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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쿠데타의 주역 김종필에게 훈장(무궁화장) 추서? 문재인 정부 그럼 안돼! (feat. 황교익)

자발적한량 2018.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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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오전 8시 15분경 노환으로 사망했습니다. 향년 92세. 김 전 총리는 이날 오전 중구 신당동 자택에서 119 구급대에 의해 한남동에 위치한 순천향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으며, 유족으로는 아들인 김진과 딸 김복리가 있습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이른바 '3김 시대'로 정치권을 풍미했던 인물입니다. 'JP'라는 줄임말 외에도 쿠데타 원조, 중앙정보부 창설자, 풍운의 정치인, 영원한 2인자, 처세의 달인 등 그에게 붙는 별칭에서 알 수 있듯 영욕의 세월을 보내왔죠. 놀랍게도 그의 사망 뉴스의 댓글을 살펴보면 부정적인 내용이 절대 다수를 차지합니다. 그나마 양호한 수준이 '이런 사람은 추모하면 안된다' '지옥에가서 죗값좀 받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시길' '죽는다고 그사람이 살아생전했던 일이 미화돼서는 안된다' '고인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이렇게 살지 말자' 정도인데요. 이에 비해 김성태 자유한국당 대표 권한대행은 "이 땅의 자유민주주의와 배고픔을 이겨내고 오늘의 경제대국이 되기까지 그분의 족적이 너무나 중요하게 느껴진다"고 밝힌 것을 비롯해 김 전 총리의 '정치적 아들'이라고 불리는 정진석 자유한국당 의원 역시 "김 전 총리야말로 대한민국 산업화와 민주화에 공히 공헌했던 유일한 정치 지도자였다"며 애도의 뜻을 밝혔습니다. 김종필 전 총리가 어떠한 사람이었기에 이렇게 평가가 엇갈리는 걸까요?



1926년 충남 부여에서 출생한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서울대 사범대학과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이후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근무하다 상황실장이었던 박정희와 만났고, 그의 중매로 형인 박상희의 장녀인 박영옥과 결혼하게 됩니다. 즉 박정희와는 처삼촌-조카사위인 인척 관계가 된 것이죠. 이후 유방에게 장량이 있었듯 김종필은 박정희의 오른팔이 되었습니다. 제2공화국 장면 내각 당시 부패한 장성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정군운동을 벌이다 항명파동으로 강제 전역한 이후 박정희와 함께 5·16 군사 쿠데타를 벌이게 되는데요. 알려진 바에 따르면 쿠데타의 전체적인 계획을 김종필이 짜고 박정희를 내세운 것이라고 하죠. 중앙정보부를 창설해 초대 부장을 지냈으며, 민정 이양 이후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한 것을 비롯해 특명전권대사로 수교협상 임무를 맡았습니다. 일명 '오히라-김종필 메모'가 한일협정의 초안이 되는 등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의 주역이기도 했죠.




박정희가 유신 독재를 시작했을 무렵 국무총리가 되었는데, 상당한 권력을 휘둘렀던 실세 총리로 군림했습니다. 그렇다고 박정희가 김종필을 무한 신뢰했던 것은 아닙니다. 박정희는 끊임없이 김종필을 감시하는 등 견제를 이어갔고, 김종필이 견디다 못해 "각하, 조카사위이면 한 집안 식구인데 왜 자꾸 저를 의심하십니까?"라고 읍소를 할 정도였다고 하죠.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비명횡사한 뒤 민주공화당 총재가 되었는데, 얼마 안가 전두환과 노태우 등 신군부가 일으킨 12·12 군사 쿠데타 이후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부정축재자로 발표되어 일부 재산을 강제 헌납하고 정계 은퇴 선언 후 미국에서 은둔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6월 항쟁으로 민주화의 바람이 불자 전격 귀국, 신민주공화당 창당을 선언하며 정계복귀를 하게 됩니다. 김대중, 김영삼 등이 전두환 정권 내내 사형선고를 받고, 단식 투쟁을 하며 민주화 투쟁을 벌여온 것에 땀 한방울 흘리지 않고 무임승차하려는 뻔뻔함을 보인 것이죠. 이후 제4당 총재로 캐스팅보트를 쥐고 활동하던 김종필은 노태우, 김영삼과 함께 의원 내각제 개헌에 합의하면서 합당을 선택, 3당 야합을 단행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문민정부 당시 민주자유당(민자당) 대표를 지낸 김종필은 상도동계와의 갈등 끝에 민자당을 탈당하고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하죠. 이후 실시된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와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활약 끝에 몸집을 불리게 됐구요.




김영삼과 손을 잡았던 김종필은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2년 후 내각제 개헌을 조건으로 이번에는 김대중과 연합을 하게 됩니다. 그 유명한 'DJP 연합'. 이 덕분에 김대중 대통령은 대선에서 이회창을 누르고 승리했고, 김종필은 다시 한번 국무총리직에 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DJP 연합은 내각제 개헌 이행 유무, 햇볕정책에 대한 의견차이로 흔들린 끝에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후보연합공천이 무산됐고, 자민련은 군소정당으로 전락해 새천년민주당에서 의원을 꿔와 간신히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는 수모를 겪게 되죠. 그리고 2001년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안에 자민련이 가담하면서 DJP 연합은 무너지게 됩니다.



2002년 16대 대선에서는 아무련 역할을 하지 못한 김종필. 게다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 당시 이에 끝까지 반대하긴 했지만 역풍을 함께 맞았죠.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민련의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하였지만 자민련은 비례대표 의석 배분 기준에 미달해 김종필은 사상 첫 10선이라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하게 됩니다. 다른 정당이 모두 비례대표 1번에 여성을 배정했던 상황에서 그 몫을 차지하면서까지 의원직에 욕심을 부렸지만 무참히 참패하며 개망신만 당한 것이죠.



이후 김종필은 간간히 수구 진영 정치인들이 인사를 하러 찾아갔을 때나 소식을 접할 수 있을 정도로 국민들의 관심 속에서 멀어져 갔습니다. 2016년 당시 퇴임을 앞두고 있던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외교행낭을 통해 편지를 보냈고, 김종필이 "혼신의 힘을 다해 돕겠다"고 화답했다는 소식 정도. 그 외에는 박근혜의 흉을 봤다거나 하는 뉴스 뿐이었죠.




'3김시대'는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를 기반으로 한 지역주의의 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열흘 전 6·13 지방선거에서 이러한 지역주의에 기반한 정치 구도는 완전히 붕괴되었죠. 김종필에 대한 평가는 "고인의 정치 역경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살아가는 후대에게 미루어 두더라도, 고인은 한국 현대사 그 자체로 기억될 것이다"고 브리핑을 발표한 더불어민주당 박범계 수석대변인의 표현이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문재인 정부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할 방침이라고 밝혔는데요. 전 이러한 정부의 방침에 결사 반대합니다. 고인에게 이렇게까지 평가를 해야하는 상황이 안타깝긴 하지만, 김종필은 엄연히 5·16 군사 쿠데타의 주역이자 중앙정보부 창설자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무궁화장을 추서하다뇨. 정부에서 국립현충원 안장을 제안했었다는 뉴스를 뒤늦게 전해 듣고도 어처구니가 없었는데 말이죠. 문재인 정부는 대한민국의 후퇴한 민주주의를 복원하고 진정 국민을 위한 나라를 바라는 촛불 혁명의 염원에 의해 탄생한 정부입니다. 만약 김종필에게 무궁화장이 추서된다면 정부와 문재인 대통령에게 정말 크게 실망할 것 같습니다.




김종필의 죽음에 대해서는 정치인들이 예의상 내미는 추도의 말 한마디 정도로 충분합니다. 김종필에게 무궁화장이 주어진다면 나중에 전두환, 노태우에게도 얼마든지 훈장 하나 붙여줄 수 있겠군요. 부디 이러한 참극이 발생하지 않길 바랍니다. 칼럼니스트 황교익의 말처럼 가는 마당에 좋은 말은 못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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