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축제 '락샤 반단'... 남매 간 보호의 약속에 숨겨진 가부장제와 상업성
- 손목을 내밀어 보거라! 그리고 선물을 주려무나... 인도의 축제 락샤 반단(Raksha Bandhan)
오늘부터 내일까지는 인도의 축제 중 하나인 락샤 반단(Raksha Bandhan/रक्षा बन्धन)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인도의 다수 종교인 힌두교의 축제입니다. 한국어로 생각하면 남매의 날 내지는 오누이의 날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이날은 여자 형제(sister)가 남자 형제(brother)에게 라키(Rakhi)라고 부르는 팔찌를 손목에 걸어주며 우애를 표현하는데요. 그래서 락샤 반단을 줄여서 그냥 라키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락샤 반단을 축하하는 구호가 'Happy Rakhi'이거든요.
메인은 오누이지만, 반드시 오누이일 필요는 없습니다. 사촌간에도 가능하구요. 의남매처럼 친한 사이 등에서도 가능합니다. 아버지와 딸 사이에도 할 수 있고, 뭐 발렌타인 데이날 연인한테만 초콜릿 주는 거 아닌 것과 같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단, 인도 친구들의 설명에 따르면, 라키를 매어준 사이에는 결혼을 할 수 없다는 속설이 있다며, 연인 간에는 하지 않는 것이 일종의 금기처럼 받아들여진다고 합니다.
모든 여성들은 락샤 반단날 금식을 합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좋은 옷을 입고 음식을 준비합니다. 라키를 올린 접시(Thali)를 스위트, 쿰쿠마(Kumjuma), 악샤트(Akshat) 등으로 장식하고, 남자 형제에게 찾아가죠. 그리고 이마에 틸락(Tilak)을 발라주고 오른쪽 손목에 라키를 묶어줍니다. 그리고 스위트도 입에 넣어주죠.
모든 것은 give and take... 공짜는 없습니다. 손목에 라키를 받은 남자 형제는 여자 형제에게 라키에 대한 보답으로 선물과 함께 힘든 일이 있을 때 돕고,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의미를 되새기기에 선물의 가치가 무에 중요하겠냐마는... 아무래도 라키의 가격보단 보답으로 갈 선물이 더 비싼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되로 받고 말로 주는 상황이 종종 연출되는....ㅋㅋㅋㅋ 뭐랄까요. 발렌타인 데이에 초콜릿 받고 화이트 데이에 사탕처럼 달콤한 지갑을 선물하는 듯한??ㅋㅋㅋ 아, 때로는 그냥 쿨하게 현금이 오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허허.
락샤 반단은 그레고리력으로 8월에 해당하는 힌두력 '판지카(Panjika)'의 다섯 번째 달인 슈라바나(Shraavana)의 마지막 날입(Shravan Purnima)니다. 그래서 올해 그레고리력 기준으로는 8월 30일부터 8월 31일까지가 해당되는데요. 산스크리트어로 푸르니마는 보름달을, 푸르니마 띠티(Purnima Tithi)은 보름날을 의미합니다. 다섯 번째 달 슈라바나의 보름날은 8월 30일 오전 10시 58분에 시작해 8월 31일 오전 7시 5분에 끝나죠.
그런데 인도에는 달의 황도대에 따른 바드라 까알(Bhadra Kaal)라고 하여 불길하고 상서롭지 못한 시간이 있어 결혼을 비롯해 각종 의식 등을 하지 않죠. 락샤 반단 바드라는 오전 11시에 시작해 오후 9시 1분에 종료됩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라키를 묶지 않아요. 만약 이 때 라키를 묶으면 바드라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형제에게 불행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죠. 또한 밤에도 라키를 묶거나 축하 행사를 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상서로운 시간을 뜻하는 슈브 무후랏(Shubh Muhurat)은 31일 오전 5시 58분 ~ 오전 7시 34분, 오후 12시 21분 ~ 오후 3시 32분, 오후 5시 8분 ~ 8시 8분입니다. 이 시간이 라키를 묶어주는 가장 좋은 시간이라고 합니다.
- '보호'의 약속... 락샤 반단의 의미
어찌되었든 락샤 반단은 산스크리트어로, 락샤(Raksha)는 보호라는 뜻이고, 반단(Bandhan)은 묶는다는 뜻입니다. 손목에 묶어주는 라키(Rakhi) 또한 산스크리트어 락시카(raksika, 보호 및 부적을 뜻하는 rakṣ + 접미사 ika)에서 파생된 단어. 결국 그 의미는 단어가 가진 뜻 그대로 보호(care), 의무(obligation) 또는 보살핌의 유대(the bond of protection)입니다. 여자 형제가 남자 형제의 손목에 라키를 묶어주는 것의 의미는 부적과 같이 불운에 대한 방어이며, 또한 존경과 의존의 의미 또한 담고 있습니다.
락샤 반단은 인도의 결혼 풍습에서 그 현실 속 유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인도, 특히 북인도 지역에서는 딸이 혼인 후 남편의 집, 즉 시댁으로 떠난 후로는 신부의 부모들이 신부를 방문하지 않고, 오직 딸이 집안의 대소사가 있을 때 친정으로 방문했습니다. 이 경우 여자의 집에서 부모와 함께 혹은 인근에 거주 중인 여자의 남자 형제들은 여자가 살고 있는 사돈댁을 자신의 여자 형제를 에스코트해왔죠. 뿐만 아니라 여자의 시댁과 친정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비롯해 다양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특히 여자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될 경우, 여자의 가정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이혼, 남편의 사망 등)에 해당 여자가 의지할 수 있는 보호자로 인식되었기 때문이죠.
- 인드라 - 사치 - 비슈누, 크리슈나 - 드라우파디, 야마 - 야무나... 힌두교 전설 속의 락샤 반단
힌두교의 설화 속에서 락샤 반단의 기원을 살펴볼까요. 힌두교의 경전 'Bhavishya Puran'에서 인드라(Indra)의 아내 사치(Sachi)는 발리(Vali)왕과의 전쟁에 나가게 되자 걱정이 되어 신들의 스승 브리하스파티를 찾아가 도움을 청합니다. 그러자 브리하스파티는 힌두력에서 가장 상서로운 달인 다섯 번째 달 슈라바나(Shravana)의 보름날(푸르니마, Purnima)에 인드라의 손에 끈을 묶으면 이것이 모든 해로움으로부터 남편을 보호할 것이라고 일러줬고, 사치는 인드라의 손목에 끈을 묶었다고 하죠.
또 다른 이야기는 인드라가 발리 왕에게 밀리며 고전을 면치 못하자 사치가 비슈누에게 기도를 했고, 비슈누는 사치에게 신성한 실을 주며 이를 인드라의 손목에 묶게 합니다. 그리고 이 실은 비슈누의 축복이 서려 모든 악으로부터 인드라를 보호했고, 끝내 인드라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고 하죠. 이 두가지 이야기를 살펴보면, 라키가 인도인들에게 액운을 막아주는 부적의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인도의 여성들이 전쟁에 나가는 남편의 손목에 실을 묶는 것으로 그들의 안전을 기원했다고 합니다.
이번에 소개할 설화는 크리슈나(Krishna)와 드라우파디(Draupadi)에 관한 것인데요. 한 번은 크리슈나가 손가락에 끼우는 원반 형태의 무기인 수다르샨 차크라(Sudharshan Chakra)를 사용하다 손가락을 다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판다바 다섯 형제의 아내인 드라우파디가 자신의 사리를 찢어 손가락에 묶어 지혈을 해줬죠. 이에 고마움을 느낀 크리슈나는 드라우파디를 보호해주겠다고 맹세하게 됩니다. 이후 드라우파디가 남편의 도박 실패로 팔리게 된 것은 물론 사람들 앞에서 옷이 강제로 벗어야 할 위기에 처했을 때 크리슈나가 나타나 그녀를 구해주며 약속을 지키게 되죠. 동일한 내용으로 크리슈나가 수다르샨 차크라를 사용한 것 대신 마카르 산크란티 축제 때 연을 날리다가 손가락을 다치게 된 것이라는 버전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설화는 야마(Yama)와 그의 여동생 야무나(Yamuna)에 대한 이야기. 죽음의 신이었던 야마와 야무나 남매는 12년동안이나 만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고, 이로인해 야무나는 깊은 슬픔에 잠긴 상태였습니다. 이 때 갠지스강(인도에서는 강가 강이라고 부릅니다)의 여신 강가는 야마에게 야무나를 찾아가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라고 조언했고, 야마는 야무나를 찾아가게 되죠. 오빠가 왔다는 소식을 들은 야무나는 너무 기뻐 정성껏 요리를 준비해 오빠를 대접한 뒤 야마의 손목에 라키를 묶었습니다. 이에 감격한 야마는 야무나에게 소원을 물었지만, 야무나는 그저 야마가 자신을 방문해주는 것 뿐이었습니다. 이에 더욱 감격한 야마는 야무나가 영원히 살 수 있도록 불멸을 부여했고, 또한 야무나가 묶은 라키를 받고 야무나를 보호하겠다고 맹세하는 사람은 누구나 죽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고 합니다.
- 락샤 반단의 에너지, 가부장제 / 상업성
락샤 반단이 한국의 한식이나 단오처럼 힘을 잃지 않고 인도 최대 축제 중 하나로 자리잡은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여전히 대가족 위주인 가족 제도. 예전보다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인도는 가부장적인 분위기가 가족 제도 안에 남아 있기 때문이기 때문에, 결혼을 한 여성의 소속이 남편 집안 쪽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남아 있고, 남자 형제의 역할은 여전히 건재한거죠. 또한 은연 중에 남자 형제가 마치 아버지와 같은 나의 보호자라는 인식을 어렸을 때부터 무의식 중에 인식시키는 계기라고 생각되어 페미니즘(한국형 꼴펨 말고...)을 지지하는 저로서는 그리 긍정적인 의미의 축제는 아닙니다.
물론 인도의 여성들이 한국 꼴펨들처럼 유불리를 따져가며 태세를 전환하는 타입은 아니기 때문에 얄미운 느낌은 아니지만, 조금 더 자립적인 자세를 견지하면 인도에서의 여권 신장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가끔 들 때가 있긴 하지만요. 이 부분 역시 인도 여성들이 그러한 젠더 역할에 불만이 없다면야 제가 왈가왈부할 부분은 아닙니다. 하지만 락샤 반단이 가진 의미에는 분명 가부장적인 전통 및 의미가 녹아있다는 점만은 분명한 사실.
상업적 활용도가 높다는 점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주요 이유 중 하나입니다. 단순히 스위트(인도식 한과 내지는 화과자)만 팔고 말 축제가 아니라 여성에게는 팔찌를 팔 수 있고 남성에게는 답례인 선물을 팔 수 있는 절호의 찬스죠. 인터넷에서 '락샤 반단 선물(Raksha Bandhan gift)를 검색해보면 인도의 유명 초콜릿 제품이 라키(락샤 반단을 줄여 흔히들 그냥 '라키'라고 부릅니다) 스페셜로 출시한 기프트팩부터 시작해 수십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쥬얼리 제품까지 천차만별의 라키 선물 추천 품목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냥 넘어갈래야 넘어갈 수 없는 축제죠.
또한 라키는 힌두교 자체에게도 좋은 수입원이 되어 줍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 이날 직접 마주하고 라키를 손목에 묶어주지 못하는 대신 마음으로라도 남자 형제를 위해 기도하고자 만디르(Mandir)라고 부르는 힌두교 사원을 방문한 이들에게 일반적인 라키보다 영험하다(?)며 이른바 'made by mandir'표 라키를 판매하기 때문이죠. 뭐 한국불교에서 기와불사하는 것이나, 명동성당 성물방에서 성물 파는 거나, 일본의 신사에서 봉납용으로 쓸 에마를 판매하는 것과 비슷한 개념이긴 합니다.
그 외에도 락샤 반단에 가족애를 투영시킨 영화들도 한 몫 했죠. '로마의 휴일' 속 오드리 햅번이 로마의 스페인 계단 앞에서 젤라또를 먹어 이것이 마치 로마의 필수 관광 코스가 된 것처럼... 우익 힌두교 세력들의 홍보 역시 이유 중 하나입니다. 실제로 인도 남부에서 락샤 반단이 대중적인 축제로 자리잡은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한 2~30년?
아, 가족 간이 아닌 의남매처럼 친한 남녀 사이에도 라키를 묶어주는 경우가 있다고 언급했었죠. 베프끼리도 할 수 있고 다양한 경우가 있는데, 그야말로 그 범위가 '자발적 친족'으로까지 확장되는 거죠. 그런데 때로는 직장 등 사회에서 상급자인 남성에게 상징적인 보호와 서포트를 요청하는 경우도 있고, 간혹 상급자가 금전이나 대가를 요구하는 사례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렇듯 락샤 반단은 아기자기하고 가족 간의 우애를 돈독히 하는 축제임에는 분명하지만, 한편으로 살펴보면 여성을 그저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는 가부장적인 면모와, 상업적인 부분도 존재한다는 사실.
자, 이렇게 오늘은 인도의 큰 축제 중 하나인 락샤 반단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앞으로 인도의 문화에 대해서 소개하는 시간을 좀 자주 가져볼까 합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