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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반민족행위자 백선엽의 군복을 문화재로...대한민국은 친일파의 나라?

자발적한량 2013.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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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반민족행위가 6.25 전쟁의 공으로 덮어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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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1일 문화재청이 "의생활 분야에서 역사·문화적 가치가 큰 유물"이라는 이유로 백선엽, 민철훈, 윤웅렬, 윤치호, 민복기 등의 의복과 유물 11건 76점을 문화재로 등록 예고한 가운데, 독립운동가단체들이 반대시위를 하는 등 반발 움직임이 보이고 있습니다. 얼마 전 6.25전쟁이 언제 발발했는지 모르는 20대가 34%가 되며, 3.1절을 삼점일절이라고 읽으며 무슨 날인지도 모르는 초등학생이 반이나 된다는 기사를 접해 답답한 마음이었는데, 오늘은 왜 독립운동가단체들이 문화재청의 이러한 등록 예고에 반발하는지 쓰고자 합니다.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를 비롯한 항일·독립운동가 단체들은 문화재청에 대해 "문화재청이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의복과 유물을 문화재로 등록하려는 것은 항일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모독이자 문화유산헌장의 기본 정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모순된 행위"라며 "문화재청은 문화재 등록을 중지하라"고 촉구했는데요. 이러한 반발의 이유는 문화재청이 등록 예고한 의복들의 주인공인 백선엽, 민철훈, 윤웅렬, 윤치호, 민복기 등이 모두 지난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됐거나,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에 이름이 오른 인물들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백선엽의 광복 후 행적을 먼저 말해보죠. 백선엽은 군의 시선으로 봤을 때는 '전쟁영웅'입니다. 백선엽은 1948년 국군 창설 이후 제5연대장과 육군본부 정보국장을 거쳐 1950년에 대령의 계급으로 제1사단장이 됩니다. 육본 정보국장 재직시절 공산 게릴라 소탕 및 숙군 사업을 지휘하였는데, 이 때 남로당 프락치로 활동하던 중 체포되어 처형위기에 놓인 소령 계급의 박정희의 목숨을 구해주기도 하죠. 당시 함께 작업에 임했던 김창룡은 좌익 혐의자들에 대해 강경한 입장이었지만, 백선엽은 단순가담자를 선별하여 가벼운 징계를 내릴 것을 건의했고, 한번만 살려달라며 이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거듭 부탁하는 박정희의 재능을 아깝게 생각한 백선엽은 그에게 전향을 권고하고 그를 구명해줍니다. 백선엽과 박정희는 같은 만주군 출신이기도 하죠.




6.25 전쟁이 발발하고 백선엽의 1사단 역시 부득이하게 퇴각을 하게 됩니다. 비록 퇴각은 하였지만 전쟁 초기 한국군 전방 사단 중 편제를 유지하며 후퇴한 사단은 백선엽 대령의 1사단, 김종오 대령의 6사단, 이성가 대령의 8사단 뿐이었죠. 그 후 백선엽은 대령에서 준장으로 승진하며 장군이 됩니다. 다부동 전투에서는 국군 병력들이 무단 이탈하자 "내가 앞장설 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도 좋다"고 말한 일화가 유명합니다. 그가 지휘하는 1사단은 평양에 제일 먼저 입성한 부대가 되기도 하죠. 




야전전투사령부 사령관이 된 백선엽은 휴전협상이 시작됐을 때 한국군 대표로 참석하기도 하였고, 이후 육군 제2군단장이 됩니다. 그리고 1952년 7월, 32세의 나이로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죠. 1953년 대장으로 진급한 백선엽은 1954년엔 동양 최초로 제1야전군을 창설하고 초대 1군사령관에 임명되어 휴전선 방어 책임을 미군으로부터 사실상 인수 받았으며, 1957년 또 다시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합니다. 1959년 연합참모본부 의장으로 취임한 그는 1960년에 신진 장교들에 의한 청군 운동이 일어나자 스스로 용퇴를 결심하고 퇴역을 하죠. 




퇴역 후 백선엽은 외교관으로 활동했는데요. 주중화민국대사, 주프랑스대사, 네덜란드·벨기에 대사, 가봉, 토고, 세네갈, 카메룬, 차드, 모리타니 주재전권대사를 역임했습니다.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났지만, 과거 자신을 살려준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주캐나다 대사로 전보되었다가 교통부 장관이 되었구요. 퇴임 후에는 안보 강연을 다녔습니다. MB 정권은 6.25 발발 60주년을 기념하여 백선엽을 명예 육군 원수로 추대하려 했지만 언론과 시민단체의 반발로 통과되지 못했죠. 그는 금성태극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금탑산업훈장을 받았고, 미국에서도 은성무공훈장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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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렇게 대단한 6.25전쟁 당시 북한의 남침으로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의 군인으로써 지대한 공을 세운 백선엽에 대해 왜 나라를 위해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의 후예들이 반대를 하는 것일까요? 참고로 독립운동가 차이석 선생의 장남 차영조 씨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기념하는 사업도 안 되고 있는 마당에 친일파들이 오히려 영웅이 되는 것에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 통탄해 마지 않는다"며 욱일승천기를 두른 백선엽 장군의 모형을 바닥에 내동댕이 치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죠.



바로 백선엽의 광복 전 행적 때문입니다. 백선엽은 1940년에 일제가 세운 괴뢰국인 만주국이 초급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세운 펑텐 군관학교에 진학하였고, 1942년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군 소위로 임관한 뒤 간도특설대에서 3년동안 근무합니다. 간도특설대는 간도 지역의 항일세력의 토벌에 투입된 부대로써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108차례에 걸쳐 동북한일연군과 팔로군에 대해 작전을 벌였죠. 



백선엽은 1993년 일본에서 자신이 출간한 '간도특설대의 비밀'에서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라고 밝힙니다. 또한 그는 "우리(백선엽과 간도특설대)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동포에게 총을 겨눈것이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며 "간도특설대의 활동에 대해 민중을 위해 한시라도 빨리 평화로운 생활을 하도록 해주는 것이 칼을 쥐고 있는 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등 간도특설대가 자행한 항일세력 토벌활동을 애써 미화했습니다.




일부에서 백선엽이 고당 조만식 선생의 비서로 활동한 것을 얘기하곤 하는데, 1945년 8월부터 12월까지 불과 5개월동안 비서로 활동하다가 북한의 공산주의체제 성립을 피해 홀로 월남합니다. 그 이후부터 남한에서의 그의 활약이 시작된 것이죠. 또한 백선엽과 그의 친동생 백인엽은 선인재단을 설립, 인천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사립학교를 운영하였는데요. 선인재단은 군사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엄청난 규모로 성장했지만, 이사장인 백선엽이 선인재단 내부에서 부패를 저지른 사람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점도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사학비리의 원흉이 선인학원이라는 얘기도 있죠.




또한 그가 사령관으로 있던 백(白)야전전투사령부(이하 백야사)가 지리산 토벌작전, 일명 '쥐잡기 작전'을 하면서 노인은 물론 두 살 배기 갓난아이를 총살하는 등 집단 양민 학살을 자행했고, 전남 광주에 포로수용소를 만들어 적과 민간인의 구분도 없이 개·돼지 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엄동설한에 이들을 얼어죽게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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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철훈, 윤웅렬, 윤치호, 민복기 등을 대표하여 백선엽으로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백선엽이 6.25 전쟁 당시 커다란 공을 세운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백선엽은 그래야만 했습니다. 이승만이 자신의 허약한 정치 기반을 다지기 위하여 기존의 친일파들을 대거 기용하고 그들의 과거 친일행적을 묵인해주었죠. 이들은 자신의 친일행적을 감추기 위해서 당시 시대 흐름에 편승하여 '반공'을 목청껏 외쳐야 했고, 이러한 그들에게 6.25전쟁은 신이 내려준 기회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을 위해 혁혁한 공을 세워 순식간에 친일파에서 나라를 구한 전쟁영웅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거든요.



아직까지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한이 대치 중인 이 한반도에서 살고 있는 백선엽은 정말 행운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는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나치 협력자들에 대해 가감없이 그 죄를 물었죠. 백선엽이 만약 프랑스인이었다면 지금쯤 적에 대한 협력활동이 적힌 묘비가 세워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의복을 문화재로 등록하겠다구요?




문화재청은 이번 논란에 대해 '정치적 측면을 떠나 근현대사 유물로서 가치가 인정된다'는 입장인데요. 어떻게 백선엽에 대한 평가가 정치적인 측면이라고 보는 지 그들의 사상이 의심스럽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정치적 측면이란...'백선엽이 현재 대통령인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인 박정희의 목숨을 구해주었기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 눈치를 보느라 그런다' 뭐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구요. 백선엽은 간도 특설대로 활동하면서 민족을 배반하고 일제에 협력하여 그들의 수족이 되어 온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법률에 의해 명시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백선엽의 군복에 대해 '반민족행위자 백선엽의 군복' 이렇게 이름을 붙여 문화재로 보존을 하겠다면 찬성하겠습니다. 백선엽의 의복을 문화재로 등록하는 것은 친일 행적 등 과거 민족에게 저지른 범죄는 덮어두고, 결과론적으로 6.25전쟁에 공을 세웠고, 반공에 앞장섰으니 모든 것을 나가리 해준다는 것이며, 현 정부가 가진 친일에 대한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될 것입니다. 또한,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독립운동세력을 인정하지 않고, 그들을 대한민국과 별개로 취급하는 셈이 될 것입니다.


P.S) 한 네티즌이 이번 논란에 대해 '그러면 김재규가 입었던 군복과 박정희를 쏜 권총도 문화재로 등록하자'고 했다더군요. 정치적 측면을 떠나 10.26 사건이란 근현대사의 족적을 남기기에 박정희를 쏜 권총...엄청난 가치가 있는 것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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