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맹이 없었던 2023 G20 뉴델리 정상회의, 인도 현지인들이 바라보는 G20은?
요란스레 G20 준비한 인도
2023 G20 뉴델리 정상회의(이하 G20 정상회의)의 개최국인 인도는 올해 중국을 제치고 세계 최다 인구 국가가 되었고, 정상회의 개최 직전인 8월 23일 , 인류 역사상 최초로 찬드라얀 3호를 달 남극에 착륙시키는 데 성공하면서 포스트 아메리카는 중국이 아니라 인도가 될 것이란 기대감을 높이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지방선거에서 패배한 이후 힌두 민족주의를 통한 세력결집을 위해 국호를 인디아(India)에서 바라트(Bharat)로 변경하겠다는 승부수까지 던지면서 내년에 있을 총선을 준비하는 모디 총리와 인도 인민당(BJP)에게 이번 G20 정상회의는 무척이나 중요한 국제 이벤트였습니다.
인도 정부는 이번 G20 정상회의를 위해 일주일 전 뉴델리 지역 곳곳의 교통을 통제하는 리허설을 벌이는가 하면 학교들은 G20 정상회의 개최 이틀 전인 목요일부터 온라인으로 수업을 진행하게 했으며, 대부분의 회사들은 재택 근무 내지는 휴무를 하도록 했죠. 또한 슬럼가를 철거하고, 인도 거리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개들에 대한 격리 조치까지 해가면서 국가 이미지 재고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번 G20 정상회의는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이번이 4번째 G20 참석인데, 그동안 우리는 그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다"면서 "우리가 직면한 문제에 대해 공통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지만, 해결하지 못했다. 위험한 난간을 따라 걸어가면서 우리는 말로만 양심을 진정시키는 것 같다"고 이번 G20 정상회의를 부정적으로 평가했죠.
우선 이번 G20 정상회의에는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이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푸틴 대통령은 국제형사재판소(ICC)가 전쟁범죄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한 이후 외국 방문을 자제 중인 상태이며, 시진핑 주석은 의장국인 인도와의 영토 표기 관련 분쟁 및 일본과의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로 마찰을 빚고 있는 상태에서 G20에 참석해 얻을 이익이 크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죠.
최대 안건 우크라이나 전쟁, 작년보다 후퇴한 공동선언문 수위
이번 G20 정상회의에서 가장 큰 안건은 바로 우크라이나 전쟁이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된 부분을 공동선언에 어떻게 반영할지가 G20 셰르파(정상회의 준비 책임자)들의 고민이었죠.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G20 셰르파들은 200여 시간동안 논스톱 협상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한 300여 차례의 양자회담이 열렸고, 15개의 가안이 테이블에 올라왔죠.
우크라이나 전쟁을 두고 미국 및 서방 회원국들은 지난해 인도네시아에서 열렸던 2022 G20 발리 정상회의 때 합의된 것보다 더욱 강력한 표현을 사용해 러시아의 책임을 묻는 것을 비롯해 전쟁을 강력히 비판하는 내용이 공동선언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고, 러시아 및 중국은 G20이 전쟁을 논의하는 포럼이 아니라고 대응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동맹 중립 외교노선의 전통을 고수하며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중립을 지켜온 인도가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서 전쟁 관련 표현을 완화하는 방식으로 타협이 이루어졌죠.
결국 11시간의 치열한 논의 끝에 합의문이 극적으로 도출되었습니다.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9일 오후 뉴델리 바라트 만다팜 국제컨벤션센터에서 '하나의 가족' 주제로 열린 두 번째 세션에서 짧은 TV 성명을 통해 "모든 회원국이 열심히 일한 덕분에 우리는 G20 정상회의 선언에 대한 합의에 이르렀다"면서 힌디어로 공동선언 채택을 참가자들에게 제안한 후 합의문이 채택되었음을 선언했죠. 이렇게 'G20 뉴델리 리더 선언'이 탄생했습니다.
이로써 모디 총리는 글로벌 리더십을 자국 내에 홍보할 수 있게 됐지, 사실 'G20 뉴델리 리더 선언'은 속 빈 강정에 불과했습니다. 34쪽의 이 공동선언에는 전쟁 관련 내용은 상대적으로 적게 들어가고, 기후변화와 재생에너지, 여성 주도 발전, 디지털 인프라 등 100여 가지 이슈들이 포함됐습니다. '연속적인 위기'가 장기적 경제 성장에 도전을 야기했다고 경고하면서 세계 경제를 지지하기 위한 거시경제 정책 조율을 촉구했고, 경제 전망의 불확실성이 높게 유지되고 있고 위험의 균형이 아래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표현도 들어갔죠. 핵무기 사용이나 사용 위협은 인정할 수 없다는 내용도 포함됐으며, 이와 함께 G20 정상들이 세계무역기구 WTO 개혁도 촉구한다는 언급도 포함되었습니다. 하지만 회원국들이 얼마나 진정성 있게 실천하느냐가 결국 중요하죠.
우크라이나 전쟁 관련해서는, '유엔 헌장을 준수하고 영토 침략을 위한 무력 사용이나 위협은 자제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유엔 헌장에 따른 결의안을 이용해 전쟁에 대한 원론적인 입장을 담아낸 것을 비롯해 '러시아 연방의 우크라이나 침략(Aggression by the Russian Federation against Ukraine)'이란 표현이 들어갔었던 작년 발리 G20의 공동선언과는 달리, '우크라이나 내 전쟁(War in Ukraine)으로 인한 인간의 고통과 국제 식량, 에너지 안보, 공급망, 금융 안정성 등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강조한다'는 내용이 들어갔습니다. 심지어는 그 뒤에 '이 상황에 대한 다른 견해와 평가가 있다'는 내용이 추가됐죠. 작년과는 다르게 '침략(aggression)'이란 단어도 빠지고, 러시아도 빠졌습니다. '우크라이나를 향한 전쟁(the war against Ukraine)'도 아니고 '우크라이나 내 전쟁(the war in Ukraine)'으로 바뀌었죠.
이러한 공동선언문 내용은 '서방 외교의 실패'라는 평가가 주를 이룹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러시아를 비난하고 우크라를 지지하도록 설득한 서방 국가들에 타격을 입혔다'고 진단했고, BBC 또한 '전쟁을 어떻게 규정할지 놓고 글로벌 사우스(남반구 신흥국과 개발도상국)와의 논쟁에서 지고 있다는 신호'라고 평가했습니다. 일부에서는 작년 7월 체결한 흑해 곡물협정의 완전한 이행을 촉구하는 내용이 포함되는 등 서방과 러시아 간 갈등의 골을 메우며 타협한 점을 들어 명분 대신 실리를 얻었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만, 글쎄요. 결국 서로 외교적 승리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된, 이도저도 아닌 어중이떠중이라...
역시나 우크라이나 측은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올레그 니콜렌코 우크라 외무부 대변인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G20은 자랑스러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크라가 이번 회의에 참석했다면 참석자들이 상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죠. 이에 반해 러시아 측은 "매우 어려운 협상의 결과로 균형 잡힌 내용이 담겼다"며 "브릭스 및 파트너들의 집단적 입장이 결실을 봤다"고 환영의 뜻을 표했습니다.
한편 공동선언에는 2026년 미국이 G20의 의장국을 맡는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는데, 중국은 비공개 외교회담 중 이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명했고, 이의 제기가 있었음을 기록으로 남겨달라고 요구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는 또 한 차례 있었는데요. 아시아(동남·중앙·서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을 육해공으로 잇는 인프라·무역·금융·문화 교류의 경제벨트 사업인 중국의 일대일로에 맞서 인도와 중동, 유럽의 철도·항구 등 인프라를 연결하는 구상이 수면 위로 올라왔습니다. 미국, 인도,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와 유럽연합(EU)이 회의 첫날 관련 내용에 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고, 이들은 앞으로 60일 내에 실무그룹을 구성해 재원마련 등 구체적인 계획 수립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혹시라도 관심있으실 분들을 위해서 G20 뉴델리 지도자 선언(G20 New Delhi Leaders' Declaration) 파일을 첨부합니다.
AU의 G20 합류, 떠오르는 글로벌 사우스
이번 G20 정상회의에서 주목받은 이슈는 바로 아프리카 국가 연합체인 아프리카연합(AU)이 주요 G20의 회원국이 된 것. 유럽연합(EU)에 이어 단체 회원국 가입은 두 번째입니다. 이는 그만큼 서방 국가들과 중·러 간 경쟁 속에서 글로벌 사우스(남반구 신흥국과 개발도상국)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것을 의미하죠. AU는 7년간 G20 가입을 시도해온 상태였습니다.
AU의 G20 가입에 대해 세계 각국은 이례적으로 목소리를 모아 찬성 의사를 밝힌 바 있습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물론 시진핑 중국 주석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 역시 아프리카와의 정상회의에서 AU의 G20 가입을 지지한다고 밝혔죠. AU의 G20 가입 이후 샤를 미셀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트위터에 "EU는 이를 처음부터 변함없이 지지해왔다"며 "기쁘다"고 언급했습니다.
G20 정상회의 개회 연설에서 "AU에 영구적인 정회원 지위를 부여하는 것에 대해 회원국들이 찬성했다"고 말한 모디 총리는 AU 의장인 아잘리 아수마니 코로모 대통령을 회의장 테이블로 초청해 그와 포옹을 했습니다. 이번 AU의 가입으로 인도가 글로벌 사우스의 맹주 입지를 굳혔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한편 윤석열 대통령은 '하나의 미래' 주제로 열린 세 번째 세션에서 우크라이나에 2024냔 3억불(한화 약 4,000억 원), 그리고 2025년 이후 중장기적으로 20억불(한화 약 2조6,700억 원)을 지원하는 '우크라이나 지원 패키지'를 발표했습니다. 이는 지난 7월 윤석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방문해 발표했던 '우크라이나 평화연대 이니셔티브'의 구체적 실행 방안인데요. 이 자리에서 윤 대통령은 "2차 세계대전 후 국제사회는 무력 사용에 대한 금지를 확고한 법 원칙으로 정립해왔다"며 "이 원칙을 수호하기 위해 뭣보다도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평화 회복이 조속히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G20 정상들은 10일 마하트마 간디의 화장터에 조성된 추모공원인 뉴델리 라즈 가트(Raj Ghat)를 방문해 헌화를 했고, 모디 총리는 마하트마 간디의 시대를 초월한 이상이 조화롭고 포용적이며 번영하는 글로벌 미래를 위한 집단적 비전을 이끈다는 점을 강조했는데요. 글쎄요. 마하트마 간디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꼭 그런 것 만은 아니어서... 크게 와닿지는 않는 부분입니다.
한-인도 정상회담
이후 윤석열 대통령은 모디 총리와 한-인도 정상회담을 가졌습니다. 특히 올해는 한국과 인도가 수교 50주년을 맞이한 해이기도 하죠. 양 정상은 올해 한-인도 수교 50주년을 맞아 인도-태평양 지역 핵심 파트너로서 양국 간 전략적 소통과 협력을 강화해 가자는데 의견을 같이 했습니다. 또한 올해 양 관세당국 간 '원산지 증명서 전자교환 시스템(EODES)'이 개통되면 양국 기업들의 통관 편의를 개선하고, 양국 간 교역과 투자 촉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했죠.
두 정상은 한국과 인도가 체결한 한-인도 CEPA(포괄적경제파트너쉽협정)에 대한 개선협상을 추진해 양국의 경제 파트너십을 강화하는 방안을 모색하기로 합의했으며, 양국 간 방산협력의 상징인 K-9 자주포(인도명 바지라) 2차 사업이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지속 협력해 나가는 것을 비롯해 국방·방산 분야 협력을 발전시켜 나가기로 했습니다. IT, 전자 등 신산업 분야를 중심으로 공급망 협력의 폭 역시 더욱 넓혀 나가기로 했구요. 이 자리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우리 기업들이 인도 내에서 투자를 지속 확대해 나갈 수 있도록 통관환경 조성 및 수입제한 조치와 관련한 모디 총리의 각별한 관심을 요청했다고 알려졌습니다.
현지에서의 G20, 인도인들이 바라보는 G20은?
자, 이렇게 2023 G20 뉴델리 정상회의는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사실 인도는 작년 12월 G20 정상회의 의장국이 된 이후 G20 재무장관회의를 비롯해 장관급 회의를 14차례나 진행했지만 단 한 차례도 공동선언문을 도출해내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이번 'G20 뉴델리 리더 선언'은 인도가 의장국으로서 체면을 살리기 위해 우크라이나가 귀신과 전쟁을 하는 듯한 기괴한 형태로 도출해 낸 공동선언문이죠.
하지만 인도 국민들은 이러한 세부적인 내용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새입니다. 그저 모디 총리가 의장으로써, 인도가 G20의 의장국으로서 이번 정상회의를 이끌었다는 것에 흡족해 할 뿐. 메트로며 도로 곳곳에 G20을 위한 꽃이며 새롭게 칠한 보도블럭 페인팅에 국격의 상승을 느껴하는 듯 합니다. 또한 그나마 결과물에 관심이 있는 인도인들은 다른 포인트보다 인도가 글로벌 사우스 국가의 리더 역할을 하며, 이들과 서방 간의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을 높이 평가하고 있죠. 그래서 인도 언론들은 아프리카 연합의 G20 가입을 열심히 띄우고 있습니다.
이번 G20 정상회의를 통한 모디 총리와 여당인 인도 인민당의 목적은 명확합니다. 관례에 따라 순차적으로 의장국을 맡게 된 것이라는 점을 최대한 가리고 '글로벌 리더'인 모디 총리의 뛰어난 리더십에 의해 G20이 진행되는 듯한 이미지를 심어주는 것이죠. 이번 G20 정상회담 로고를 살펴보면, 인도 인민당의 상징인 연꽃이 지구를 받치고 있는 형상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이쯤되면 세뇌에 가까운 듯한, 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22년 12월부터 2023년 4월까지 인도 중앙정부가 단지 '인도가 G20 의장직을 맡게 되었다'는 것을 홍보하기 위해 사용한 돈만 81억5,000만 원입니다. 그 이후에는 과연 얼마나 더 지출을 했을까요? 이제 G20은 내년 있을 인도 총선에서 모디 총리와 인도 인민당의 업적으로 활용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