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고구려귀의후' 적힌 황금 인장, 중국 "고구려는 중국의 고대 지방정권"
잊을만하면 등장하는 중국의 '동북공정'을 통한 역사왜곡이 다시 고개를 쳐들었습니다. 1700여년 전 고구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황금 인장이 현지 박물관에 기증된 뒤 중국 관영 매체가 "고구려는 고대 중국의 관할 하에 있던 지방 정부"라는 주장을 재차 내놓았습니다. 중국 신화통신과 중국중앙(CC)TV는 18일 "이날 오전 지린성(省) 장춘시(市)에서 개최된 '2025 국제박물관의 날' 기념행사에서 '진고구려귀의후(晉高句驪歸義侯)'라는 문구가 새겨진 황금 인장이 지린성 지안시박물관에 기증됐다"고 보도했습니다.
논란이 된 황금 인장은 한 현지 기업 회장 부부가 지난달 차이나가디언 홍콩 춘계 경매에서 1079만 7000홍콩달러(한화 약 19억 2800만원)에 낙찰받아 기증한 것입니다. 이를 경매에 내놓은 이는 익명의 일본 소장가로 알려졌죠. 이 유물은 중국 서진(265~316년) 왕조 시기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전체 높이 2.8㎝, 무게 약 88g의 크기로, 손잡이 부분은 말을 형상화한 조각이 덧붙여졌습니다. 도장 면에는 '진고구려귀의후'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중국 언론은 인장에 새겨진 '귀의(歸義)'라는 단어를 '순종'의 의미로, '귀의후(歸義侯)'는 고대 중국 국가가 소수민족 지도자에게 내리던 봉작(칭호)이라고 해석하며 "고구려가 당시 중국 중앙정부에 '신복(臣服·신하로서 임금을 복종함)' 했음을 상징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어 "고구려는 중국 동북부에 있던 '고대 지방정권'으로, 한·위진남북조·당 시대를 거쳐 동북아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서 "진나라 이후 중국 중앙 정부는 관할하에 있는 소수민족 정권 수장에게 인장을 수여하는 전통이 있었다"고 덧붙였죠. 또 "이 인장의 발견은 관련 문헌 기록의 공백을 메워준다"면서 "이는 중국 서진 왕조와 고구려 사이에 어떤 형태의 종속 관계가 존재했음을 증명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왕즈강 지린대 고고학과 교수는 현지 언론에 "이 황금 인장은 서진이 고구려에 대해 책봉을 했다는 실물 증거"라면서 "문헌상에 명확한 기록은 없으나, 이 황금 인장과 과거 출토된 '진고구려솔선(晉高句率善)' 동인(청동 인장)은 고구려가 당시 중원왕조의 영향권 아래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죠. 언급된 '진고구려솔선' 동인은 고구려가 서진과의 교섭 과정에서 받은 외교적 증표로, 국내 학계는 고구려가 독자적 외교 주체로서 서진과 상호 교섭한 결과라고 해석합니다. 반면 중국 학계와 언론은 이 동인이 황금 인장과 마찬가지로 고구려가 서진이 지배하던 소수민족이었다고 주장해 왔죠.
중국은 1990년대부터 고구려의 역사를 자국의 소수민족 지방정권의 역사로 편입하는 왜곡 작업을 추진해왔습니다. 이는 국가적 프로젝트인 '동북공정'을 통해 공식화됐죠. 동북공정은 고구려를 한민족의 독립적 국가가 아니라, 중국 역사 내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으로 기술하며, 대학 교재 등을 통해 이를 활발히 주장해 왔습니다. 지난해 3월 중국 정부가 발간·보급한 대학 교재인 '중화민족 공동체 개론'은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 변방 정권"으로 서술하고, 고구려가 중국 왕조의 책봉을 받았으며 한자 문화를 썼다는 점을 강조해 논란이 됐죠. 또한 고려가 고구려와 발해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고구려와 발해사를 한국사에서 제외하려는 의도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중국은 2016년부터 교과서에서 '고구려' 표기를 삭제했고, 국제 전시에서도 고구려·발해의 건국 연도를 의도적으로 빠뜨리는 등 왜곡을 지속하고 있는 상황.
한국 측 "외교적 형식과 실제 국제 정세 상당한 거리 있어"
하지만 이러한 중국 측 주장과는 달리 한국 사학계에서는 고대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 형식이었던 조공·책봉 관계나 당시 정세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게 중론입니다. 박대재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는 지난 3월 한국고대사학회에 이 인장을 소개하면서 "한(漢)·위(魏) 이래로 중국 중원 정권은 주변 이민족 수장에게 책봉과 함께 관인을 수여하는 외교적 전통이 있었으며, 위·진(晉) 시기에는 주변 이민족에게 ‘국왕인’(군주), ‘귀의왕후인’(내부 지배층), ‘솔선읍군장인’(하위 수장) 등 3등급으로 분류된 관인을 주면서 외교 관계를 맺었다"고 설명했습니다. 박대재 교수는 "지금까지 실물이 전해진 '진고구려' 인장은 3등급 '솔선'들만 있었는데, 진고구려귀의후를 통해 2등급 '귀의후' 인장이 처음 확인된 것"이라고 설명했죠. 다만 박 교수는 "금인(황금 인장)의 수집 경위나 진위 여부는 현재로선 확인할 수 없다"며 "향후 중국에서 관련 연구가 나오기를 기대한다"고 말했습니다.
박 교수는 "중국 일각에서는 인장의 존재를 고구려에 대한 진의 지배를 보여주는 실물 자료로 확대 해석해 보지만, 책봉과 인장의 분급은 동아시아의 오래된 외교적 형식으로 실제 국제 정세와 상당한 거리에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며 "4세기 이후 진은 북방의 오호(五胡)에 의해 판도가 크게 위축된 상태에 있었고, 대외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선비나 오환 및 고구려의 수장에게 금인을 나눠준 것"이라고 짚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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