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밟고 있는 땅/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대구 어린이 황산테러사건 故 김태완 군의 어머니가 쓴 '49일간의 아름다운 시간'

자발적한량 2014.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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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어린이 황산테러사건의 피해자인 故 김태완 군의 어머니 박정숙 씨가 2000년 11월 24일부터 2001년 2월 15일까지 19차례에 걸쳐 인터넷에 쓴 '49일간의 아름다운 시간'이란 제목의 병상일지입니다. 제가 중학교 1학년이었을 때네요.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서 자식을 잃은 어미의 처절함이 심장을 쥐어짜듯 아프게 했습니다. 


1999년 5월 20일 발생한 대구 어린이 황산테러사건의 피해자인 故 김태완군은 생존확률 5%의 극한 상황 속에서 강한 정신력으로 49일을 버티다 7월 7일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15년이 되는 2014년 7월 7일 사건의 공소시효가 끝나면서 영구미제사건으로 남게 됩니다. 공소시효 만료를 3일 앞둔 어제 김군의 부모가 용의자에 대해 제출한 고소장에 대해 '혐의없음' 결정을 내렸고, 곧바로 유가족들이 법원에 재정신청을 내면서 공소시효가 정지된 상황입니다. 시한은 재정신청 결과가 나올 때까지. 이와는 별도로 경찰은 이 사건에 대해 지난 2일 기소중지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고 합니다. 


15년이라는 세월을 피눈물로 보내야 했을 가족들에게 무어라 위로를 해야 할지 감히 짐작이 되지도 않습니다만, 이 글을 보다 많은 분들이 볼 수 있게 알리는 것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하여 오늘의 포스팅을 합니다. 저작권 등과 같은 문제가 있다면 삭제토록 하겠습니다. 우선 태완군의 어머니께서 지난 2013년 10월 25일 다음 아고라 게시판에 쓴 글을 먼저 올립니다. 인터넷에 이러한 글을 올리며 수없이 눈물 흘렸을 모습을 생각하니 너무나 마음이 아픕니다. 부디 이 분의 아픔에 조금이라도 동참하는 심정으로 잠시만 시간을 내주셔서 한번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한가지만 더, 박정숙 씨께서 다음 이슈 청원방에 글을 올리셨습니다. 2013년 12월 3일 이슈청원 등을 통해 많은 이들이 힘을 모아준 덕분에 재수사가 시작됐었다고 하네요. 태완 군이 당한 끔찍한 일의 진실을 가리고자 하는 서명운동입니다. 링크를 남겨둡니다.


관련링크 

공소시효D-10 7월7일...대구 황산테러 태완이 진술분석의 진실 이슈 청원 서명하기



제목: 황산테러 태완엄마입니다.


저는 지난 1999년5월20일 6살어린나이에 황산테러로 숨진 태완이엄마입니다. 세월이 지나면 잊혀진다고들 하지만 저희 가족은 14년간 고통스럽게 세상을 떠난 아이의 생각으로 가슴에 맺힌 한을 풀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고가 나고 태완이가 투병중에 말한 여러가지 의문들과 장애친구 인수의 행동... 그외 풀리지 않은 의혹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어느것 하나 속쉬원히 해소된게 없는 상황까지 이르럿고, 그 무섭고 소름끼치는 일이 단순한 ㅡ상해치사ㅡ로 되어있으며 더이상 수사가 진행되고 있지 않다는 점에 또한번 피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황산으로 인해 화상을 입어 전신을 붕대로 칭칭동여감은 상태로 49일을 버티면서 또박또박 사고 당시의 일을 말한 태완이의 진실을 귀기울여 한번만이라도 생각해 주십시요. 손끝만 데여도 온몸에 전율이는데 전신에 그 심한상처를 입고 49일을 의연하게버터준 태완이를 위해서 바쁜 업무에 힘드시다는건 알지만 부디 간절히 바라건데 이 사건을 다시금 재수사 해주실것을 부탁드립니다 


서면으로도 검찰과검찰에 진정서를 제출할려고 합니다. 어렵지 않으시면 제 메일로 이름, 연락처, 주소를 보네주시면 같이 제출하고 싶습니다. 서명에 동참해주신 분들께 고개숙여 감사함을 표하며...메일주소입니다. hemiz0525@hanmail.net



49일간의 아름다운 시간

-대구 어린이 황산테러사건 피해자 故 김태환 군의 어머니 박정숙 씨가 쓴 병상일지-



2000년 11월24일


눈을 감는다. 그 애의 모습이 눈에 박힌다. 너무나 의연했던 내 아이 태완이…. 아이 흔적이 조금씩 사라져간다. 5백원짜리 조립품으로 열 손가락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여 로봇을 만들곤 씨~익 웃어 보이던 아이, 길을 걸을 때도 잠을 잘 때도 항상 묻어나던 그 아이의 내음새…. 어제의 그 길은 그냥 그 자리에 있는데, 그 아이만 없다.


태완이의 해맑은 꿈을 훔쳐간 그는 이 세상에서 아무렇지 않은 웃음을 흘리며 살아가고 있는데. 이 세상엔 진실로 죄에 대한 하늘의 징벌은 없는 건가? 죄에 대한 벌은 어떤 형식으로든 받는다고 믿어왔었다.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닌가보다.


억울함보다는 어린 내 아이, 그 영혼에 대한 죄스러움이 밀려온다. 나쁜 사람 잡아 꼭 사과하게 해주겠다던 마지막 그 약속을 지켜주지 못한 무능력한 부모의 마음에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길을 걸으며 언제나 웃음을 띤다. 하늘 저편에서 태완이가 엄마를 보고 있을 것만 같아 우울한 얼굴을 할 수가 없다. 그 애는 웃고 있는데 엄마인 나는 바보처럼 울고 있다면 얼마나 외로울까. 혼자 있는 것만도 두려울 텐데.


마지막 죽음을 향해 가던 태완이는 너무나 고요했다. 남은 가족의 슬픔을 가벼이 덜어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 깜깜한 어둠 속에서 아빠의 손을 꼭 잡아 자식을 눈앞에서 보내야 하는 우리의 두려움을 없애주었다.


아빠가 말했었다. “태완아, 아빠가 나쁜 사람 잡아서 꼭 혼내줄게.”


엄마가 말했었다. “태완아 나쁜 그 사람, 꼭 태완이한테 사과하게 해줄게.”


태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힘겨운 숨쉬기가 끝나려 할 때, 의사들의 심장 소생술이 몇 차례 이어졌다. 가여운 그 조그만 가슴이 사정없이 짓눌렸다.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아이의 몸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아이의 얼굴과 몸은 점점 붉은빛으로 물들어간다. 혈액이 응고되지 않아 마치 분수처럼 솟구쳤다. 심장을 누를 때마다 기다린 듯 피는 아이를 물들게 하고…. 그 붉은빛은 무서우리만큼 고왔다.


아빠는 힘겹게 의사분의 손을 당기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더 이상의 고통은 주고 싶지 않았다. 아빠의 두 눈엔 빗줄기 같은 굵은 눈물이 소리 없이 뚝뚝 흐른다.


엄마는 태완이의 귓가에 작게, 아주 작게 속삭인다.


“태완아, 마음 편히 잘가. 엄마도, 아빠도, 형아도 조금 있다 니가 간 곳으로 갈게.”


“….”


“태완아, 그곳은 마음의 눈으로 보면 된단다. 무서워하지 마, 무서워하지 마. 우리 태완이 먼저 가 있어. 나중에 다시 만나자. 잘 가, 잘 가, 잘 가….”


짧은 작별 인사를 나눴다. 아이는 그 말을 마치자 기다린 듯 고르게 고르게 숨을 거두어갔다. 살아 있음이 그 아이에게도 고통일 것 같았던 엄마 아빠의 마음을 그 애는 알까?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기를 간절히 기도한 마음을 그 애는 알까?


마지막 가는 길. 태완이는 그렇게 사랑하는 아빠, 엄마, 형아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채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49일을 그렇게 있다 홀연히 떠나갔다. 누구의 잘못이든 그 아이가 견디기엔 너무나 힘겨운 고통이었다.


세월이 가면 모두들 잊혀지겠지. 그런 아이가 있었는지, 그렇게 힘겨운 시간을 보냈었는지…. 이 세상 다하는 그날 아이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할까? 태완인 그냥 잊혀진 아이가 되고 마는 걸까? 억울한 죽음만을 간직한 채.



2000년 11월27일


5월20일 아침. 그날 일은 떠올리기조차 두렵다. 가슴에 쏴아아~ 찬바람이 밀려온다.


엄마는 잠자리에 있는 아이를 깨웠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학습지 공부를 보내기 위해. 아이는 새벽에 퇴근해 잠든 아빠의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멍하니 앉아있다. 뭘 생각한 걸까? 밥을 먹지 않겠다고 해 라면을 끓여 엄마랑 나눠 먹었다. 마지막 아침을.


아이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옆에 있던 이모가 “우리 태완이 아니냐”고 한다. “아니야.” 엄마는 자기 아이가 아닐 거라 말한다. 공부방에 거의 다 갔을 시간인데.


또 한 번의 비명이 들렸다. 고통스러운 목소리. 다시 이모가 “저거 태완이 아니가” 한다. 무엇엔가 홀린 듯 뛰쳐나갔다. 웬 아이가 전봇대에 기대 주저앉아 있다.


‘내 아이 아니야, 아니야!’


머리와 눈썹이 그을린 듯 희미하게 이상히 말라붙어 있다. 가스불에 잔털이 타면 저 모습이리라. 들여다봤다. 내 아이 태완인 아닌데, 아침에 곱게 입혀 보낸 하얀 옷 한 벌이 반쯤 없어진 형태로 아이의 몸에 남아 있다. 저 하얀 옷은 우리 태완이 옷이 분명한데….


집에서 나가 엄마 눈에서 벗어난 지 10여분 동안에 벌어진 일이다. 몸서리쳐진다. “태완아!” 하고 부르니 “뜨겁다”고 했다. 누군가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남자를 찾았다. 매일 보이던 사람들이 그날 그 시간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 훼엥한 골목길의 그날 그 느낌….


그날의 해님은 유난히 맑게 빛났지만, 우리 가슴엔 그때부터 영원히 밝아지지 않을 암흑이 드리워졌다.


그렇게 아이는 병원에 옮겨졌다. 약품을 뒤집어썼다고 외쳤다. 응급처치는 물로 씻어내는 거였다. 떨고 서 있는 엄마를 누군가 밖으로 내보낸다. 아이 곁에 못 가게 한다.


병원 응급실 밖 바닥을 손으로 긁으며 엄마는 짐승의 소리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누군가 옆에서 이렇게 내뱉는다. “강한 분이 왜 이러십니까.” 무엇이 강하단 말일까.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엄마는 “내가 엄만데, 엄마가 옆에 있어야 해.” 허우적거리며 아이에게 갔다. 아이는 온몸이 퉁퉁 부어오른 채 엄마 앞에 누워 있다.


엄마가 보고 싶어서일까? 아이의 눈이 반쯤 떠 있다. 그런데 눈동자의 움직임이 없다. “태완아! 태완아!” 목메게 부르니 아이가 고개를 움직인다. 가여운 우리 태완이의 49일간 병원생활은 감지 못한 눈으로 그렇게 시작되었다.



2000년 11월29일


처음 간 병원에선 ‘힘들다’ 했나보다. 언니랑 아이 아빠, 할머니 모두들 더 큰 병원으로 옮기려 한다. 화상병동이 있는 곳이 있단다. ‘화상병동은 왜 필요한가?’ 엄마는 그것조차 알지 못했다.


앰뷸런스에 호흡기를 댄 태완이가 탔다. 엄마는 그 차에 올라 아이를 바라보며 멍했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아이를 잡고 “태완아! 태완아!” 불렀다. 가슴이 방망이질친다. 경북대 병원 가는 길은 너무나 멀게만 느껴졌다.


기도가 막히는 걸 막기 위해 입안에 인공호흡기를 대고 무언가 장치를 하고는 아이를 약을 먹여 재웠다.


아이의 몸은 점점 검게 물든다. 끊임없이 부어오른다. 눈은 여전히 세상을 향해 뜨고 있다. 감지 못하고.


오늘밤이 지나봐야 한단다. ‘고비?’ 이 말이 무슨 말인가?


저녁 10시쯤 아이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정신을 차리라고 옆에서 끊임없이 말을 했다. 아무 생각이 나질 않는다.


한밤에 언니를 앞세워 사고 현장으로 가야 했다. 새벽이 뿌옇게 밀려들 즈음 언니와 물 담은 양동이를 들고 골목을 헤맸다. 그 황산이라는 무서운 약품이 물에 묘한 반응을 보였다. 꺼멓게 있던 그 물질은 물이 닿으면 뿌옇게 변해버린다.


아이가 고통으로 헤맨 그 골목을 기었다. 땅바닥에 있는 이상한 모든 것에 입을 대어봤다. 시큼한 그 맛을 확인하기 위해, 그 범인의 행적을 찾기 위해.


약품이 골목 어귀에서 사라졌다. 아이가 누군가를 봤다는 그 입구에서. 일의 모든 실마리가 되는 곳이다. 미친듯이 온 동네를 뒤졌다. 쓰레기통도 뒤졌다. 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황산의 흔적은. 골목의 그곳 외엔.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2000년 12월1일


중환자실 복도에 기대어 서 있었다. 아빠는 엄마에게 마음 굳게 먹으라고 했다. 둘 다 말을 잊은 듯하다. 아빠는 내내 말이 없다. 온 하루가 그렇게 간다.


아무런 말 없이 멍하게 있던 아이 아빠가 고통에 찬 짐승처럼 울부짖는다. 그리곤 실신을 했다. 언니가 어디서 구했는지 바늘로 아빠의 손가락 끝에서 피를 냈다. “김서방, 정신 바짝 차려야 해” 한다. 아빠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는 어억어억 소리를 낸다.


엄마는 아무런 표정 없이 아빠를 바라만 봤다. 다른 세상의 일 같다고만 생각되었다. 소리 없는 움직임으로 의료진만 중환자실을 드나들었다. 속이 불이 난 것만 같다.


아이의 담당의사만 보이면 뛰어갔다.


“아이는 어때요?” 표정이 없다.


“잘 견디고 있나요?”


“네, 잘 견딥니다.” 애써 웃어 보인다.


“우리 태완이 잘 견디죠?” 왜 쓴웃음이 날까?


하루 두 번의 치료, 두 번의 면회. 치료가 끝나면 면회를 한다. 그 시간을 위해 온 하루를 서 있다. 중환자실 유리문에 귀를 대고, 무엇이든 내 아이의 소리는 들어야겠기에.


아이의 온몸이 까맣다. 얼굴, 가슴, 배, 등, 두 팔, 두 다리, 두 손…. 손끝, 발끝만이 내 아이의 살결이다. 꼼지락거린다.


체내산소율을 알기 위해 발톱 끝에 반창고 같은 걸 붙여두었다. 그게 찝찝한지 다른 쪽 발끝으로 자꾸만 밀어낸다. 그 모습이 눈물나게 귀엽다.


중환자실에선 의식이 없을 거라 했었다. 하지만 아이는 엄마의 목소리에 반응을 보였다. 끄트막에 조금 남은 아이 살결을 뺨에 갖다 대본다. 따스하다. ‘우리 아이 살결인가?’


그 작은 손을 잡고 “태완아, 엄마야” 하고 불러본다. 가늘게 떨리는 손끝으로 엄마 손을 잡으려 한다. 오므리지도 못하는 그 손끝으로. 아이가 “어… 엄마” 하고 부른다. 가늘게 떨리는 여린 목소리. 입안이 굳어 혀끝만 겨우 움직이며 바보 같은 엄마를, 작은 아이를 지켜주지 못한 바보 엄마를 부른다. 가슴이 떨렸다. ‘엄마’라는 그 소리가 그렇게 가슴을 떨리게 하는 소리였는지 예전엔 미처 알지 못했다.


치료가 끝나고 작은 몸을 붕대로 감으니 아이가 몸집이 큰 아이로 변한다. 꺼멓게 부어오른 얼굴이 너무 가여워, 움직이지 않는 두 눈이 너무 가슴 아파 얼굴을 좀 가려달라고 했다. 그러자 아이는 “아빠나 이모가 오면 엄마가 얼굴을 좀 가려주세요” 한다. 그 소리에 아이는 마음이 상했나보다. 아무도 만나지 않는단다. 세상에서 1등으로 좋아하는 아빠도, 2등으로 좋아하는 이모도, 보고 싶은 형아도.


아침 면회가 끝나면 다음 치료가 있는 오후까지 기다려야 한다. “태완아, 엄마 화장실 갔다 올게” 한다. 그 시간이 너무나 길었다.


2∼3일 지나자 아이의 안정을 고려해 중환자실에 계속 머물게 해주었다. 아이의 몸에서 시커먼 변이 밀려나왔다. 놀란 마음에 “저게 뭐예요? 왜 저래요?” 소리쳤다. 아이는 누워서 변을 본 게 창피한지 엄마가 닦아준다니까 거부의 몸짓을 했다. 당황하며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미안. 근데 병원에선 다 이렇게 한대. 딴 사람도 다 누워서 그렇게 해. 엄마가 몰라서 그랬어. 미안해” 하고 달래듯 말을 하니 그제서야 몸을 돌려 제 몸을 닦게 해준다.


나에게 처해진 이 현실을 벗어버리고 싶다. 꿈이길, 꿈이길. 이 아인 누군가, 지금이라도 집에 가면 예쁜 우리 태완이가 웃으며 “어디 갔다 오노” 하며 달려와 안길 것만 같은데.



2000년 12월5일


5월25일, 밤 10시 즈음에 중환자실에서 화상병동 일반 병실로 옮겼다. 최후의 상황을 준비하고 있으란다. 그게 무슨 말인가?


폐가 줄어드는 걸 막기 위해 중환자실에서부터 계속 등과 가슴을 두드려야 했다. 싫다 한다. 달래도 보고 화도 내본다.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인 듯.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기에 그 일에만 매달렸다.


가래가 기도로 넘어가는 걸 막기 위해 흡입기로 계속 뽑아내니 가래와 피가 섞여 나온다. 굳어졌던 입안의 각질도 떨어져나와 병에 핏빛이 가득 찬다.


매시간 소변량을 기록하고, 체온을 재고, 끊임없이 가래를 뽑고, 등과 가슴을 두드리고. 어떻게 견뎠을까, 내 아이.


의사가 “의지가, 정신력이 굉장한 아입니다” 한다.


‘그래, 우리 태완이가 어떤 아이인데, 꼭 이겨낼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우리의 마음과는 달리 의사들은 그 어떤 기대의 말도 주지 않았다. 아이는 인공호흡기를 떼내고 혼자 호흡을 하고 있는데.


5월27일, 담당의사는 최후의 상황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저렇게 있다 어떻게 될지 모른단다. 패혈증이 오면 어떻게 할 수 없노라 한다. 호흡 곤란이 생기면 다시 인공호흡기로 바꿔야 하고 그러면 고통은….


아빠는 그 말에 “끝까지 최선을 다해주세요” 했다. 그 말 외엔 달리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나보다. 엄마는 옆에서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다. 그 ‘고비’라는 말과 ‘준비’라는 말의 의미를 엄마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병실로 돌아오는 발걸음엔 세상의 온 무게가 다 실렸다. 하지만 아이는 맑고 고운 목소리로 엄마와의 대화를 놓지 않고 있었다. 우린 태완이의 의지로 인해 희망을 잃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엄마는 작은 바람도 가졌다.


“우리 태완이 다 나으면 시골 들어가 살자. 쬐그만 절이 있는 시골에서 난 태완이 뒷바라지하며 소박하게 살거야. 태우 상처 안 입게 태우에겐 비밀로 하고 그렇게 그렇게 살거야. 태완인 부처님 잘 아니까 절에서 생활하고 난 그 아이 두 눈이 되어 살거야. 그럼 우리 태완인 영리해서 금방 지리 익히고, 세상의 어려움은 접하지 않아도 되고, 그러다 기회가 되면 안구 기증도 받고, 그러기 위해 우리 장기도 기증하자. 그러면 태완이 순서가 빨리 올지도 모르잖아?”


우린 태완이가 그렇게 견뎌주리라 생각했다.



2000년 12월9일


“엄마, 언제쯤 볼 수 있는데? 너무 깜깜하다.”


아이가 묻는다. 병원에 오고 처음으로 보이지 않는 눈에 대해 꺼낸 말이다.


“으응 태완아, 조금만 있음 다 나아. 그러면 우리 태완이 잘 볼 수 있어.”


“엄마, 그래도 답답하다.”


“태완아, 병원에 오면 전부 이렇게 불 끄고 깜깜하게 해놓고 있단다. 엄마 아빠도 깜깜하게 해놓고 있거든. 눈은 보이지 않아도 마음으로 보면 돼. 생각을 하면 다 볼 수 있단다.”


아이가 그 말뜻을 알아들었을까? 엄마의 아픈 마음을 알았을까? 아이는 말이 없다.


하루 두 번의 치료가 한 번으로 줄었다. 아빠와 엄마는 괴로워하는 아이의 고통을 줄이고 싶었다. 치료를 줄여달라고 부탁했다. 아이도 편안해했다.


6월 아침, 치료가 시작되었다. 아이 눈에 감긴 붕대를 떼는 순간 심장이 일순간에 멈춰버리는 것 같았다. 숨이 턱 막힌다. 붕대와 함께 떨어져나온 건 아이 눈에 있던 ‘각막의 조각’이었다.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던 처참한 모습이 눈앞에 놓여 있다. 우리의 작은 바람은 그렇게 나뭇가지 꺾이듯 꺾어지고 있었다. 그보다 더한 것이 기다린다는 것도 모른 채 엄마는 각막이 떨어져나간 아이의 두 눈을 두려움에 가슴 졸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멍하니 서 있는 엄마를 두고 빠른 손놀림으로 치료를 끝낸 의사들이 조용히 나간다. 아이에게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다. 아빠가 시트를 바꾸고, 병실을 청소하고….


가슴이 아팠다.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왔다. 가슴에 커다란 바위 하나 올려놓고 거기다 망치질해대는 것 같다. 숨이 막히고 앉지도 서지도 아무것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냥 이대로 ‘아이보다 먼저 죽는구나’ 가슴을 움켜쥐고 그 생각만 했다.



2000년 12월12일


아이가 깜깜하다고 한다.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할까. 엄마는 더 이상 꺼낼 말이 없다.


그날 아침의 일, 아이의 기억을 끄집어낸다. 골목에서 본 사람이 있었던가? 혀 짧은 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이가 한 남자를 보았다고 한다. 내 귀가 의심스럽고 가슴이 떨린다. 사고가 난 그 아침 그 시간 그 골목에서… 그 현장, 그곳에서… 그를 보았단다. 아니길 바랐다. 아이의 대답에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응, 응” 대답한다.


모질고 독한 엄마는 아이의 말을 녹음해 나간다. VCR로 녹화도 하고 중요한 부분에선 녹음기도 가져다 댔다. 치료하는 아이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아이의 상처는 두 눈을 앗아가기 위해 고개를 뒤로 젖힌 상태에서 약품을 부은 듯, 머리 뒤로 약품이 흘러내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 담당 과장님은 입안으로 이만큼 약품이 들어갈 수는 없노라 하셨다. 약품이 입에 닿으면 입을 다물게 된다고 하신다. 하지만 아이의 입안은 약품으로 온전히 녹아 있다. 아이는 눈과 입에 집중적으로 약품이 가해진 것 같다. 누군가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약품을 부은 것이다.


왜 눈과 입의 상처가 더 심해야만 했을까? 왜 아이의 눈과 입을….


엄마는 찍고 또 녹음한다. 이 세상에 이보다 더 독한 엄마가 있을까? 세상에 이보다 더한 벌을 받을 수 있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흐른다.


“엄마, 위에서(사고를 당한 곳은 골목 위쪽) 뜨거웠을 때, 억수로 큰 전봇대하고 작은 전봇대 있는 데서….”


그 남자는 언제나 아이의 이야기 속에 있다. 아이는 그가 부었노라고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고나기 직전 그를 보았다 한다. 아이가 본 그는 왜 그곳에 있었을까? 그는 그날 아침 그곳에 간 적이 없다고 한다. 아이는 그날 아침 왜 그곳에서 봤다고 할까? 내 아이가 틀렸을까? 그날의 일을 너무나 상세히 기억하고 얘기하는데….



2000년 12월16일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는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들려주는 자장 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치료에 고통스러워하고 상처에 아파해하면 아이의 귓가에 대고 이 노래를 조용히 부른다. 아이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이내 숨소리가 고르게 되곤 한다.


깨어 있는 시간보다 잠들어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 미동도 없이 잠들어 있는 아일 불러본다. “태완아, 태완아.” 아이가 꼼짝하지 않는다. 혹시나 하는 두려움으로 가볍게 흔드니 아이가 움찔한다. 긴 한숨이 입에서 새어나온다.


매일같이 새로운 음식을 찾는다. 많은 돈도 들지 않는 음식들. 엄마랑 시장갈 때 먹은 만두, 이모가 만들어준 김치부침개, 형아랑 아빠랑 놀러 갈 때 먹은 뼈 있는 고기, 국수, 통닭, 라면, 냉면, 생생우동….


어쩌다 구해오면 아이는 작게 오므려진 입 사이로, 병아리 모이만큼도 못 되는 양에 입맛을 잊은 듯 맛이 없다 한다. 나중에 집에 가서 형아랑 먹는단다. 그날이 언제일까.


아이가 먹고 싶은 건 그 음식일까, 아님 엄마처럼 돌리고 싶은 예전, 그날에 대한 목마른 그리움일까.


갑자기 아이 얼굴이 생각나질 않는다. 아무리 떠올려도 붕대 밑에 감춰진 그 아픈 모습만이 자꾸만 자꾸만…. 아이와 아빠를 두고 미친 듯 집으로 달렸다. 아일 보기 위해. 앨범 속에서 아이 사진을 찾았다. 낯선 아이가 엄말 보고 웃고 있다.


몇 장의 사진을 챙겨 큰애가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에 얼른 집을 나섰다. 큰애 얼굴을 볼 자신이 없다. 뭐라 말해야 하나, 동생에 대해 물으면 대답을 어떻게 하나.



2000년 12월19일


매일 큰애와 통화를 한다.


흐르는 눈물을 삼키고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동생 다 나을 때까지 참고 지내라고 얘길 한다. 울먹이는 목소리는 그 애나 나나 다를 바가 없다. 전화를 끊고 돌아서는데 태완이가 묻는다.


“엄마, 왜 우는데?”


“그냥… 태완이가 아프니까, 엄마가 너무 속상해서 울지.”


“엄마, 울지 마라. 내는 괜찮다.”


아이는 괜찮다고 한다. 혀 짧은 소리로. 우리 형아 보고 싶다고 한다. 엄마가 “데려올까?” 하고 물으니 아이는 대답이 없다. 많이 보고 싶을 거야. 매일 밤 장난치며 놀던 형아인데, 얼마나 보고 싶을까.


아이의 몸이 점점 참혹해져간다. 열이 심하게 오르내리고, 몸 이곳저곳이 쓰리고 아파오나보다. 짜증이 심해져간다. 냉찜질로는 해열이 어려워 해열제를 맞아야 한다. 다른 주사는 링거 관을 통해 하면 되는데, 해열 주사는 엉덩이에 맞아야 한다. 40도가 오르내리는 체온을 내리기 위해 하루에도 두 번씩 해열을 위한 주사를 맞아야 하니.


처음엔 나쁜 아저씨 용서해주라고 하더니 잡아서 혼내주라고 한다. 의젓하고 마음 깊은 아이가 사람에 대한 미움을 갖게 됐나보다. 상처의 고통이 심하게 느껴지나보다. 눈이 쓰리고 따갑다고 운다. 아이가 어떻게 견딜까. 어떻게 견딜까.


“태완아, 울면 눈이 더 따가우니까 울지 마.”


작고 가여운 아이. 우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게 한다. 아이가 흐느낀다. 엄마의 마음도 미어진다.


“태완아, 마음 편히 가져. 그럼 좀 나아진단다.”


바보 같은 엄마는 어른에게나 함직한 말을 아이에게 한다. 아이는 맘 편히 가진다는 게 뭔지나 알까.


아이는 엄마와 함께 있기를 원한다. 주사를 맞을 때나 치료할 때, 혈관이 없어 가슴 한쪽에 구멍을 뚫어 약을 투입하던 관이 빠져 마취도 없이 또 다른 구멍을 내야 할 때도…. 4∼5명이 아이의 사지를 붙들고 바늘로 관을 고정시킨다. 조그만 그 몸에서 얼마나 강한 힘이 나오는지 모두들 진땀을 뺀다. 그 일이 끝나면 아이는 기진맥진해 깊은 잠에 빠져든다. 차라리 그때가 아이에겐 행복한 시간이리라.


자면서도 아빠 엄마의 존재를 확인한다. 작은 손을 꼭 잡고. 두려웠으리라.


엄마가 옆에 있은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걸 그 애는 알까?


“엄마, 그거 아나. 뜨거우니까 옷이 저절로 찢어지더라.”


“태완아, 그거 알겠더나?”


엄마가 철렁 내려앉는 가슴을 안고 묻는다.


“응, 뜨거워서 옷이 조금 찢어졌는데, 집으로 오려고 하니까 점점 더 찢어지더라. 잘 안 보여서 신발 하나 벗겨진 거 들고 밑으로 내려왔다.”


아이는 일순간 뿌옇게 변해버린 눈앞의 세상을 아랑곳 않고 집으로 오기 위해 허우적거리며 골목길을 내려왔나보다. 아이는 황산을 황산인 줄을 모른다. 그저 뜨거운 물로만 생각을 한다. 그 뜨거운 물이 무서운 황산이었다는 걸 안다면….


아이는 몸에 고통이 더해갈수록 형아를 찾는다. 보고 싶은 형아야, 우리 형아야….



2000년 12월23일


비가 온다. 아이가 “엄마, 비가 오시나?” 하고 묻는다. 아이는 왜 비를 오신다고 할까. 누가 그렇게 얘기한 적도 없는데. 아이는 시각이 닫힌 대신 청각은 예민해졌다. 빗소리가 고요하다.


침대에 누여진 아이의 키가 부쩍 커버린 것 같다. 의사들도 “태완이가 많이 큰 것 같아요” 한다.


엄마가 “우리 태완이 그새 많이 커서 집에 있는 옷 하나도 못 입겠네” “발도 많이 커서 운동화도 작겠네” 하면 아이는 “그러면 어떻게 하냐” “다 나아서 집에 갈 때 뭐 입고 가” 하고 걱정한다.


엄마는 “새옷을 사주마”고 한다. 아이는 허리끈을 맬 수 있는 옷을 사달란다. 아이는 새옷을 입어보질 못했다. 형아가 입다 작아진, 물려받은 옷뿐이다. 멋있게 잘 어울리는 양복을 사주고 싶다.


집에 있는 형아 눈치가 보이는지, 우리 형아는 어떻게 하냐고 한다. 엄마는 형아는 3학년 올라갈 때 사줬으니 지금은 태완이 것만 사도 된다고 한다.


아이는 운동화 얘기도 꺼낸다. 엄마는 운동화도 옷도 태완이가 사고 싶은 건 뭐든지 다 사주마고 약속한다. 아이는 골드런 운동화를 갖고 싶다고 한다.


지난해(98) 겨울 태완이는 골드런 로봇이 갖고 싶어 산타할아버지께 소원도 빌었었다. 하지만 산타할아버진 골드런 로봇이 다 팔려서 못 주신다는 내용으로 형아랑 태완이 앞으로 편지를 보내고 대신 그 속에 용돈을 넣어주었었다. 아이는 그때 엄마한테 3천원 주고 장난감 사도 되냐고 묻곤 작은 로봇을 사왔었다. 형제가 많이많이 갖고 싶어했다. 골드런 로봇을….


불현듯 아이가 형아에게 전화를 걸어 달라고 한다. 새벽 3시가 조금 넘어선 시각이다. 지금은 형아가 자고 있어 좀 있다 해야 한다고 하니 울면서 자꾸만 전화를 걸란다. 조금, 조금 하다 6시가 넘자 큰애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 속에 있던 큰애는 누군지 분간도 못한다.


“엉아야, 내 태완이다.”


“….”


“엄마, 엉아야 말 안 한다.”


엄마는 속이 다 탄다.


“태우야, 태완이에게 말 크게 해라.”


아이는 형아에게 골드런 노래를 불러 달라고 한다. 형아는 울음 가득 찬 소리를 참고 동생에게 골드런을 불러준다.


“무지개 다리 놓고 가고 싶어도, 지금은 갈 수 없는 저 먼 우주는 아름답고 신비한 별들의 고향, 우리들이 꿈꾸는 미지의 세계….”


아이가 형아랑 통화를 하며 집에서 못다 배운 썬가드 만화 주제곡을 배운다. 형아 목소리가 떨린다. 울음 섞인 목소리는 눈물에 젖어 밖으로 


나오질 않는다. 눈물에 젖어…. 



2000년 12월27일


아이는 형아랑 전화로 노래를 부른다. 썬가드, 우주용사. 지금은 그 애의 얘기가 되어버린 듯 저 먼 우주에 가 있는 내 귀여운 영혼. 밝고 카랑카랑한 소리가 병실을 울린다. 밖이 뿌옇게 밝아온다.


“엉아야, 나 나아서 집에 갈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태우가 대답을 하나보다. 작은애가 어렵게 얘길 한다.


“엉아야, 나 엄마가 골드런 신발 사준다 하는데 내만 사도 되나?”


엄마는 또 숨이 ‘턱’하니 막힌다. 큰애는 동생 말을 잘 못 알아듣겠다고 한다. 엄마는 그것도 속이 상하다. 어렵게 나오는 말이 형아 귀에는 잘 안 들리나보다. 아이가 하는 말을 엄마는 옆에서 큰 소리로 반복한다. 큰애가 잘 들으라고.


“엄마, 엉아가 나 혼자 사도 된대.”


“응, 형아야가 사라고 하더나?”


두 아이의 전화가 어떻게 끝났는지 모르게 아이는 이내 깊은 잠이 들었다. 치료로 드러난 아이의 몸은 차마 두 눈 뜨고 볼 수가 없다. 저 아이가 험난한 파도같은 이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엄마는 병원건물 안에 마련된 법당을 찾았다. 108배를 올리고 나니 가슴에 진 멍울이 눈물이 되어 넘친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나? 내 아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나? 알 수가 없다.


“부처님, 저의 업 때문이라면 제가 고통을 받아야지 왜 저 아이가 받습니까?”


아이를 살려달라는 기도를, 매달리고 싶은 그 간절함을 밖으로 낼 수가 없다. 그냥 아이를 편하게,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그런 마음만 가질 뿐, 그 외엔 아무런 욕심을 가질 수가….



2000년 12월30일


아이의 치료 시간이다. 온몸에서 떨어져나간 각질 밑 피부는 말 그대로 붉은빛이다. 각막이 떨어져나간 두 눈의 모습은…. 얼굴 치료 과정을 차마 볼 수가 없다. 눈을 감았다. 아이의 치료과정을 보지 않으려 피했다. 아이에게 미안하다.


언제부턴가 눈이 따갑다고 해 치료 중에 안약을 넣었다. 엄마는 아이 눈을 바라보며 안약을 넣었다. 그건 눈의 모습이 아니었다. 하지만 단 하나라도 기억에 남기고 싶었다. 어떤 모습이든.


의사들은 그 약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하셨다. 아이에게 감각이 없다는 말이리라. 아무래도 좋았다. 엄마는 자기 가슴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아이의 고통이 조금이라도 줄어들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 엄마는 아이의 얼굴을 피하고 있다. 엄마의 가슴으로 아이의 상처를 치료하고 싶었지만…. 아이가 이런 엄마의 모습을 안다면….


아이는 그렇게 또 하루를 보내고, 또 하루의 날을 맞이한다. 열이 40도 5분을 오르내리고, 구토와 설사가 더해지면서 그 적은 양의 음식마저 거부해버린다. 배가 아프다고 한다. 두 손을 맞비벼 아이 배에 가져다 대보지만, 붕대 밑의 배에는 엄마의 따뜻한 손길이 전해지지 않는다.


견디기 힘든가보다. 엄마는 아이의 고통을 대신 가질 수 없음에 더 큰 고통을 느낀다.


잠에 빠져드는 시간이 길어지고, 아이가 치료 시간에 내던 유일한 거부의 몸짓도 기력이 다해 작아진다. 모든 걸 마음대로 하라는 체념의….


그래도 아이는 치료를 잘 받아주었다. 화상치료는 어른들도 견뎌내기 힘들단다. 진통제나 고통을 줄일 수 있는 약을 투여하면, 나중에 상처로 인해 감염되는 병균들에 대한 저항력이 줄어들어 회복이 늦다고 한다.


아이가 어떻게 견딜까. 어떻게 저 치료를 받아낼 수 있을까. 엄마는 치료 시간만 되면 눈물을 쏟아낸다. 울면 안된다고, 아이에게 미안해서 아이에게 부끄러워서 울지 말자고 다짐해도 쏟아지는 눈물은 걷잡을 수 없다.


패혈증… 그 균들이 보이기 시작한단다. 균들이 보이기 시작해 항생제를 바꾼다고 한다. 설사와 구토는 항생제에 대한 거부 반응으로 일어나는 부작용이란다. 그래서 약을 바꿔야 하고, 그 약에 대한 부작용이 일어나면 또 다른 약으로 바꿔야 하고, 그러다 보면 우리나라에서 쓰이는 항생제를 다 쓰고, 그 다음엔….


어느 날 아이는 엄마를 불러 얘기한다. 아이 아빠와 나눈 “퇴원하면 시골 가서 살자”는 얘길 들었는지 자기는 이사를 가지 않겠다고 한다. 이사하면 너무 좋아하는 3층 이모를 보지 못하니까 이사를 안 가겠단다.


아이의 이모는 엄마보다도 형아보다도 아이가 2등으로 좋아하는, 아빠 다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사를 가게 되면 그 이모랑 헤어져야 하니까 이사가면 안 된단다. 지금 우리 가족은 아이를 잃어버린 그 집에서 그냥 머무르고 지내고 있다. 사람들은 이사가면 좀 덜하지 않겠냐고 하지만.




2001년 1월3일


아이가 사고를 당하고 한 달이 지날 무렵, 각 방송사에서 취재를 위해 다녀갔다. 침묵에 싸여 있던 병실이 부산하다.


모 방송국 기자가 말했다. “그 사람 잡아서 혼내줄까?”


처음엔 대답하지 않던 아이가 “혼내줘, 잡아서 열 방 때려줘” 한다.


방송이 연일 이어지고, 곳곳에서 격려 편지와 전화가 온다. 낯선 사람에게서 전해지는 따뜻한 위로가 엄마는 당황스럽다.


처음 사고가 나고 오랫동안 무척 외로웠었다. 세상이라는 현실이 두려웠다. 분명 아이 잘못으로 당한 사고는 아닐진대. 한없이 땅속으로 잦아드는 기분이 들곤 했다.


서울에 사는 한 여자분이 계속 전화를 주신다. 어느덧 그분의 전화가 기다려진다.


어느 날 서울의 그 얼굴 모르는 분이 소포를 부쳐왔다. 곰인형에, 태완이가 갖고 싶어하던 지갑에, 도널드가 달린 부채….


편지와 함께 아이에게 보여준다. 아니, 만지게 해준다. 주먹만한 곰인형의 배를 누르면 노래가 나온다. 아이의 손끝에 그 인형을 대어주니 슬그머니 뺀다. 엄마가 “형아야, 많이 아프나 하고 인형이 묻네” 하니까 아이는 보일 듯 말 듯 씨∼익 웃는다. 쬐끄맣게 나온 입이 귀엽다.


아이의 손을 잡고 “태완아, 이건 코, 이건 입, 어머 곰돌이가 옷 입었네. 그리고 이건…(가슴이 터질 듯하다) 곰돌이 눈….”


아이가 슬그머니 곰인형을 만지작거린다. 손끝으로. 그 작은 곰을 한 손에 꼭 쥘 수가 없어 두 손끝으로 맞잡아 쥔다. 손끝으로 아이는 곰을 자꾸만 만지작거린다.


힘든 치료와 시간별로 이어지는 검사에 아이는 잔득 움츠려 있다. 간호사들과 긴 바늘로 허벅지 안쪽 깊숙한 곳을 찔러 혈액을 채취하는 선생님들의 발소리가 들릴라치면 아이는 민감하고 짜증난 소리로 “나가라 해” 한다. 얼마나 두려울까?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


아이가 그렇게 무서워하는 검사임에도 엄마는 그 말을 들어 줄 수가 없다. 엄마도 그 시간이 너무나 싫다. 긴 바늘이 아이 몸속을 들어가는 것만 봐도 소름이 돋는데, 그 아픔을 아인 어떻게 견딜까. 혈관을 찾지 못하면 바늘이 이리저리 아이 몸속을 헤집고 다니고, 아이는 자지러질 듯이 비명을 지른다.


참다못한 아빠는 검사를 하지 말라고 의료진에게 강한 반감을 표시한다. 엄마는 어쩔 줄 모른다. 가만히 있는 엄마 마음을 아는지, 아이는 화난 아빠를 달래려 엄마에게 말한다.


“오늘은 한 번만 더 검사하면 되나?”


엄마는 아이의 대견스러움에 목이 멘다.



‘털프가이’와 ‘귀염둥이’의 아름다운 사랑


2001년 1월10일 집에서 전화가 왔다. 큰애가 울먹이는 소리로 “엄마” 하고 부른다. “방송국 아저씨가 내가 쓴 일기를 읽어라 하는데, 눈물이 나서 못 읽겠더라”고 한다. 방송사에서 큰애 일기를 보았나보다. 내용을 읽어 달랬더니, 큰애는 읽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는 큰 애에게 말한다.


“태우야, 태완이를 위해서 읽어봐. 울지 말고. 우리 태완인 더 많이 힘들어도 잘 참잖아. 힘들지만, 우리 태우 힘든 거 알지만 해봐.”


엄마는 큰애에게 강한 힘을 주고 싶다. 어떤 경우가 닥쳐도 이겨낼 수 있는 강한 의지력을. 태우는 동생보다 마음이 더 여린 아이다.


형아는 그날 집에서 동생을 생각하며 쓴 일기를 읽어 내려간다.



태우의 일기


5월30일 일요일 맑음

어머니와 통화를 했다. 어머니는 “태우야, 동생이 아프니깐 조금만 더 참고 지내렴” 하고 말씀하셨다.


숙제를 하는데 자꾸 동생이 생각났다. 동생이 생각날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친구들이 “니 동생 어떻게 됐는데?” 하고 물을 때도 가슴이 아팠다. 성희 누나 방에서 일기를 쓸 때, 동생 생각이 나서 눈물을 흘렸다. 내 머릿속에는 동생 생각으로 가득 찼다.


동생이 빨리 나아 나하고 같이 놀았으면 좋겠다. 동생이 빨리 낫게 해달라고 기도를 두 번이나 했다.


6월25일 금요일 맑음

어떤 아저씨가 집으로 비디오카메라 같은 것을 가지고 왔다. 아저씨가 내 일기를 보시고는 동생이라는 제목을 찾아서 내 마음이 제일 잘 나타나 있는 부분을 읽어보라고 하셨다. 그것을 동생에게 들려주면 빨리 낫는다고 하셨다.


처음 읽을 때는 실패해서 다시 읽는데, 동생 생각이 나서 멈추고 눈물을 흘리다가 다시 울면서 읽었다. 왜냐하면 마음이 아프기 때문이었다.


다 읽고 나 혼자 방에 들어가 1시간30분쯤 계속 울다가 잠을 잤다.


그런데 동생 생각이 나서 눈물만 계속 나왔다.


할머니께서 “태우야, 울지 마라, 울면 할머니까지 운다” 하셨다.


오늘은 너무 슬픈 날이다. 제일 슬펐을 때는 아저씨께서 일기를 읽으라고 할 때였다.


난 마음속으로 ‘태완이 파이팅! 파이팅!’ 하고 외쳤다. 동생이 빨리 나았으면 좋겠다.


6월28일 월요일 맑음

아침에 동생과 통화를 했다. 동생이 골드런 노래를 불러 달라고 해서 수화기에 대고 불러주었다. 자신감을 가지고 불렀지만 자꾸 눈물이 나왔다. 동생 태완이가 “내 빨리 나아서 형아랑 놀자”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너무 슬펐다.


7월에 방학이 되면 태완이에게 가서 한번 안아 주어야겠다. 또 돈을 모아서 태완이가 좋아하는 로봇을 사주어야겠다.


태완이와 통화해서 참 기뻤다.


어제는 태완이가 걱정이 되어서 마음이 좀 아팠다. 지금도 태완이 때문에 울음이 나오려고 한다.



2001년 1월17일


하루는 의사선생님이 머리에 난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아이의 머리카락을 잘라내야 된다고 하신다. 아이는 숱이 적어 머리 깎는 걸 싫어한다. 사고나기 전해 가을(98), 짧게 자르면 머리가 많아진다고 달래 아주 짧은 스포츠로 깎아줬다.


아이는 그게 너무나 부끄러워 방에 들어가 하루를 소리 없이 울더니, 이모가 구해준 모자를 받아들곤 밖으로 나왔다.


“우리 태완이 너무 멋있다. 가수 유승준 닮았다”고 하자 그제야 아이는 씨~익 웃었다. 그때부터 아이는 모자를 쓰고 다닌다. 아무리 바빠도 아이는 모자 쓰는 걸 잊지 않았다. 그런데….


엄마는 의사선생님께 머리를 자르지 않으면 안 되냐고 조심스레 묻는다. 그러면 머리 밑 치료가 어렵단다. “태완아, 머리 깎자. 머리는 금방 자란단다”고 달래서 이발관으로 데려간다.


“우리 태완이 머리, 예쁘게 깎아주세요.”


시퍼런 면도날이 아이의 머리자락을 밀고 다닌다. 차라리 저 날이 내 가슴을 도려낸들 이보다 더 아플까.


엄마는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아이의 두 팔을 잡고 있다. 눈물과 아이의 머리카락이 섞여 보인다. 아빠는 아무런 말이 없다. 저 가슴은 어떨까. 엄마와 아빠는 정말 태완이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구나.


머리를 다 깎고 나서 치료가 시작되었다. 의사선생님이 “와, 태완아, 너 너무 멋있다. 꼭 아기 스님 같아”라고 하신다.


“우리 태완이 멋있죠?”


“….”


아이는 아무런 말이 없다. 잔뜩 화가 나 있다.


치료…. 겨드랑이 밑 상처가 심하다. 겨드랑이 치료는 두 팔을 높이 들어야 하는데, 고통에 겨운 아이가 팔을 들지 못한다. 엄마가 그 상처투성이 팔을 손으로 잡고 들어올리지만 아이는 힘을 주지 못한다. 올려진 팔이 자꾸만 미끄러져내린다. 시간은 가고 온몸이 드러난 아이는 춥다고 하고. 엄마 눈에선 또 눈물이 흐른다.


의사선생님이 “태완아, 너 치료 안 받으면 엄마 또 운데이” 하자 가만히 있던 아이가 “엄마, 이렇게 하면 되나?” 하고 팔을 높이 번쩍 들어올린다. 아이야, 너는 그 고통 속에서도 엄마를 생각하는구나….


아이가 지난 며칠 사이 기운이 많이 떨어진 것 같다. 물 외엔 찾는 게 없다. 기운이 다 빠진 태완이가 갑자기 “엄마, 물고기한테 미안하다”고 한다.


물고기? 작은 수족관에 열대어 대여섯 마리를 길렀었다. 태완인 제가 좋아하는 여자친구를 집에 불러다(그 애를 태완이는 너무 좋아한다) 그 여자애 손에 잡게 해주려고 물고기를 끄집어내다 두 마리나 죽게 했다. 그 일이 있은 후 기죽은 듯 아무 말 없이 며칠을 보내던 중 사고가 난 것이다. 한 달이 훨씬 더 지난 얘길 왜 지금 꺼낼까.


“으응, 괜찮아 태완아.”


엄마는 어떻게 얘길 했는지 기억에 없다. 하지만 아이가 왜 그런 얘길 하는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2001년 1월22일


아이와 엄마가 노래를 부른다.


“…요리 보고, 저리 보고 음∼음∼ 둘리∼, 빙하 타고 내려와….”


골드런, 썬가드…, 한참을 부른다.


그때 조용히 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들어온다. 수간호사는 “태완이 노래하는구나. 목소리 처음 들어보겠네. 노래 잘하는구나” 한다. 아이가 노래를 멈춰버린다. 엄마는 “태완이 노래 잘하죠?” 한다.


간호사의 물음에 아이는 대답이 없다.


아이는 전에 없이 밝아져 있다. 졸립거나 무료할 땐 귓불을 만지며 아랫입술을 고물고물 빠는 버릇이 있다. 엄지와 검지로 귓불을 만지작거리는 아일 볼 때면 무슨 생각을 저리 할까 싶었다. 그러면서 아이는 무척 평안하고 안정된 얼굴로 졸음을 참는다.


하지만 지금 아이는 오른쪽 귀 하나를 잃어가고 있다. 심한 상처로 귓불이 까맣게 되더니 날이 갈수록 그 형태가 점점 작아진다. 갓난아이처럼 우물거리며 빨던 아랫입술도 없다. 거즈로 덮어놓은 입술은 조그만 움직임에도 붉은 피를 토해낸다. 한쪽 남은 귓불도 얼굴과 머리에 난 상처로 붕대 밑에 감추어졌다.


아이의 불안해하는 모습이 느껴지자, 아빠는 고개를 숙여 아이의 손을 당긴다.


“태완아, 아빠 귀 만져라.”


아이는 조그만 손끝으로 아빠의 귀를 만지작거린다. 아이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태완아. 엄마가 한번 업어줄까?”


아이는 말이 없다. 엄마는 아이에게 다시 묻는다.


“완아, 엄마가 한번만 업어줄까?”


엄마 목소린 가늘게 떨려 나온다. 아이가 “응” 하고 대답한다.


아빠가 아이를 부축해 엄마 등뒤로 업힌다. 3층 이모는 아이가 6살이 되도록 그렇게 업어주었다. 시장 갔다 오르막 오를 때, 먼길을 걸을 때, 추워도, 더워도…. 이모가 업어주면 아이는 이렇게 말한단다.


“이모야, 내를 와 이모가 업어주는지 다 안다. 내 힘들어서 업어주제. 이모가 태완이 사랑하니까 업어주제.”


엄마는 그 생각이 났다. 사랑하니까 업어준다는 말. 아이에게 엄마도 사랑한다는 걸 말해주고 싶다. 그래서 업어주고 싶었다.


엄마의 두 다리가 파르르 떨린다. 그냥 누워만 있어도 힘들 아이…. 아이는 엄마 등에서 그렇게 매달려 있다. 싫다는 말도, 힘들다는 말도 없이.


아이의 호흡이 가빠져 침대에 내려놓았다. 침대에 누운 아이가 말한다.


“엄마, 업히니까 힘들더라.”


아이가 신발 얘길 한다. 골드런 운동화 사왔냐고 묻는다. 엄마는 “내일 꼭 사올게” 한다.


“엄마 그 신발 신고 밖에 나가고 싶다”고 한다.


“으응, 우리 태완이 조금만 나으면 엄마가 업고 밖에 바람 쐬러 가자.”


“아니, 엄마. 내 발로 갈래.”


아이가 걷고 싶다고 한다. 옆에 깜박 잠든 아빠를 두고 엄마는 아이를 일으켜 본다. 아이의 온몸에 붙여진 링거 줄들도 따라 일어난다.


침대 위로 일어선 아이가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준다. 아이가 풀썩 주저앉는다.


“엄마, 안 된다.”



2001년 1월31일


날이 덥다. 태완이가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고 해 아빠는 병원 근처에서 그 애가 즐겨 먹던 크림을 사왔다. 아이는 한입도 먹지 못하고 고개를 젓는다.


“엄마, 우리 엉아야도 덥겠다. 엉아야 아이스크림 좋아하는데, 누가 사주노. 내 다 나으면 아이스크림 많이 사준다 해라” 한다.


병실에 다녀간 친척이 아이 손에 돈 3만원을 쥐어주고 갔다.


두 손 가득 그 돈을 움켜쥐더니 베개 밑으로 넣어달란다. 그가 다녀가고 아이가 그중에 두장을 아빠 손에 준다.


“아빠, 이거 엉아야 갖다 줘라. 아이스크림 사먹게.”


아빠가 형아는 주지 않아도 된다고 해도 자꾸만 주란다. 


수간호사분이 환자가 한 분 더 들어 올 거란 얘길 한다. 태완일 생각해서 다른 병원으로 이송할 것을 권했으나 화상병동을 갖춘 병원이 없고, 다른 병실로 그 환자를 보낼 수도 없다고 한다.


그 환자로 인해 조용한 병실이 갑자기 부산해진다. 의료진과 그 환자의 가족들. 아이는 “누구야?” 한다. “시끄럽다” 하더니 이내 조용해진다.


어른인 그 환자도 이렇게 고통을 못 견디는 데, 우리 태완인? 그 환자의 비명이 커질수록 엄마의 맘엔 불안이 가득하다. 그의 비명은 공포스러울 만치 두렵게 다가온다. 엄마만큼 아이도 불안한 걸까? 아이의 소리가 달라지고 있다.


30대 후반인 그는 화상으로 인한 고통을 못 견뎌 끊임없이 소리지른다. 그 환자의 보호자는 어쩔 줄 몰라한다. 아이가 너무나 괴로워한다. 참다못한 엄마가 소리 지른다.


“옆에 환자분 조용히 좀 하세요. 여긴 여섯 살 먹은 어린애도 참는데. 조금이라도 참아보세요.”


아이도 그도, 그 환자의 보호자도 모두 조용해진다.


아이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진다. 패혈증도 가장 독한 균이 발견 된 터라, 엄마는 그 사람의 입원이 못내…(그 환자의 생존 가능성도 희박하다 했었다. 너무나 참기 힘든 고통에 괴로워하던 그분께 죄송했음을 용서 구한다).


아이가 아프다고 하기 시작한다. 조그만 몸으로 소리도 지르고 몸부림도 친다. 여지껏 참아온 고통이 봇물이라도 터진 것 같다.


엄마는 아이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태완아, 조금만 참아라, 너 아파하면 저 아저씨도 더 아파하고….”


“엄마, 그래도 못 참겠다.”


“….”


“엄마, 3층 이모 보고 싶다. 오라 해라.”


“으응, 태완아 이모한테 전화해줄게.”


엄마는 아이에게 조금만 기다리라 한다.


그날 저녁, MBC 에서 아이의 얘기가 흘러나온다. 처음엔 가만히 듣고 있던 아이가 태완이, 태완이 하는 제 이름을 듣더니, “내 이야기 고만 해” 하고 소리지른다. 엄마도 소리를 낮추라 소리지르고.


아이는 밤새 앓는다. 그렇게 아파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아침이 밝았다. 갑자기 전화벨이 울린다. 각지에서 아이의 얘길 들은 분들의 격려 전화가 빗발친다.


“태완 엄마, 힘내세요.”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제가 어떻게 도울까요?”


“엄마가 힘을 내야 아이도 힘을 냅니다.”


어떤 엄마는 자기에게도 꼭 태완이만한 아이가 있다며 엄마보다 더 흐느껴 운다. 엄마도, 전화선 넘어 그 엄마도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한다.


“아이를 꼭 살려야 합니다. 그렇게 착한 아이가….”


아이를 꼭 살려야 합니다. 아이를 꼭 살려야 합니다. 그럼요. 그럼요. 근데 왜 엄마는 그 대답에 자신이 없는 걸까.



2001년 2월8일


“엄마, 나 갈래, 갈래, 갈래.”


“태완아 어디 간다고?”


엄마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아이가 어딜 간다는 걸까?


아이는 하루 사이에 급격히 상태가 나빠진다. 복수가 차올라 무섭게 부어 오른 배가 몹시 아프다고 한다.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떨며 덥다고도 하고 춥다고도 한다. 체온이 35도까지 내렸다, 갑자기 40도를 웃돌고…. 소변과 대변이 그냥 흘러나온다. 소변도 대변도 아닌 투명한 액체가….


“엄마, 응가 나왔다 쉬 나왔다 한다. 참을라고 하는데 저절로 나온다.”


20여일을 물 한 모금 제대로 먹지 못한 아이의 몸에선 빛깔 고운 젤리 모양의 끈적한 액체가 자꾸만 나왔다. 아이는 전에 없이 고통스러워한다. 가슴이 답답하다 한다. 아니 마음이 답답하다고 했다.


앉아 있고 싶다고 해 아이를 일으켜 보았지만 아이는 견디질 못한다. 창 밖에 어둠이 지고 있었다.


“태완아, 엄마 한 번만 더 업어보자.”


아이는 힘없이 고갯짓을 한다. 이렇게 고통에 가득한 모습을 엄마는 볼 수가 없다. 아빠가 아이를 일으킨다. 아빠가 주춤거린다. 아빠도 힘이 많이 빠졌으리라. 엄마 등에 업힌 아이의 머리가 몹시도 무겁게 느껴진다.


그렇게 있던 아이가 내려달란다. 아이를 잠시 앉혔다 뉘는데, 아빠 혼자의 힘으론 아이 머리를 지탱하지 못했다. 축 늘어진 머리. 엄마는 두려운 마음이 든다.


“엄마, 3층 이모보고 싶다. 빨리 오라고 해.”


“응, 조금만 기다려. 이모야한테 전화 걸어줄게.”


“이모야, 빨리 온나. 내 이모야 보고 싶다.”


아이는 자꾸만 재촉한다. 체내 산소율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이는 산소호흡을 해야만 하는데. 아이의 모든 상태가 급격히 떨어진다. 가슴이 답답하다고 한다.


소아과 의사가 들어오고 산소호흡을 인공호흡으로 바꾸기 위한 조치가 시작됐다. 소아과 선생님은 아빠를 불러 뭐라고 속삭인다. 아빠는 엄마의 등을 떠밀어 밖으로 내보낸다.


“밖에 나가 있어.”


엄마는 병실 문 밖에서 떨고 서 있다. 여지껏 견뎌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태완이가 이겨주리라….


의료진의 발빠른 움직임이 계속되더니 소아과 중환자실로 옮겨가야 한다고 했다. 아이의 붕대 감은 얼굴엔 핏물이 배어 나온다.


이동침대 옆에서 아빠가 아이에게 말한다. “태완아, 아빠 여기 있다.” 아이가 아빠의 손을 꼬옥 잡았다. 아빠는 지금도 그 아이의 마지막 따뜻한 손길이 느껴진단다.


소아과 중환자실. 아이의 입과 코에서 뿜어나오는 붉은 피가 아이 온몸을 적신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엄마는 ‘눈부시게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사망 시간 오전 8시.


돌아나온 엄마는 복도 끝자락에 멍하니 앉았다. 아이를 치료해 주시던 의사선생님이 빠른 걸음으로 아이에게 가고 있었다. 뒤따라선 엄마는 “우리 태완이 이쁘게 치료해 주세요” 한다.


영안실로 내려간 아이…. 밖엔 비가 오시고 있었다.



2000년 2월15일


입관식. 아이와의 작별. 태완이가 누워 있다.


“우리 태완이 예쁘네.”


엄마는 “태완아, 안 아프더나?” 한다.


새로 산 속옷, 새로 산 남방, 새로 산 벨트, 그렇게 입고 싶어했던 새로 산 회색빛 양복…. 우리 태완이 참 의젓하다.


엄마는 태완이에게 입맞춤을 했다. ‘태완아, 잘 가’.


작은 관 속에 아이가 눕혀진다. 아주 조그만, 예쁘고 귀여운, 옻칠한 관 속에.


아이의 빈소로 돌아온 엄마는 조화 뒤에 숨어 아이를 생각한다.


“무지개 다리 놓고 가고 싶어도 지금은 갈 수 없는 저 먼 우주는….”


엄마는 아이와 함께 불렀던 노래를 부르다 울부짖는다. 그리곤 쓰러졌나보다. 사고가 나고 처음으로 놓아버린 정신…. 누군가 바늘로 찌르고, 또 누군가 “저기 태우 온다. 정신차려” 한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날까?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일어선 엄마는 태우에게 다가간다. 태완이를 보낸 엄마는 떠나간 태완이만큼 태우가 가슴 아프다.


주위 사람들은 태우에게 동생의 죽음을 충격 없이 받아들이게 하고 싶었다. 모두들 유쾌한 모습으로 말을 걸고, 태완이가 갖고 놀던 장난감을 쥐어주고, 태완이가 좋아한 골드런 책을 읽어달라고 한다.


태우는 그저 읽었다. 감정의 표현이 나지 않는다. 맨 뒷줄에 엄마와 나란히 앉은 형아는 태완이를 위한 스님의 기도를 듣고 있다. 말없이 있던 형아가 울기 시작한다. 그 흐느낌은 좀처럼 그칠 줄 모른다. 엄마도 아빠도 어쩔 줄 모른다.


“방학하면 태완이한테 선물 주려고 했는데, 그 선물 인자 어떡하노.”


엄마 아빠는 “태완이는 죽지 않았어. 엄마 아빠 그리고 형아랑 영원히 살 거야. 태완이가 형아 좋아한 거 알지? 네가 자꾸 울면 태완이도 슬퍼할 거야. 태완이 맘 편하게 가게 울지 마. 엄마 아빠도 안 울잖아.”


다음날 아침, 가는 빗줄기가 내리고 태완일 실은 차가 병원을 나선다. 먼길을 따라 우리 네 식구가 웃고 함께한 그 집을 찾았다. 태완이의 영정을 형아가 두 손에 꼬옥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태완아, 물고기한테 인사해야지. 이제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니가 보낸 물고기랑 친구하면 되잖아.” 나직하게 속삭인다.


“….”


태완인 말이 없다. 그리운 그 집을 아이는 구석구석 인사를 한다. 형아랑 마지막 밤을 보낸 작은 방, 소리쳐 뛰놀던 골목길…. 모두랑 작별을 고한 아이는 말없이 차에 오른다. 뜨거운 불길이 기다리는 화장터를 향해.


입구에 ‘고 김태완’이라고 쓰여진 커다란 굴이 입을 열고 있다. 조용히 아이의 관이 들어간다. “태완아, 잘 가.” 아빠는 말없이 눈물만 쏟아낸다.


“태완아, 아빠가 나쁜 사람 잡아서 혼내줄게.” 아빠가 소리친다.


긴 시간이 흐르고 불길 속에 잠재워진 아이의 이름, ‘고 김태완’이라고 분필로 쓰여진 그 이름이 한 아저씨의 무표정한 손으로 쓰윽 하고 지워졌다. 아이의 이 세상 흔적은 그렇게 사라졌다.


‘내 사랑하는 아가 태완아, 엄마가 진정 널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먼 훗날 널 만나면 엄마가, 엄마가 많이많이 사랑해줄게.’


엄마는 널 이렇게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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