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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의 선종..고인에 대한 예의는 갖춥시다.

자발적한량 2009.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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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카톨릭의 큰 별이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께서 선종하셨습니다. T군의 종교는 개신교이지만, 믿는 종교에 관계없이 한국 사회의 원로이자 한국 카톨릭을 지탱해오신, 많은 이들의 마음을 위로해주시던 분이 세상을 떠나신 것에 조의를 표합니다.


  먼저 故 김수환 추기경의 호칭인 추기경에 대해서 카톨릭 신자는 아니지만 아는대로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추기경, 라틴어로는 Cardinalis죠. 추기경은 카톨릭에서 교황 다음의 권위와 명예를 누리는 고위 성직자입니다. 정식 칭호는 거룩한 로마 교회의 추기경(De Sanctae Romanae Ecclesiae cadinalibus)입니다. 교회의 황태자로 비유되어 전하라는 존칭으로 불리기도 하죠. 라틴어 Cardinalis는 ‘주요인사’ 내지는 ‘우두머리’를 뜻하는 라틴어 cardo에서 유래한 말로 9세기 초에 처음 등장합니다. 한자로 번역된 추기경에서 추기라는 말은 중추가 되는 기관을 말하며, 경은 높은 벼슬에 대한 경칭입니다.


 故 김수환 추기경은 1922년 음력 윤 5월 8일(양력 7월 2일) 대구 남산동 독실한 구교우 집안에서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조부 김보현 요한은 1868년 무진박해 때 충남 연산에서 체포돼 서울에서 순교했습니다. 천주교로 인해 몰락한 집안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김 추기경의 부친 김영석 요셉은 옹기장수로 전전하면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김 추기경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선종하자 모친인 서중하 마르티나는 옹기와 포목행상을 하며 엄격하게 아이들을 키웠다고 합니다.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온 김 추기경은 5년제 소신학교인 동성상업학교(지금의 동성고등학교) 을조에 입학했다가 '황국 신민으로서 그 소감을 쓰라'는 시험 문제에 "나는 황국 신민이 아님. 따라서 소감이 없음"이라고 썼다가 교장실에 불려가 크게 야단을 맞았다고 합니다. 그 길로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오라는 대구대교구장을 명령을 받고 1941년 4월 도쿄 조치대학 유학길에 오르게 됩니다.


 2차 세계대전으로 잠시 휴학했던 김 추기경은 해방 이후인 1947년 9월 혜화동 성신대학(지금의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 복학해 마치고 1951년 9월 15일 대구 계산동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됐습니다. 1966년 4월 부산교구에서 분리, 새 교구로 설립된 마산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968년 5월29일 대주교 승품된 그는 제12대 서울대교구장에 오르게 되죠. 그로부터 3년 뒤인 1969년 4월28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하여 추기경 서임됐다. 그의 나이 47세였습니다. 당시 주교였던 김 추기경은 1968년 2월 9일 한국 교회에서는 처음으로 사회적 발언에 나섭니다. 노동자들의 인간 존엄성을 되찾기 위해 나선 것입니다. 가톨릭노동청년회의 총재주교였던 그는 합법적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노동자를 불법 해고한 ‘강화 심도직물 사건’에 맞서 ‘사회 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주교단 공동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성명 발표 이후 정부가 사태 수습에 나서 6일 후 해고자들이 전원 복직되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됐지만 이후로도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생존권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절규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 때마다 김 추기경은 그들을 큰 품으로 끌어안았습니다. 김 추기경과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큰 버팀목이 되는 순간이었죠.

 김 추기경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파생된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점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기본권과 사회 정의가 지켜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1969년 3월 교황 바오로 6세가 발표한 새 추기경 명단에 김수환 대주교의 이름이 올랐습니다.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탄생한 것입니다. 추기경 서임식은 1969년 4월 28일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열렸습니다. 당시 김 추기경의 나이는 47세로, 전 세계 추기경 134명 가운데 최연소였습니다. 교황을 보필하고 교황 선거권과 피선출권을 갖는 고위 성직자라는, 자리의 높고 낮음을 떠나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크다는 반증이었기에 한국 천주교회 2세기만의 큰 경사였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후 30년 동안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을 역임했고, 주교회의 산하 여러 분과 위원장과 전국 단체들의 총재를 맡았으며, 1975년 6월 1일부터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했습니다. 또 1970년에는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67년 이후에는 한국 대표로서 여섯 차례에 걸쳐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에 참석하기도 하였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1998년 5월 29일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직을 사임합니다. 서울대교구장을 맡은 지 30년, 목자 생활 47년 만이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선교사 없이 신앙이 전파된 한국 천주교회의 형성과 발전이 세계 천주교회 속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전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984년 5월 6일에는 한국을 처음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과 103위 시성식을 여의도 광장에서 개최했습니다. 순교의 피로 전해져 내려온 한국 교회의 신앙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를 마련한 것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9년에도 한 번 더 방한해 제44차 세계 성체대회를 주례했습니다. 세계 성체대회를 계기로 1988년에 시작한 ‘한마음한몸운동’은 성체성사의 깊은 뜻을 삶으로 실천하자는 운동으로 지금까지 많은 결실을 맺었습니다.

 김 추기경은 북한 교회와 동포를 항상 기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서울대교구의 관할 구역이 휴전선을 넘어서 황해도까지 이어진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었습니다. 미사 마침예식에서 주교는 오른손으로 세 번 십자표시를 하면서 신자들에게 강복하는데 김 추기경은 언제나 그 마지막 세 번째 십자표시를 마음에 품고 있는 북녘 형제들을 생각하면서 그었다고 합니다. 통일에 대비하고 앞으로의 북한 선교를 위한 실질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1995년 ‘민족화해위원회’를 설립하게 됩니다. 같은 해 3월 7일 명동대성당에서 시작된 ‘민족화해미사’는 지금도 매주 화요일 오후 7시에 봉헌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 누구도 존중받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제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주목한 이유입니다. 그들을 위한 ‘우선적 사랑’에서 더 나아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사랑’으로 가야 합니다.” 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편에 선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기까지 한 1974년 민청학련 사건, 1978년 동일방직노조 사건 등 김 추기경은 성탄·사순 메시지나 강연, 시국담화문 등을 통해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짚어내는 일에 앞장서기 시작했습니다. 70-80년대를 지나는 동안 김 추기경은 우리사회 민주화 운동의 버팀목이자 잣대였습니다.

 1987년 6·10 민주항쟁 때도 명동성당 공권력 투입이라는 일촉즉발의 위기를 그런 믿음 하나로 막았습니다. “성당 안으로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우리를 다 넘어뜨리고 난 후에야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 김수환 추기경이 종교를 넘어 이 땅의 버팀목으로 여겨지는 것은 그가 더 낮는 자리에 있는 이들을 한 없이 끌어안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근래에 몇몇 게시판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故 김수환 추기경의 행적에 관해서인데요. 요약해보자면 김 추기경의 친일 행적과 과연 민주화운동을 위해 힘썼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일단 T군도 김수환 추기경에 대해 안좋게 생각하는 것이 몇가지 있긴 합니다. 2000년 이후의 발언들은 적잖은 실망을 주었습니다. 국보법 폐지 등에 대한 말바꾸기나, 한나라당과의 대화, 사학법 개정에 대한 문제..사학법 개정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는 뭐 카톨릭의 입장을 대변해야 했으니 어쩔 수 없지요. 그래도 십자가에 바퀴달고 끄는 퍼포먼스한 개신교보다는 낫다고 봅니다. 하지만 요즘 또 곰곰히 생각해보면, 결국 사회를 걱정하고 시대를 걱정했던 김수환 추기경이 정치적으로 이용된 면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의 어른인 김 추기경이 이렇게 말했다'라는 건 꽤나 파급효과가 있기 때문이지요.

 김 추기경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히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사관후보생이었다는 사진. 분명 이것에 관해서는 아직 그의 행적에 '친일'이란 단어를 추가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T군이 말한대로 최근의 행동들에는 분명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이 분도 어쩔 수 없나..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한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꼭 그러한 논란을 김 추기경의 선종 직후인 현재 일으킬 필요가 있냐는 것입니다. 어쨌건 김 추기경은 수십년동안 한국 카톨릭의 수장이자, 한국 사회의 어른이었으며, 실제로 많은 선행을 실천한 분인 것은 확실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 선행마저도 당연히 해야될 일을 그 당시의 종교인사들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김 추기경이 부각되는 것일 뿐이라고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더욱 김 추기경이 존경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문제라고 해서 김 추기경을 깍아내려질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김수환 추기경의 자화상입니다. 기자가 왜 자화상에 '바보야'라고 쓰셨나"라고 질문하자 머뭇거리다가 "바보 같지 않나요." 하면서 "있는 그대로 인간으로서, 제가 잘났으면 뭐 그리 잘났고 크면 얼마나 크며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안다고 나대고, 어디 가서 대접받길 바라는 게 바보지. 그러고 보면 내가 제일 바보같이 산 것 같아요."라고 말하셨다고 합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슬퍼 우는 사람들을 수없이 찾아다녔지만 그들과 삶을 나누지는 못했음을 부끄러이 고백한다. 돌아보건대 난 인간 문제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깊었다. 하느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을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몸과 피까지 내어주셨는데 난 그 흉내도 내보지 못했다. 내가 죽어 하늘나라에 가면 하느님한테 꾸지람들을 잘못이 그 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씀하셨던 故 김수환 추기경.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라는 김 추기경의 사목 표어답게 한평생을 낮은 이들을 위하여 노력하셨던 분입니다. 지금도 명동성당 근처에는 애도를 표하기 위해, 추기경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늘어선 줄이 남산 1호 터널 입구에까지 이어져있다고 합니다. 이제는 편히 쉬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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