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델 카스트로 사망과 체 게바라 이야기, 쿠바혁명의 시대가 저물다

Posted by 자발적한량
2016.11.26 18:04 일상생활/썰을 풀다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전 국가평의회 의장이 현지기준으로 25일, 90세의 일기를 끝으로 타계했습니다. 피델 카스트로의 동생이기도 한 라울 카스트로 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은 국영방송을 통해 "카스트로가 25일 오후 22시 29분 숨을 거뒀다"고 발표했습니다. 카스트로의 시신은 그의 유지에 따라 26일 화장이 이루어집니다. 피델 카스트로는 지난 4월 아바나에서 열렸던 쿠바 공산당 제7차 전당대회 폐회식에 참석해 "나는 곧 아흔살이 된다. 곧 다른 사람들과 같아질 것이며, 시간은 모두에게 찾아온다"고 밝혀 자신에게 죽음이 다가왔음을 암시했습니다. 그의 90번째 생일이었던 8월 13일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에 이어 올해 9월 쿠바를 방문한 중국의 리커창 총리와 면담을 한 것이 마지막 모습이었죠.

피델 카스트로는 1926년 스페인의 갈리시아에서 쿠바로 이주한 농부 앙헬 카스트로 아시스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앙헬 카스트로는 에스파냐(스페인)군에 맞서 쿠바의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미국의 도움을 받아 1902년 에스파냐군을 몰아내고 쿠바 공화국이 선포되었죠. 하지만 쿠바는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한채 미국에게 점령을 당해 친미정부가 수립되는 등 사실상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이후 앙헬 카스트로는 쿠바의 바이렌으로 돌아가 사탕 수수를 재배하는 농부가 되었죠.

피델 카스트로는 앙헬 카스트로가 첫 번째 부인 마리아 루이사와 이혼한 뒤 재혼한 리나 루스 곤살레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재미있는 일화는 두 사람이 피델의 성을 두고 누구의 성을 붙이느냐를 두고 심하게 말다툼을 벌였다더군요. 결국 두 사람 모두의 성을 붙여 그의 이름은 '피델 카스트로 루스'가 되었다고 합니다. 변호사의 꿈을 키우던 피델의 인생이 변하게 된 것은 아바나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중 우연히 쿠바의 친미정권에 항의하는 학생 운동에 연루되어 배후자로 지목을 받게 되면서부터입니다. 당시 쿠바의 대통령인 라몬 세력에게 시달리게 된 피델 카스트로는 1946년 대학생 연맹 회장이 되어 부패가 만연했던 대학 학생 운동 문화의 개혁과 함께 라몬 정권의 친미적 태도와 미국의 제국주의를 비판했죠. 이후 피델의 세력은 쿠바 내의 좌익 단체와 연합을 하며 국제적인 학생 운동단체로 성장했습니다. 라몬&라우 정권은 경찰은 물론이고 갱스터를 고용해 학생 운동가들을 탄압하는 등 방해공작을 펼쳤지만 피델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강경한 자세를 취했고, 그는 신문의 첫 페이지에 등장하거나 공개연설을 하는 등 점차 유명인사가 되어갔죠.


1947년 피델은 쿠바와 이웃인 도미니카 공화국 해방 계획을 세웁니다. 당시 도미니카의 라파엘 트루히요는 극우세력의 대표주자로 암살, 고문, 폭력을 일삼고 비밀 경찰을 운영하며 아이티 이민자 3만명을 살해하는 등 억압과 착취로 악명 높은 독재자였는데요. 카스트로는 도미니카 공화국 해방 운동에 뛰어든지 얼마 되지 않아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도미니카 대학위원회 국제의장이 되었습니다. 위기를 느낀 라파엘 트루히요는 쿠바 정부군과 연합하고 미국의 정보 지원을 받아 피델 카스트로 혁명군의 작전 실행 전에 대부분을 검거하게 됩니다. 당시 피델은 바다를 수영해 탈출하며 가까스로 검거되지 않았고, 1948년 쿠바에서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게 되죠. 또한 마르타 디아스 발라트와 혼인을 하게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반미를 외치던 카스트로 부부가 머문 3개월간의 신혼여행지는 뉴욕이었지만..


1950년대에 들어서 쿠바의 또다른 사회주의 세력인 인민정통파가 다수당이 되었지만 11대 대통령 카를로스 프리오 소카라스가 살해당하고 혁명 정부가 세워지면서 쿠바는 또다시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쿠데타를 일으킨 풀헨시오 바티스타는 1940년 9대 대통령을 지낸 인물로 쿠바를 발전시킨 인물이었지만, 1952년 다시금 쿠데타로 돌아온 그는 친미·반공, 그리고 부정부패로 둘러쌓인 독재자로 변해있었습니다.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MSR(사회주의 혁명 운동)은 이에 맞서 무장봉기를 감행합니다. 라디오 방송국을 접수한 뒤 폭력혁명론을 공표하고 1953년 7월 26일 몬카다 병영을 습격하죠.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난 후 피델은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은 뒤 산티에고의 감옥에 수감됩니다.

피델 카스트로의 수감은 쿠바 민중들에게 분노를 일으켰고 대대적인 파업과 학생운동에 나서 관공서, 경찰서 등을 습격하였습니다. 결국 2년 뒤 특별사면으로 풀려나게 된 피델은 멕시코로 망명하였고, 여기서 바로 혁명 동지인 체 게바라를 만나게 되죠. 이들은 다시금 동료를 모으면서 쿠바의 혁명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이를 듣게 된 풀헨시오 바티스타가 멕시코 정부에 요청해 멕시코에서도 수감되기도 했던 피델은 멕시코에서 혹독한 게릴라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결성된 쿠바 혁명군은 1956년 그란마 보트를 타고 쿠바에 상륙하여 바티스타 정부군과 내전을 치루게 됩니다. 민중의 지지를 받으며 혁명군의 수가 급증하자 정부군은 월등한 장비를 갖춘 대대급 규모의 군대를 파견하지만 혁명군은 이를 간단히 물리쳤고, 끊임없이 민중들이 가세하며 병사들의 수는 오히려 증가했죠. 결국 전세는 기울었고 풀헨시오 바티스타는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망명을 하면서 1959년 1월 1일, 쿠바 혁명이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이후 쿠바는 통일사회당 일당제 체제 속에 마르크스주의에 근거하여 국가를 운영되었습니다. 미국과 연관된 산업체가 국유화되고 은행의 금리가 동결되는 등 사회주의 정책이 추진되었고, 스페인의 잔재였던 가톨릭 교회가 모두 철거되었죠. 소련은 자발적 민중 혁명으로 공산국가가 된 쿠바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반대로 미국은 쿠바를 경제 봉쇄하며 압박을 했습니다. 쿠바의 이러한 변화에 불만을 느끼고 미국으로 망명한 이들로 특수부대를 구성해 피그스만 침공을 감행했다가 소련의 빠른 정보제공으로 실패해 국제적 망신을 당하기도 하죠.

그리고 1976년 피델 카스트로는 그간 유지해왔던 총리를 뛰어넘어 국가평의회 최고인민의장으로 선출되면서 명실상부한 쿠바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쿠바에서는 소련의 스탈린, 북한의 김일성 등과 같은 공산주의 국가 지도자에 대한 개인숭배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사회주의화가 완성됐던 1963년에서 1980년대까지는 남미 어느 국가에 부럽지 않은 경제력을 과시하기도 했죠. 물론 소련이 붕괴되면서 경제가 심하게 악화되었습니다만, 이에 굴하지 않고 자립경제체제, 순환형 사회를 구축하면서 부유하진 않지만 쿠바의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2008년 자신의 친동생 라울에게 정권을 넘기며 49년간 지켜온 권좌에서 내려오게 되죠.

위에서 잠시 언급했습니다만, 의사의 삶을 버리고 공산혁명에 뛰어들어 라틴 아메리카 각지에서 민족 해방과 반미운동에 앞장서왔던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8인승 레저 보트에 82명이 탑승한채 7일 뒤에 도착한 쿠바의 해안가에서 그들을 맞이했던 것은 정부군(상륙 계획을 피델이 미리 발표했기 때문에). 하지만 이 100명도 안되는 반군을 이끈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쿠바 혁명을 달성하고 말죠. 이후 체 게바라는 명실상부한 쿠바 혁명정부의 2인자로서 통상사절단을 이끌고 일본을 방문하고, 아바나 라 까바니아 요새수비대 사령관, 쿠바국립은행총재, 산업부장관, 쿠바통일혁명조직 전국지도부 및 비서국의 일을 도맡는 등 '쿠바의 두뇌'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다만 체 게바라는 1965년 돌연 "쿠바에서는 모든 일이 끝났다"라는 편지를 남기고 볼리비아로 떠나 그곳에서도 역시 게릴라전을 벌이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볼리비아 정부군에 잡혀 총살을 당했습니다. 그의 시체는 30년후 볼리비아에서 발굴되어 쿠바에 안장되었죠. 여기에 얽힌 한 가지 후일담이 있는데요. 체 게바라를 처형한 병사가 시간이 흘러 자신의 눈 치료를 위해 제3세계에서 가장 고도의 의료를 무상으로 받을 수 있는 쿠바를 찾았는데, 쿠바 정부에선 그에 대해 문제삼지 않고 무사히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합니다.

피델 카스트로는 "올림픽에 '암살에서 살아남기' 종목이 있다면 내가 금메달을 땄을 것"이라는 말을 남길 만큼 무수히 많은 암살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가 받은 암살 위협 횟수만 638번이라고 전해지는데요. 이러한 위협 속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았던 키델 카스트로. 하지만 결국 세월 앞에서는 여느 인간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수십년간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최전선에 서있어야만 했던 대한민국에서 체 게바라는 물론이고 피델 카스트로는 그저 '빨갱이'이자 '빨치산의 우두머리'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분명 국민들의 고혈을 빨아 먹으며 자신의 배만 불리는 북한의 김일성·김정일·김정은과는 다른 지도자였습니다. 미국 중심의 제국주의 풍랑 속에 고통받던 라틴 아메리카인들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싸웠고, 쿠바의 자립을 위해, 쿠바 국민들의 행복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던 피델 카스트로. 이미 미국과 쿠바도 2014년 12월, 53년간의 적대관계 청산 및 국교정상화 선언을 한 것에 이어 2015년 8월 아바나 주재 미국 대사관을 개설하고, 올해 2월에는 두 나라를 오가는 정기 항공노선을 개통하였으며, 올해 3월 쿠바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라울 카스트로가 88년만에 정상회담을 갖기도 하였죠. 2016년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에 대해 쓰고 있던 색안경을 벗고 그의 본모습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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