳에서 도굴되었거나 위조된 것이 아닌지에 대한 의구심을 품을 수 밖에 없죠. 여섯번째는 무덤 주위에 신하들의 무덤이 없었다는 것. 조조는 공을 세운 신하들을 자신의 무덤에 배장하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이 무덤은 단일묘로, 주변에서 공신들의 무덤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죠. 일곱번째는 무덤에서 발견된 석상에 정교한 전기톱을 사용한 흔적이 있다는 점과 출토된 비석의 글씨가 현대의 것과 유사하다는 점입니다.




마지막 여덟번째는 '위무왕'이라고 새겨진 석비. 왕과 황제가 죽으면 '태조''세종'과 같은 시호로 불리게 되는데요. 위왕이었던 조조의 첫번째 시호는 '무왕'이었습니다. 아들 조비가 위나라를 세운 후엔 '무제'로 추존됐고, 위나라 멸망 후 후세 사람들이 한나라 무제 등과의 구분을 위해 '위무제'라고 불렀죠. 살아서는 위왕, 죽어서는 무왕·무제(태조무황제)·위무제로 불린 적은 있어도 '위무왕'이라고 불린 적은 없습니다. 그가 위왕의 작위를 받은 것은 한나라 때이므로 굳이 따지자면 '한위왕'이 되야 하겠죠. 즉, 애초에 조조의 무덤에서 '위무왕'이라고 쓰인 석비가 나오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당국이 이를 조조의 무덤으로 인정한 것은 이 무덤이 관광지로서의 가치를 지녔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조조의 무덤을 관광자원화하면 연간 200만 명의 관광객과 650억원의 수입이 예상된다고 합니다. 이권이나 인맥 개입을 의심해볼 수 있죠. 청두에 있는 소열제릉이 유비의 묘인 것이 확실함에도 사천성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자신들의 지역에 유비의 묘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을 보아도 알 수 있듯 이 무덤을 조조의 무덤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무척 강한 것 같네요. 중국 내 6개의 조씨 가문이 조조의 후손이라고 발표한 푸난대에서 이들의 DNA와 무덤에서 발견된 유골의 DNA를 비교하자고 제의했는데 허난성은 이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DNA만 비교해 보아도 금방 알 수 있을텐데, 이에 응하지 않은 것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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