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기념관 홍난파 비석앞 단죄문 설치...단국대 난파 홍영후 전시실은?

Posted by 자발적한량
2015.09.22 14:15 일상생활/그렇고 그런 일상

'역사를 잊는 민족에게 나라는 없다' 친일파 홍난파 기념비 앞에 단죄문 세워져 


ⓒ배방신문 현창섭 기자

독립기념관 광복의동산 홍난파 홍영후 단국대학교 단국대 난파음악상 친일파 봉선화 모리카와 준

할아버지가 충남 천안시 목천면에 살고 계셔서 독립기념관은 상당히 저에게 익숙한 장소입니다. 어렸을 적부터 독립기념관 가는 것을 무척 좋아했죠. 성인이 되고서 좀 오랫동안 못갔었는데, 지난 겨울에 갔더니 입장도 무료가 되고 전시도 대폭 변경됐더군요. 독립기념관 인근에는 2,300여 평의 '광복의 동산'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독립기념관 시설은 아닙니다. 진입로 좌측에 있는 숲인데, 유관순 열사가 다녔던 외봉교회의 감나무와 이화학당 우물가의 산사나무와 은행나무, 백범 김구 선생이 일본 헌병을 살해하고 피신하기 위해 마곡사에 승려로 있을 때 손수 심은 향나무,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윤봉길 의사 생가에서 가져온 은행나무와 만해 한용운 선생의 생가에서 가져온 감나무, 이준 열사가 묻혔던 헤이그 묘역에서 가져온 로소니아 화백나무 등이 비석들과 짝을 이뤄 있는 곳이죠. 제가 태어난 1987년 독립기념관이 개관하면서 천안시, 당시 천원군이 조성하고 관리해 왔습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을 기리는 나무와 비석도 이 곳에 있습니다. 홍난파. 정확히는 난파 홍영후. 난파 홍영후는 한국 근대음악사에서 꽤나 족적을 남긴 인물입니다. '한국의 슈베르트'라고 불린 그는 ''울밑에 선 봉선화야~'로 시작되는 봉선화. 그리고 남북한이 모두 함께 입을 모아 부를 수 있는 '고향의 봄'을 비롯해 '성불사의 밤' '고향 생각' '오빠 생각' '퐁당퐁당' 등 수 많은 가곡과 동요를 남겼죠. 홍난파 비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봉선화', '고향의 봄'을 비롯한 수많은 겨레의 노래로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래주면서 희망과 용기를 북돋워 준 작곡가 난파 홍영후(홍난파의 본명, 기자 주)로 선생의 고향인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활초리 옛 동산에 자라던 감나무, 상수리나무 가지를 따다가 여기 심어 선생의 높은 뜻을 기린다.


하지만 문제는 홍영후가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을 비롯하여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역시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공식발표한 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와 있는 대표적인 친일음악인이라는 점입니다. 처음 이 사실을 접하고선 그동안 '봉선화라는 노래로 민족의 아픔을 달래준 애국자'라고 생각해온 것에 대해 배신감이 들었는데요. 


난파의 친일행적으로 인해 수상거부한 작곡가 류재준·소프라노 임선혜

2014~2015 수상자 바이올리니스트 이경선·작곡가 이영조

지난 2013년 국내 최고 권위의 음악상인 난파음악상의 제46대 수상자로 선정된 작곡가 류재준이 "친일 시비에서 자유롭지 못한 음악인의 이름으로 상을 받기 싫다"며 수상을 거부했고, 이어 선정된 소프라노 임선혜마저 수상을 거부해 결국 그해에는 상이 제정된 1968년 이후 처음으로 수상자를 내지 않기로 하며 이슈가 되기도 했었죠. 아직까지 난파기념사업회 홈페이지 내 난파음악상 수상자 명단은 2012년 제45대 수상자인 손열음에서 업데이트가 멈춰있는 걸 보면 상을 주관하는 난파기념사업회의 당시 충격이 상당히 컸었나 봅니다. (이후 2014년 바이올리니스트인 이경선 서울대 음대 교수, 2015년 작곡가 이영조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이사장은 이 상을 기쁘게 받았습니다.)


관련 포스팅

한 음악학도가 바라본 류재준 난파음악상 수상거부 논란과 홍난파


ⓒ배방신문 현창섭 기자

독립기념관 광복의동산 홍난파 홍영후 단국대학교 단국대 난파음악상 친일파 봉선화 모리카와 준

민족문제연구소 천안아산지회는 지난 2월 홍난파 비의 존재를 처음 확인한 후 천안시에 철거 혹은 친일 행적 병기 게시를 요구했습니다. 당시 천안시 도시건설사업소 공원관리과에서는 "우선 비석을 확인해 보고 학계의 의견을 청취한 뒤 철거 혹은 보존 여부를 결정할 사안"이라며 간을 보는 자세를 취했죠. 그런데, 이러한 내용이 크게 이슈가 되지 않자 천안시는 이 문제를 그냥 방치하기로 정합니다. 해당 비석이 민간단체에서 건립을 한건데 어떤 사람이 한 지는 모르기 때문에, 건립 주체가 확인되지 않아 임의로 철거하긴 어렵다는 논리로 말이죠.


그러자 민족문제연구소 천안아산지회에서는 "이는 독립기념관에 기록된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투쟁과 고통에 대한 모독"이라며 홍난파의 친일 행적을 알려 역사 교육의 장으로 삼고자 하는 목적으로 이 비석 앞에 가로 100cm, 세로 80cm 크기의 단죄문을 설치해버렸습니다. 크으...사이다! 단죄문이 설치된 것은 지난 20일 오전 11시 '홍난파 친일 행적 단죄문 설치 및 기자회견' 행사였다고 하네요.


ⓒ배방신문 현창섭 기자

독립기념관 광복의동산 홍난파 홍영후 단국대학교 단국대 난파음악상 친일파 봉선화 모리카와 준

이 단죄문에는 홍난파의 친일행적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단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홍난파(1898~1941) 본명 : 홍영후 창씨명 : 모리카와 준 (森川 潤)

 

1931년 8월 미국에 유학해 이해 12월 미주 흥사단에 가입, 1937년 6월 ‘동우회사건’으로 검거되었다가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37년 11월 자필로 독립운동에 가담한 것을 후회한다는 취지의 ‘사상전향에 관한 논문’을 써 경성지방법원에 제출했다.

 

“사상전향을 결의하고 나의 그릇된 생각과 마음가짐을 바꿔 과거를 청산하고, 금후는 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 본분을 다하고, 온건한 사상과 정당한 시대관찰로써 국가에 대해 충성을 꾀하며, 민중에 대해서는 훌륭한 지도자가 될 것을 맹세하는 바이다.”

 

1938년 6월에는 사상전향자 단체인 대동민우회에 가입하면서 ‘조선민중의 행복은 내선(內鮮) 두 민족을 하나로 하는 대일본 신민이 되어 신동아 건설에 매진함에 있다’는 취지의 ‘전향성명’을 발표했다.

 

1937년 5월 친일문예단체 조선문예회에 위원으로 참여해 활동했다. 1941년 1월 조선음악협회 평의원,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에 각 각 선임되었다. 홍난파가 작곡한 대표적인 친일 음악은 ‘정의의 개가’, ‘공군의 노래’, ‘희망의 아침’ 이다.

 

‘천항폐하의 본부 받들어 팔굉일우로 대 아세아의 대공영권을 건설하여 일장기 날리면서 자자손손 만대의 복누릴 국토......’(이광수 작사. ‘희망의 아침’ 가사중 일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1940면 7월 7일자에 발표한 ‘사변 3주년과 반도문화의 여명- 지나사변(支那事變)과 음악’에서 “우리의 모든 힘과 기량(技倆)을 기울여서 총후국민으로서 음악보국운동에 용왕(勇往) 매진(邁進)할 것을 자기(自期)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라고 주장하여 일제의 침략전쟁을 미화하였다.



단국대학교 죽전캠퍼스 난파음악관 내 난파 홍영후 전시실에 관한 일화


독립기념관 광복의동산 홍난파 홍영후 단국대학교 단국대 난파음악상 친일파 봉선화 모리카와 준

이 단죄문을 보니 하나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제가 졸업한 단국대학교. 단국대학교 음악대학 건물 이름이 바로 난파음악관인데요. 이 난파음악관 1층에는 '난파 홍영후 전시실'이 있습니다. 이 곳에는 단국대가 화성시와 갈등을 빚어가면서까지 지킨 난파 홍영후의 바이올린과 각종 작곡 악보 등 420점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단국대의 한남동 캠퍼스 시절 음대 건물 2층 곳곳에 전시되어 있었던 기억이 나는데, 죽전으로 캠퍼스를 이전한 이후 이걸 아예 전시실을 만들어 배치해 둔 것이죠.


독립기념관 광복의동산 홍난파 홍영후 단국대학교 단국대 난파음악상 친일파 봉선화 모리카와 준

재학 당시 전 이 전시실을 관람해본 이후 어지간히 홍난파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 외에는 모를 수준으로 연표에 넣었을 뿐 홍난파의 친일 행적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어 있지 않다며 스스로를 '민족사학'이라고 칭하는 단국대에 이런 전시실이 왜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철거 내지는 그의 친일행적을 분명히 명시할 것을 주장하는 글을 학교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린 적이 있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우선 음대 교학과장이 절 불러서 그 글을 삭제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회유를 하더군요. 하지만 전 제 소신에 따라 글을 올렸고, 삭제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자신이 해당 전시실 개관을 책임졌다는 사학과 교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저보고 자기보다 홍난파 선생에 대해서 잘 아냐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들려준 이야기는 '유달리 몸이 약했던 홍난파에게 일본 경찰들이 당시 임신 중이던 아내를 들먹이는 등 같은 회유와 협박을 해 어쩔 수 없이 전향을 조건으로 석방됐고, 이후 강제에 못 이겨 '한 두 차례' 일본에 협조하는 글을 써야만 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수의 질문이 가관이었습니다. "자네라면 그 상황에서 변절, 아니 변절이라고 표현하기도 뭐하네만 전향을 안하고 버틸 수 있었을 것 같나?"


난파 홍영후 전시실 개관 테이프 컷팅. 왼쪽에서 3·4번째 장충식 이사장과 장호성 총장 ⓒ단국대학교


뿐만 아니라 해당 교수는 홍난파 '선생'을 친일파로 지목한 민족문제연구소가 약간 사상에 문제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냐며 색깔론까지 제기하더군요. 그러면서 홍난파 선생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것 같으니 언제 한번 찾아오면 많은 자료들을 보여주겠다며 '전시실 내부에 그의 친일 행적으로 지목되는 악보도 있다'고 했습니다. 있으면 뭐합니까. 설명이 되어 있지도 않고 그냥 수많은 악보들 사이에 표기도 안한채 대충 뒤섞여 있는 수준인데. 당시 이러한 모습들을 지켜보며 학교를 다닌 이래 처음으로 단국대가 부끄러워졌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in서울'의 메리트를 팽개치고 제 스스로 수도권 대학이 되었을 때도 그러려니 했는데...백범 김구 선생이 학위수여식에 찾아왔었고, 설립자인 범정 장형 선생이 독립운동가였기 때문에 우리 단국대학교는 민족사학이라고 아무리 외치면 뭐합니까. 그 독립운동가인 범정 장형 선생의 아들인 장충식 이사장과 손자 장호성 총장은 친일파 난파 홍영후의 전시실 개관식에서 테이프 컷팅을 하고 있는데.


단국대학교 음악대학 건물 중심부에 있는 난파 홍영후 동상 ⓒ김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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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십니까. 장호성 총장님. 아니, 좀 더 어른께 이야기해야 하나요. 장충식 이사장님. 난파 홍영후 전시실 앞에, 난파음악관 앞에 단죄문 세우실 생각 없으십니까? 역사에 관심없는 학생들이라면 뭐 그러거나 말거나 할 수도 있는데, 홍난파가 친일파였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저로서는 상당히 부끄러운데 말이죠. 독립운동가의 후손이신 두 분께서는 별 감각이 없으신 것 같네요. 아니면 건물 안쪽 깊숙히 세워두신 홍난파 동상, 그거 저희 음대생들이 '태진아상'이라고 부르는 건데 그거라도 좀 없애시던지요. 민족사학이라고 자칭하는 대학에 친일파의 동상과 전시실은 걸맞지 않은 것 아닙니까? 아무리 대통령이 천황에게 혈서를 써 충성을 맹세한 이의 딸이 대통령을 하고 집권 여당의 대표가 친일파의 후손인 세상이라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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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족정기
    • 2016.03.10 04:59 신고
    맞는 말입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스스로 폐교 결정하였던 평양의 '숭실대학'을 기억한다면 화려하게 썩은 나무를 보물처럼 간직하고자 하는 대학들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단국대학'은 난파 홍영후의 친일적 행위를 알고 있기에 홍난파의 후손들이 기증한 유물들을 간작하고자 음악관에 축소해 놓았습니다. 홍난파상은 기증답례로 세운 동상입니다.우리가 잘아는 가곡 봉선화는 일명 봉숭아라고도 불리는데 일제 강점기에 나라를 잃은 슬픔을 노래한 김형준의 시에 홍난파가 바이올린 선율에 맞춰 곡을 붙인 것으로 가슴을 에는 듯한 슬픈 곡입니다. 나라를 잃은 슬픈 감정을 알기에 알게 모르게 수많은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임신한 아내를 살리고자 변절할 수밖에 없었던 애닯은 사연은 그래서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고려대'나 '연세대' 그리고 ;이화여대'에 세워져 있는 전형적인 친일파 설립자의 전신형 동상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또한 친일파 '배상명', '박인덕'의 이름을 딴 '상명대'나 '인덕대' 또다른 친일파 추계 황신덕의 아호를 딴 '추계예술대' 이밖에 친일파 임영신의 '중앙대', 친일파 조동식의 '동덕여대' 친일파 송금선의 '덕성여대' 친일파 고황경의 '서울여대' 친일파 이숙종의 '성신여대' 친일파 유치진의 '서울예대' 등등 나열하자면 수많은 동상들이 버젓이 교정에 세워져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동작동 국립현충원에도 친일파가 애국자, 독립운동가로 둔갑하여 모셔져 있기에 민족정기 찾기에는 요원하게만 느껴집니다. 아직도 두둔하거나 옹호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남아있는 탓이라 여겨집니다. 70년이 훨씬 넘은 과거에 너무 집착하는 것도 너무 답답하지만 옳고 그름을 명확하게 정리하지 않고 기념, 보존하려는 것도 큰 정신적 혼동이고 장애이기에 아쉽습니다. 하지만 박정희같이 일부는 친일은 하였지만 매몰되지 않고 승화되었기에 경제부흥을 이끌었다는 것만은 인정하고 싶습니다.
    • 장장장
    • 2016.05.09 01:00 신고
    일정때 국내거주한 지도급 인사치고 친일 안한자 없다
    일제의 강압정책 아래 국내 거주자 치고 친일 안할수 없는것이다
    친일 안해도 되는 분위기 아래서 스스로 친일 했다면 문제 된다
    생각없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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