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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경 의원에게 '통일의 꽃'이 붙게 된 사연은?

자발적한량 2012.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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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 관련 포스팅을 하기가 갈수록 조심스러워지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제가 지지하는 진보민주세력에서 갈수록 실망감을 안겨주고 있어서 어디서부터 짚고 넘어가야 할지 모른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 가장 첫 시작은 통합진보당 사태입니다. 어떤 이들은 새누리당에 관련된 비판은 즉각즉각 하면서 야권의 잘못에는 왜 묵묵히 있냐고 손가락질 할 수 있겠지만..뭐랄까요..제가 지지하는 세력인만큼 더욱 강한 회초리를 들기 위함이라고 할까요?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잠시 숨 좀 돌리는 타이밍으로..(이거 숨을 돌리는건지 산 넘어 산인지 원...) 취중막말로 파문을 일으킨 민주통합당 임수경 의원에 대한 포스팅을 해볼까 합니다. 저는 87년생이라 우리나라의 민주화 격동기에 불행하게도 존재하지 못했던, 수많은 선배들의 피땀을 받기만 한 그런 세대입니다. 부모님께서는 다행이라고 하시더군요. 그 당시에 제가 있었다면 아마 수배당해서 도망다니며 부모님 가슴에 피멍이 들었을 꺼라고...



 80년대말에서 90년대초에 대학생활을 한 사람이라면 임수경 의원을 모를 수가 없을 만큼 그 당시의 핫 아이콘이었던 임수경 의원. 왜 그런지 아시나요? 당시 왠만한 대학마다 임수경 의원의 방북 사건에 대한 대자보가 큼지막하게 붙어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민주화 운동과 더불어 통일에 대한 열망이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던 그 당시 대학생들의 눈에는 '가녀린 여자애' 한명이 겁도 없이 북한에 넘어가 김일성과 악수를 하고 '조선은 하나다'를 전세계에 알린 사건이었죠.


 임수경은 서울에서 태어나 중산층 가정에서 평범하게 살았으며, 한국외대 용인 분교 불어과에 입학한 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등 사회운동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1989년 3월 20일 소설가 황석영이 북한 조선문학예술총동맹의 초청으로 방북하여 평양에 들어간 닷새 뒤, 문익환 목사님께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고문 자격으로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초청을 받고 1989년 3월 25일 대한민국 정부에 통보를 하고 북한에 방북했으나, 정부는 인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김일성과 두차례 회담하여 7·4 남북 공동 성명의 통일 3대원칙을 재확인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는 등 1980년대는 적대적 관계에 있던 남북한 관계 개선을 위한 민간인들의 활약이 시작되던 시기였습니다.



 북한에서는 '88년 서울 올림픽'에 대항하기 위해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기획했고, 당시 북한 노동당이 주사파 지하조직에 투쟁지침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던 단파방송 '구국의 소리'를 통해 평양학생축전을 준비하라는 메시지가 전달됐습니다. 주사파 4대 조직 중 하나인 조국통일 촉진그룹이 한국 대표를 보내는 기획을 주도했고, 실행계획은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조국통일위원회에서 세웠습니다. 이들이 당시 내린 결론은 '상징성이 있고 해외 여행에 자유로운 여대생을 보낸다'는 것이었고, 공안당국의 감시를 벗어나기 위해선 운동권의 핵심 인물이 뽑혀선 안 됐고, 이 기준에 맞는 인물이 바로 '임수경'이었습니다.



 결국 대학교 4학년의 나이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전대협 대표에 선발된 임수경은 서울을 떠나 출국하였는데, 출국 당시 행선지를 일본으로, 출국 목적을 관광으로 밝혔습니다. 그러다가 동독 동베를린을 거쳐 북한에 들어갔죠. 만 21살에 밀입북해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여대생 임수경은 그야말로 남과 북 모두에 통제불능이었습니다. 그 해 6월 30일부터 8월 15일까지 46일간 북한에 머물면서 한국 정부를 비판하고, 반미를 외쳤습니다. 흰 저고리와 검은 치마를 입고 김일성과 두 손을 잡고, 북한 대학생과 함께 "미국놈들 각오하라"는 구호를 외쳤죠. 





 그런데 재미있는 점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임수경이 북한의 통제에 갇히지도 않았다는 점입니다. 일본 산케이 신문은 89년 8월 22일 '임수경의 자유분방한 행동이 김일성을 절대존엄의 존재로 터부시해 온 북한인들의 의식을 혼란시켰다. 결과적으로 한국 정부에 뜻밖의 공을 세운 측면도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당시 임수경은 북한 간부 앞에서 권력세습을 비판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김일성이 '친히' 내린 선물인 숄을 자리에 그대로 놔둔 채 숙소로 돌아간 적도 있죠.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나고 자란 그녀는 북한의 금기로부터 자유로웠습니다.



 또 한가지 북한 입장에서 임수경을 심각하게 생각했던 건 그녀의 티셔츠와 청바지였습니다. 북한 청년들은 아이돌을 보듯 임수경에게 열광했습니다. 이번 사건의 당사자 중 한명인 탈북자 백요셉이 페이스북에 “북에 있던 어릴 적부터 ‘통일의 꽃’ 임수경의 광팬이었다”고 적은 것이 북한에서 그녀가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죠. 당시 임수경의 모든 소지품은 북한에선 고급이었습니다. 평양축전에는 흰색 티셔츠, 흰색 바지를 입고, 흰 운동화를 신고 입장해 눈길을 끌었는데요. 그녀의 그러한 모습은 파쇼와 미 제국주의에 신음하는 남한의 불쌍한 인민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외신들은 '북한이 오히려 그녀의 장기체재를 우려했다'고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임수경이 행했던 행동과 옷차림이 유행하여 금지되었던 반팔 티셔츠가 다시 허용되는 등 북한 주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 후 임수경은 민간인으로선 분단 이후 처음으로 판문점을 통해 북에서 남으로 걸어 내려왔습니다. 임수경은 천주교 신자 보호를 위해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서 ‘평양 장충성당 축성 10주년 기념미사 봉헌’의 명목으로 공식 파견한 문규현 신부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 걸어서 한국으로 귀환하였고, 동시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 이후 임수경은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92년 12월에 가석방되어 풀려났고, 1999년 사면 복권되었죠. 1993년 8월에 한국외국어대학교를 뒤늦게 졸업했고, 이후 서강대학교 대학원을 거쳐 미국 코넬 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에서 인권학을 공부했습니다.



 임수경은 그 후 1995년에 신문기자와 결혼했으나 몇 년 후에 이혼하고 사회운동가로 활동하면서 몇몇 대학에서 강의를 했는데, 2005년에 영어 연수를 받으러 필리핀에 갔던 아들이 물에 빠져 죽는 사건을 당하고 충격을 받아 슬픔에 빠져 해인사에 머물렀었습니다. 이후, 오스트리아 빈 평화대학원 등에서 공부를 했으며, 2011년 4월 5일 함세웅, 고은, 윤민석 등과 함께 미 문화원 방화사건을 일으킨 ‘김은숙을 위한 작은 음악회’를 열었습니다. 그녀가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은 2000년 5월 '386 광주 술파티 사건'. 결혼 후 미국으로 건너가 살다 일시 귀국했던 그는 5·18기념행사 전날 운동권 출신의 당시 민주당 의원과 총선 당선자들이 여성 종업원이 있는 단란주점에서 술을 마신 것을 비판하는 글을 인터넷에 올려 파문이 일었습니다. 그리고 2004년부터 민주통합당에서 영입을 추진하여 이번 4·11총선 때 임종석 전 총장과 우상호 의원 등 전대협 출신들의 지원으로 비례대표 후보가 되어 당선된 것입니다. 이것이 임수경 의원의 이름 앞에 '통일의 꽃'이라는 별칭이 붙게 된 사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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