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밟고 있는 땅/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북한에는 '3.1절'이 없다. '3.1 인민봉기'가 있을 뿐..

자발적한량 2012.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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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년 한민족이 혼연일체가 되어 일제의 식민통치에 항거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삼일절입니다. 올해로 93주년을 맞이하죠. 뭐..정부와 지자체에서는 삼일절 기념행사 준비로 분주하겠지요. 유명관광지와 공항은 삼일절 연휴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몰려 바쁘구요. 어찌됐건간 나름 시끌벅적하게 지내고 있는 남쪽과 달리, 같은 민족인 북쪽의 동무들께서는 이날 무척이나 조용하십니다. 물론 북한도 삼일절을 기념은 하지만 소위 민족최대의 명절로 자축하는 김일성, 김정일의 귀빠진 날에 비하면 평일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3.1운동에 대한 남북의 인식과 해석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인데요.

 대한민국에서 3.1운동은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헌법 전문을 살펴보면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라고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3·1운동은 국민국가 수립의 기초인 동시에 국가 정통성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는 조국의 자주독립을 기원하며 목청껏 만세를 불렀던 순국선열들의 정신을 기념하고 민족정신을 앙양하기 위해 3.1절을 국경일로 정하고 공휴일로 제정했습니다.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


 그에 비해 북한에서는 1980년대까진 3.1절을 기념해 '3.1인민봉기 기념보고회' 등을 개최했지만 1990년대 이후 별다른 행사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북한은 3.1운동을 '3.1 인민봉기'라고 부르며 언론 매체를 동원해 '반미반일 투쟁'을 선동함과 동시에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일가의 가계우상화에 적극 이용하고 있는 모양새를 띄고 있죠. 북한은 3·1운동이 김일성의 아버지인 김형직의 주도로 평양에서 시작하였고, 당시 8살에 불과한 김일성이 만세행렬에 참가하였으며, 인민학교 교과서에는 심지어 '앞장서 이끌었다'고 역사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3·1 인민봉기는 평양에서의 대중적인 시위 투쟁을 첫 봉화로 하여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 이때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대원수님께서는 여덟살 되시는 어리신 몸으로 반일시위에 참가하시어 삼십여리나 되는 평양 보통문 밖까지 가시었다."
- 근대조선력사 中 -
 그래서 북한주민들은 3.1절하면 유관순이나 33인의 민족지도자가 아니라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과 어린 김일성의 모습을 먼저 떠올리게 되는 웃지못할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유관순은 1999년에야 북한의 백과사전에 3.1운동 때 용감하게 싸운 여학생 정도로 짤막하게 소개되었고, 시위를 주도한 33인의 지도자는 '민족대표'를 자처하고 나서 민족의 존엄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독립을 청원하면서 국민에게 무저항주의와 비폭력을 설교한 나약한 부르조아지로 폄하되고 있습니다. 북한의 역사날조는 3.1운동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의 근현대사까지 김일성 김정일 가족의 혁명역사로 모두 왜곡해 버렸습니다. 특히 1871년 신미양요의 발단이 된 제너럴 셔먼호 침몰 사건도 북한은 김일성의 증조부인 김응우가 주도했다고 왜곡하고 있죠..이건 뭐 다 김씨일가가 했다고 하니 원...조선왕조가 사실은 김씨였다고 안하는 게 어찌보면 신기한 일일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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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하여 평범한 촌노에 불과했던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와 할아버지 김보현, 할머니 이보익, 어머니 강반석, 동생인 김철주, 김일성의 첫 번째 아내이자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 등은 김정일이 전권을 잡은 70년대 이후 모두 열렬한 애국투사로 둔갑을 하게 됩니다. 그들의 이름을 딴 도시, 학교, 거리를 만들고 수천 개의 동상을 북한 땅 조그만 농촌 마을에까지 세워 관리하게 한 것 역시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죠.

 예를 들어 김정일은 지난 81년 양강도 신파군을 김정숙군으로, 혜산 사범대학을 김정숙 사범대학으로 개칭하였으며, 양강도의 후창군을 김형직군으로, 풍산군을 김형권군으로(김일성의 삼촌)개칭하였고, 김정숙의 생일인 12월 24일을 명절로 선포하였습니다. 이외에도 김정숙 탁아소, 강반석 탁아소, 김형직 사범대학, 김정숙 사범대학, 김철주 사범대학, 김보현 대학, 김정숙 제1고등중학교, 김형권 고등중학교 등 김정일이 자신의 가계를 우상화하고 수령절대주의 체제를 강화하려고 역사를 왜곡한 만행의 흔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죠.

 잠시 얘기가 샜네요. 북한의 조선대백과사전은 3.1운동에 대해 '나라의 독립을 위해 1919년 3월1일 폭발한 우리 인민의 전민족적 반일봉기'로 규정하면서 그 의미를 세 가지로 꼽고 있습니다. 조선인민의 열렬한 애국적 투지와 혁명적 정력이 과시됐으며,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고, 식민지 예속국가 인민들의 민족해방운동 발전에 고무적 영향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러시아 10월혁명의 영향을 받아 수십만의 서울시민이 반일투쟁을 시작하여 발생한 것'으로 기술해 왔으나 1980년부터는 평양 장대재에 있던 숭덕여학교에서 수천 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 학생대표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시작됐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3.1절 90돌 기념보고회


 평양방송은 '역사적인 3.1인민봉기는 평양에서 있은 대중적인 시위투쟁을 첫 봉화로 해서 타오르기 시작했다'며 '이날 평양에서 불요불굴의 혁명투사이시며 우리나라 반일 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이신 김형직 선생님께서 몸소 키우신 애국적 청년학생들과 인민들이 주동이 되어 수많은 각계 각층 군중이 반일 시위투쟁에 일떠섰다'고 방송하기도 했죠.

 나아가 3.1운동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면서 나름대로 그 원인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탁월한 수령의 영도'와 '혁명적 당의 지도'가 없어 실패했으며,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이 민족해방 운동의 지도세력으로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지적입니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의 행동에 대해서도 '철두철미 반민족적이며 반인민적인 배신행동이었으며 일제 강점자들에 대한 비굴한 투항행위였다'고 비난했구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를 받아들여 무저항 만세운동을 주도함으로써 3.1운동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주요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입니다.

북한 노동신문은 3.1운동 87주년 당시 '견결한 반외세.자주화 투쟁으로 자주통일의 길을 열어 나가자'는 사설을 게재하고 "외세의 침략과 지배를 반대하고 나라와 민족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이룩하기 위한 우리 민족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며 반미.반일 투쟁을 강력히 벌일 것을 촉구했습니다. 결국 3.1운동에서 피 흘린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 부자의 권력세습을 위해 욕되게 하고 있는 것이죠. 북쪽에 있는 진짜 빨갱이들이나, 남쪽에 있는 반공, 보수주의자를 자칭하는 친일파들이나..순국선열들께서 편히 눈감으시기 하는 인간들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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