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밟고 있는 땅/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장준하 의문사, 숨어있는 진짜 주인공은 따로 있다

자발적한량 2012. 8. 22.
728x90
반응형

로그인이 필요없는 추천 !

이 기사가 많이 알려져서 많은 분들께서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습니다

memory+


 제가 왠만해선 신문기사를 그대로 스크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기사만큼은 좀 더 많은 분들께서 보셨으면 하는 마음에 이렇게 내용을 가감없이 올립니다. 제가 작성한 글이 아니므로 광고를 모두 뺀 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저, 진실이 밝혀지기를 바라는 마음 뿐입니다. 오마이뉴스의 기사입니다.



장준하 의문사, 숨어있는 진짜 주인공은 따로 있다

'기록 봤다'는 박근혜씨에게 의문사위 담당 조사관이 말한다

최근 37년만의 이장 과정에서 타살 의혹으로 논란이 된 장준하 선생 의문사와 관련, 2003년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장준하 사건 담당 조사관으로 일했던 고상만씨가 추락 현장의 유일한 목격자인 김용환씨 조사과정을 밝힌 장문의 글을 기고했습니다. 고씨는 아울러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후보가 말하는 '조사 완료' 주장을 반박하고 직접 조사하고 보고서를 작성한 담당자로서 그 이유를 밝혀 왔습니다. <오마이뉴스>는 고씨가 실명으로 거론한 김용환씨에게 반론 기회를 제공하고, 누리꾼들이 장준하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접할 수 있도록 하는 차원에서 2004년 8월 <월간조선> 인터뷰(張俊河 失足死의 유일한 목격자인 前職 고등학교 교감 金龍煥씨) 기사를 링크합니다. [편집자말]
▲  지난 1일 검사한 고 장준하 선생의 유골. 오른쪽 귀 뒤쪽 두개골에 원형으로 함몰된 흔적이 있다.
ⓒ 장준하기념사업회 제공

관련사진보기


"미치도록 잡고 싶었다."

그랬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나온 카피처럼 나 역시 장준하 사건의 진실을 미치도록 알고 싶었다. 2003년 6월 출범한 제2기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이 사건 조사팀장이었던 나는, 그래서 약 1년여간 주어진 조사 기간 동안 정말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지난 2004년 6월, 장준하 의문사 사건은 '진상규명 불능'으로 결정되었다. 너무나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거기까지가 당시 우리의 한계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8년여가 지난 2012년 8월 15일. <한겨레>의 단독 보도를 통해 다시금 장준하 선생의 사인을 둘러싼 의혹이 폭발했다.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장 선생의 두개골에서 지름 6cm 가량의 동그란 형태의 가격흔이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언론은 다시금 장 선생의 사인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면서 타살 가능성에 대한 논란이 정치권에서 제기되면서 진실규명을 위한 재조사의 필요성이 불거지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나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기사가 있었다. 그리고 그 기사를 읽는 순간 나는 가벼운 분노로 평상심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새누리당 국회의원 박근혜씨의 인터뷰 기사였다.

박근혜 "장준하 타살? 이미 조사하지 않았나?"

▲  1973년 12월 24일 서울 YMCA 2층 총무실에서 개헌 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발표하는 장준하.
ⓒ 장준하기념사업회

관련사진보기

장 선생 사건에 대한 '타살론'이 불거지자 언론과 국민의 시선은 박근혜씨를 향했다. 장 선생이 타살되었다면 이 암살 공작 실행의 최 정점은 당연히 유신 독재 권력을 휘두르던 박정희 대통령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면서 동시에 이번 대선의 가장 강력한 후보인 박근혜씨의 입장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나 역시 박근혜씨의 반응이 궁금했다. 하지만 '혹시나'는 '역시나'였다. 지난 17일 새누리당 의원총회가 끝난 후였다. 기자들의 주된 질문은 당연히 "장 선생 유족의 타살 가능성 주장에 대한 박근혜씨의 입장이 뭐냐"였다. 그러자 박근혜씨의 답은 그 특유의 '한줄 멘트'였다. 박근혜씨는 "그거는 뭐 진상조사위에서 현장 목격자 등을 통해 조사가 쭉 이뤄지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면서 "기록이 있는 것을 봤다"는 말까지 덧붙였다고 한다. 

언론은 박근혜씨가 언급한 '기록'이 지난 2004년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발표한 장준하 사건 보고서를 언급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이 보고서에서 장 선생에 대해 '진상규명 불능'으로 결론 내린 것을 상기시킨 것으로 분석했다.

이 기사를 읽은 나는 한마디로 어처구니 없었다. 가장 궁금했던 것은 박근혜씨가 정말 그 '기록'을 읽은 것이 사실인지 의심스러웠다. 왜냐하면 그가 이 보고서를 진짜 읽고도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매우 잘못된 해석'이기 때문이다. 박근혜씨가 언급한 문제의 보고서를 직접 작성한 사람으로서 나는 그의 잘못된 이해를 바로잡고자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1975년 8월 17일 약사봉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장준하 의문사 사건의 주인공은 사실 '장준하'가 아니다. 이 사건의 숨어있는 '진짜 주인공'은 바로 1975년 8월 17일 장 선생과 함께 약사봉을 등반하던 중 실족 추락사를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김용환씨다. 그리고 그의 이같은 주장에 따라 장 선생의 사인은 실족 추락사로 알려졌다. 즉, 장준하 의문사의 모든 '시작과 끝'은 바로 이 김용환씨에 의해 완성된 것이다(지난 2004년 <월간 조선>과 김용환씨가 실명 인터뷰를 한 사실이 있기에 여기서도 그의 실명을 공개한다. ☞ <월간 조선> 인터뷰 바로가기).

그는 1967년 장 선생이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당시 자원봉사를 하겠다며 찾아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된다. 그 후 1971년까지 김용환씨는 장 선생이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던 시기에 지구당 간사 등을 맡아 일했다. 그러나 1971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장 선생이 낙선하자 그 곁을 떠났고 이후 사건이 발생한 그날까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며 살았는지 그 스스로 제대로 밝힌 사실이 없어 알 수 없었다. 다만 그의 주장에 의하면 더러 장 선생을 찾아 오기도 했다는데 그러한 김용환씨가 사건 발생 당일 느닷없이 다시 나타난 것이었다.

나는 김용환씨를 15차례 정도 만났다. 이처럼 조사 횟수가 많아진 것은 사실 김용환씨의 모호한 진술 때문이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일관된 진술을 하지 못했다. 오래되어 기억이 없어진 것인지, 아니면 의도적인 회피인지 따지지 않겠으나 '유일한 목격자'로서 그의 언행은 상당히 난감했다. 

더 이상한 일은 그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진술을 바꿨다는 점이다. 그는 사건 발생 직후 문익환 목사 앞에서 사건이 발생한 경위를 말한 사실이 있었다. 이때 문 목사가 김용환씨의 목격 주장을 카세트 테이프로 녹음했는데 우여곡절 끝에 이를  찾아내어 녹취록으로 제시했는데도 이 내용을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이 직접 지문을 찍고 확인한 '1988년 경찰 재조사' 진술조차 핵심 내용을 부인하기도 했다.

그동안 장준하의 실족 추락사를 주장한 보수 언론 및 인사들이 가장 핵심으로 내세운 논리 역시 바로 목격자 김용환씨였다. 박근혜씨가 이른바 '한줄 멘트'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의미 역시 바로 이것이라고 판단된다. "장 선생이 실족 추락사했음을 직접 봤다는 목격자가 있고 그를 조사하였는데 무슨 타살이며 암살을 주장하느냐?"는 것이 그들의 주된 논리였다. 그렇다면 과연 이같은 그들의 주장은 정당한 것일까.

우리 역시 김용환씨의 주장이 사실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 오래된 '의문의 사건'에 마침내 종지부를 찍자고 결의를 다졌다. 하지만 아니었다. 목격자라는 김용환씨는 자신이 목격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관성있게, 그리고 신빙성있게 제시하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논의 끝에 그동안 이 사건의 목격자로 알려진 그의 정체성을 수정하기로 했다. '목격자' 김용환이 아닌 '동행자' 김용환이었다. 즉, 그는 이 사건을 목격한 이가 아니라 사건 당일 장 선생과 함께 있었던 '동행자'라는 게 정확한 표현이라고 판단했다.

김용환은 왜 목격자일 수 없는가

▲  1975년 8월 명동성당에서 열린 장준하 선생 장례미사
ⓒ 장준하기념사업회

관련사진보기


먼저 동행자 김용환씨가 조사 당시 '최종적으로' 주장했던 사건 당일 자신의 행적부터 문제였다. 그는 1975년 8월 17일 오전 9시경 장 선생과 함께 포천 약사봉으로 산행을 간다. 오전 11시 30분. 약사봉에 도착한 그는 장 선생을 비롯한 산악회원과 함께 약 30여 분에 걸쳐 물이 흐르는 계곡 끝자락에 도착하게 된다. 그런데 일행보다 늦게 끝자락에 도착한 김용환씨는 누군가로부터 장 선생이 혼자 산에 올라갔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뒤쫓아 올라갔다고 한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니 군인 2명과 커피를 마시고 있던 장 선생을 만났다는 그는 이어 함께 산행을 시작했고 산 정상 부근에 이르러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었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하산 도중 발생했다. 앞장서서 먼저 내려가던 그의 뒤를 쫓아오던 장 선생에게 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고에 이르게 된 경위에 대해 김용환씨는 조사 기간 내내 단 한번도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못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장준하의 추락 사고 당시 그가 목격한 내용이 무엇이냐"는 의혹이었다. 그는 사건 발생 직후 문익환 목사가 녹음한 1975년 사건 경위 녹음 테이프에서 "(뒤를 돌아보았을 때) 선생님이 나무 윗부분을 잡으시고 아마 나무… 그래서 제가 여기서 보았을 때 나무가 휘는 걸 봤어요. 옆에서 봤어요"라고 분명히 말했다. 이같은 유일한 목격자 김용환씨의 주장에 따라 이후 장 선생의 사인은 '실족 추락사'로 종결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를 뒤집는 새로운 진술이 발견되었다. 놀랍게도 당사자는 김용환, 바로 그였다. 

폐기된 것으로 알려졌던 1988년 포천 경찰서 재조사 기록을 찾아낸 것은 '어리석은 집념' 덕분이었다. 그리고 이 1988년 기록에서 우리는 김용환씨에 대한 아주 강력한 의혹을 확인하게 된다. 즉, 담당 경찰 한희권이 그에게 장 선생 추락 당시 목격한 사실을 묻자 "저는 장준하씨가 실족 추락할 때 소나무를 잡았는지, 안 잡았는지 보지 못하였는데, 며칠 후 동아일보 신문에서 소나무를 잡고 내려오다 떨어졌다고 한 것을 보았습니다"라는 진술이었다. 

그야말로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1975년 이래 지금까지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진 장준하의 최후는 "소나무를 잡고 하산하다가 이 나무가 휘면서 추락, 실족사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알려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이미 말한 것처럼 유일한 '목격자' 김용환씨의 "내가 봤다"는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1988년 재조사 기록에서 김용환씨는 이 모든 것이 사실은 목격한 것이 아니라 동아일보 기사를 보고 알게 되었다고 완전히 엉뚱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나의 추궁에 대해 그는 강하게 부인했다. 자신이 지장까지 찍고 확인한 1988년 재조사 기록에 대해 "그 진술이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던 그가 다시 또 진술을 번복한 것은 의문사위 12회 조서에서였다. 그는 "사실 저는 장준하 선생이 소나무를 잡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그 지형으로 보아 장준하 선생이 소나무를 잡지 않고서는 그 단애 지점으로 내려 올 수 없다고 생각하여 장준하 선생이 소나무를 잡았다고 주장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본 것은 무엇일까. 그의 진실이 무엇인지 나는 여전히 알 수 없다. 

모두가 '예'라고 할 때 혼자 '아니요'하는 목격자의 진실?

▲  장준하 선생 장례식 모습
ⓒ 장준하기념사업회

관련사진보기


중요한 사실은 또 있었다. 보수 언론은 김용환씨에 대해 이른바 좌파 세력들이 "억울한 피해자를 만들고 있다"며 비난해 왔다. 김용환씨 역시 지난 2004년 <월간 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조사관들은 내가 거짓말을 안 하고 있다는 걸 알아요. 그런데도 조사 기간을 연장하는 도구로 활용하고자 의문사위가 나를 이용하는 것"이라는 취지로 비난하기도 했다. 이같은 기사를 보면서 나는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꼈다. 

하지만 나는 이에 대해 단 한 번도 공개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정말 그에게 확인하고 싶은 진실이 있다. 사건이 일어난 8월 17일 낮 12시부터 이후 24시간 동안 그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그가 지겹게 되풀이했다며 비난했던 핵심 중 한가지가 바로 이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겹겠지만 나는 또다시 그에게 진실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사건 직후 김용환씨는 자신이 입고 있던 잠바를 벗어 숨진 장 선생의 얼굴을 가려줬다고 한다. 이어 산악회장의 지시에 따라 오후 4시경, 이른바 '런닝구'라 불리던 속 내의만 입은 채 가까운 이동 파출소로 내려갔다고 주장했다. 이후 파출소에서 잠시 대기하던 김용환씨가 다시 포천 경찰서로 경찰과 같이 이동한 것은 저녁이 다된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밤을 보낸 다음날, 김용환씨는 의정부지청 서돈양 검사로부터 조사를 받았고 이어 김희숙 여사의 신원 보증 덕분에 석방될 수 있었다고 그동안 주장해 왔다.

그런데 이같은 김용환씨의 주장은 '안타깝게도'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지면 관계상 일일이 열거할 수 없어 결론만 말하자면 그날 밤, 김용환씨가 주장하는 그 장소에서 그를 봤다는 목격자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그날 밤 그를 당연히 봤어야할 사람들, 예를 들어 그가 찾아갔다는 이동 파출소의 경찰관 4명은 입을 모아 그의 주장을 반박했다. "그날 이동 파출소를 찾아온 사람은 장 선생의 미망인과 아들, 그리고 중정 요원이 다였다"라고 그들은 말했다.

로그인이 필요없는 추천 !

이 기사가 많이 알려져서 많은 분들께서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더 나아가 이들은 1975년 당시에도 파출소에 런닝구만 입고 오는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었고 그런 사람이 장 선생 사건 목격자라며 찾아왔다면 이를 기억하지 못할 리 없다고 말했다. 또한 그 같은 목격자가 있었다면 업무 절차상 목격자를 상대로 사건 실황조서 등을 작성했어야 하는데 그같은 일을 한 사실 역시 없다고 덧붙였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사망한 장 선생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사건 현장을 방문한 당시 의정부지청 소속 서돈양 검사의 진술이다. 그 역시 김용환씨 행적에 대해 전혀 다른 의혹을 내 놨다. 김용환씨가 포천 경찰서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그날 밤 새벽 1시경, 서돈양 검사는 사건 현장에서 목격자를 자처하는 김용환씨를 분명히 만났다고 거듭 확인했다. 그의 주장은 매우 구체적이었다. 목격자를 자처하는 그를 조사할 필요가 있어 곁에 있던 포천 경찰서 직원에게 "데리고 있다가 내일 의정부 지청으로 출석시키라"는 지시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서 검사의 주장을 확인하고자 우리는 김용환씨 동의하에 대질 조사를 실시했다. 하지만 틀림없이 그날 밤, 사건 현장에 있었고 여러 대화도 나눴다는 서 검사와 달리 김용환씨는 부인도, 시인도 하지 않은 채 엉거주춤한 자세만 취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약 1시간 정도를 횡설수설하더니 아무런 부연설명도 없이 그저 "자신은 그날 밤 현장에 가지 않았다"는 주장만 내놓았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김용환씨가 그날 밤 그 시간에 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주장은 서 검사의 일방적 주장만이 아니었다. 서 검사로부터 "데리고 있다가 지청으로 데려오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경찰관을 우리가 천신만고 끝에 찾아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진술을 통해 서 검사의 진술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그의 진술에 의하면 그날 밤 새벽 1시경, 현장에서 목격자라는 김용환씨를 만났고 서 검사의 지시에 따라 그를 포천경찰서로 데려가 자신이 직접 수사과장실에서 조사까지 했다는 진술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일치된 진술에도 불구하고 김용환씨는 끝내 그날 밤 자신의 행적을 부인했다. 

돌이켜 생각할수록 그날 밤, 그가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나는 여전히 궁금하다. 그의 행적에 대해 '모두'가 그의 주장과 다르게 말하고 있다. 반면 김용환의 행적을 입증하는 참고인들의 증언은 서로 맞물려 일치하고 있음에도 왜 '순수한 목격자'임을 자처하는 그 혼자만 모두 아니라고 말하는 것일까. 이들 전직 검사와 경찰들이 모두 공모하여 자신을 공격한다는 주장만은 부디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보안사령관에게 직보한 문서는 왜 사라졌을까

진실에 도달하는 길은 너무도 어려웠다. 목격자를 자처하는 김용환씨의 주장은 신뢰하기 어려운 일방적 주장이었고 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더 많은 새로운 의혹이 불거졌다. 그래서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바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와 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 그리고 경찰 등 정보 수사기관이 존안하고 있는 문서의 확보가 그것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우리의 노력은 가당찮은 일이었다. 이른바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로 대변하는 민주정부 10년이라지만 변한 것은 정치권력이었을 뿐 정보기관의 속성은 전혀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나마 국가정보원으로부터는 최소한의 협조라도 받았으나 기무사령부는 전혀 아니었다. 우리가 요청한 문서 중 기무사령부로부터 협조받은 문서는 단 한 장도 '없었다'.

기무사측은 장준하와 관련한 일체의 문서도 존안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거짓말이었다. 적어도 우리가 확인한 조사에 의하면 '반드시' 자료가 있어야 했다. 사건 당시 현장을 방문한 105 보안부대장의 진술이었다. 그는 앞선 두차례의 의문사위 조사에서 사건 당일 장 선생 사망 현장을 방문한 사실을 거듭 부인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현장을 방문했다는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어렵게 그가 현장을 방문했다는 다른 참고인의 진술을 확보했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말을 바꿔 "그동안 거짓말을 했다"고 자백했다. 이에 "현장에서 무엇을 했으며 사후 조치는 무엇이었는지" 묻자 그는 "장 선생 사망과 관련한 내용을 6하 원칙에 따라 정리한 후 이를 텔레타이프로 보안사령관에게 직보했다"라고 진술했다. 나는 이같은 사실에 근거하여 즉각 공문을 보내 기무사측에 자료 제출을 요청했다. 적어도 그동안 "무조건 없다"며 말해온 그들이 "이번에는 절대 발을 빼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순진했다. 회신 결과는 또 다시 '존안하지 않음'. 6자였다. 차후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국가정보원 모 관계자로부터 전해들은 말은 참담했다. 그는 기무사측 관계자가 자신들에게 "정보기관이 그렇게 정보를 내주고도 부끄럽지 않으냐"며 단 한 장의 문서도 협조하지 않은 기무사를 자랑스럽게 말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조건에서 "모든 조사를 다 하지 않았냐"고 하는 박근혜씨의 말은, 그래서 그 순간 울컥 분노가 치미는 기억이었다.

결국 목격자를 자처하는 김용환씨의 신뢰할 수 없는 진술, 그리고 사실상의 유일한 단서인 정보기관의 장준하 관련 존안 문서를 협조받지 못한 상태에서 우리는 끝내 '조사기간 종료'라는 벽에 부딪혀 조사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는 예정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시간은 결코 우리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시작부터 2기 의문사위의 생명은 '딱 1년'이었다. 그리고 이중 실제 조사 기간은 9개월에 불과했고 따라서 촉박한 이 기간 동안 초과근무 수당도 없는 야근을 매일 같이 했다. 그러면서 목격자라는 그가 단 한 번도 설명한 적 없는 의문의 추락 코스를 찾고자 낯선 약사봉을 수없이 기어 올랐다. 매일 밤 장 선생의 시신 사진을 들여다보며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그 오른쪽 기저부 부위를 보고 또 보며 이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 그야말로 '미치도록' 찾고 또 찾았다.

하지만 장준하 사건의 최종 승리자는 '조사기한 만료'라는 절대적 힘에 기댄 그들이었다. <월간 조선>이 인정한 순수하고 무고한 목격자와 마이크로 필름 형식으로 존안되어 있는 이 사건 관련 정보 문서를 끝내 내놓지 않고 버텨낸 정보기관이 최종  승리자가 된 것이다. 

1년만이라도… 아니면 다만 6개월만이라도 더 조사 시간이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지만 끝내 거기까지였다. 2기 의문사위는 더 이상 연장되지 못했고 결국 그 상황에서 나는 장준하 사건 결과 보고서를 작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장 선생 사건의 법의학 감정 요청을 했던 경북대 의대 채종민 교수의 감정 답변서를 읽던 중 나는 새로운 기대에 흥분했다. 장 선생의 사인을 규명할 수 있는 새로운 방안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분묘 개장을 통한 두개골 감정'이었다.

'개구리 소년' 진실 밝혀낸 법의학자 '채종민'

▲  17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통일동산에서 열린 '장준하 공원 제막식 및 제37주기 추도식'에서 한 참배객이 고인의 묘소에 큰절을 하고 있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나는 조사 과정에서 찾아낸 장준하의 시신 사진을 토대로 사인을 감정해 달라고 국내외 여러 법의학자에게 의뢰했다. 그러나 애초 기대와 달리 실제 부검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확한 사인 규명은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이때 채종민 교수가 우리에게 제안한 의견은 새로운 빛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는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는 이른바 '개구리 소년' 사건이 사실은 타살임을 밝혀낸 저명한 법의학자였다. 실종된 '개구리 소년' 5명이 모두 숨진 채 발견되자 경찰은 이들이 길을 잃은 후 저체온증으로 사망했다며 '사고사'로 판단했다. 그러나 채종민 교수는 이들의 두개골에서 흉기에 의한 상처가 있음을 발견했고 이에 따라 사실은 소년들이 타살되었음을 밝혀내어 화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채교수가  이 사건의 진실을 밝혀낼 방법이라며 우리에게 제시한 의견이 바로 장 선생의 분묘를 개장하여 유골 감정을 실시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통해 장준하의 사망에 가장 큰 의혹인 우측 후두부의 함몰 골절 여부 및 이 골절에 연관한 선상 골절을 파악하여 둔체를 추정하면 사망 경위가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더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즉각 위원회에 보고하여 재가를 받은 후 유족에게 채 교수의 제안을 전달했다. 

하지만 이 제안을 두고 유족측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가장 큰 고민은 장 선생과 함께했던 오랜 지인들의 '강력한 반대'였다. 그들은 "박정희 세력이 아직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상황에서 과연 공정한 조사를 장담할 수 있겠느냐"며 강한 우려를 표명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또 다른 음모가 아닌지 의심할 정도였다. 결국 여러 가지 많은 논의가 진행되었으나 유족의 입장으로 고려해야 할 많은 요인 속에 망설이다가 끝내 '조사 기간 종료'에 따라 유골 감정 조사 역시 중단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너무도 안타까운 이 상황을 그대로 이 종합보고서에 담았다. 그러면서 "비록 우리의 조사는 여기에서 중단되지만 향후 장 선생의 의문사를 다시 조사할 경우 분묘 개장을 통한 유골 감정이 반드시 이뤄져야 함"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8월 1일 그렇게 미치도록 알고 싶었던 장준하 선생의 비밀이 해제되었다. 사후 37년간 땅속에서 간직되어온 장 선생의 두개골이 '진실의 빛' 아래 내려와 그 타살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의혹을 분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장준하 의문사, 진실 규명을 위해 재조사해야

▲  17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통일동산에서 열린 '장준하 공원 제막식 및 제37주기 추도식'에서 부인 김희숙씨가 눈물을 닦고 있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그렇기에 나는 이 사건 2기 의문사위 조사팀장으로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박근혜씨에게 말한다. 박근혜 후보가 언론 인터뷰에서 언급한, 다시 말해서 내가 쓴 보고서를 봤다며 "이 사건의 조사가 끝났다"는 주장은 잘못된 해석이다. 우리가 이 사건을 '진상규명 불능'으로 결정한 것은 상당한 조사 진척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유골 감정'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즉, 향후 다시 장 선생 사건을 조사할 수 있는 여건이 된다면 국정원 등 정보기관으로부터 끝내 협조받지 못한 존안 문서의 확보와 더불어 유골 감정을 과제로 남기고자 일단 '진상규명 불능'으로 결정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장 선생의 유골에서 혹시나 했던 그 의혹이 분명하게 드러난 지금, 이 사건의 전면적 재조사는 너무도 당연한 요구다. 그런데 이를 두고 '정치적 공세'라고 폄하하는 것은 그야말로 잘못된 '정치적 오해'일 뿐이다.

누구에게나 목숨은 귀하다. 장 선생의 가족들에게, 남편이자 아버지인 장준하 선생이 왜 죽었는지 그 진실을 알게 해주는 것은 민주주의 인권 국가에서 너무나 당연한 기본이며 원칙임을 상기해야 한다. 

2007년 대통령 경선에 출마한 당신은 장준하 선생의 부인 김희숙 여사를 찾아가 "진심으로 위로 드린다"라고 말한 후 손을 맞잡았다. 당신은 그때 일각으로부터 '진정성 없는 이벤트 사과'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에 대해 당신은 인간적으로 억울한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또 김희숙 여사를 방문한 후 그해 8월 장 선생의 추모제에 참석하려 했으나 장준하추모사업회 차원에서 "진정성 있는 사과 없이 추모제에 참석하는 것을 반대한다"며 공식 거부한 것을 두고도 역시 서운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근혜씨. 이제 진짜 그 진심을 우리에게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바로 지금이다. 우리를 실망시키는, "이미 모든 조사가 끝났다"는 잘못된 이해에 기초한 그런 말이 아니라 "확인해야할 진실이 있다면 당연히 밝혀야 한다"는 말을 당신의 입을 통해 듣고 싶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장 선생의 사망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협조받지 못한 정보기관의 존안 자료 역시 모두 공개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내가 앞장 서겠다"는 의지까지 밝혀 준다면 당신의 진정성에 대해 의심했던 그 많은 논란은 '무색한 비난'이 될 것이다.

2007년 주변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면담을 수락하고 이어 당신이 내밀은 그 손을 뿌리치지 않고 잡아준 장준하 선생의 부인 김희숙 여사의 따스한 체온에 대해 '신뢰의 정치인'을 자처하는 박근혜 후보가 배신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진심으로 기대한다. 

장준하 선생의 사망 의혹은 이제 원점에서부터 다시 조사해야 한다.

로그인이 필요없는 추천 !

이 기사가 많이 알려져서 많은 분들께서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습니다

memory+


728x90
반응형
LIST

댓글

💲 추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