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기원인 팔라티노 언덕과 치르코 마시모, 을씨년스럽던 포로 로마노

Posted by 자발적한량
2008.11.25 15:06 일상탈출을 꿈꾸며/이탈리아
 고대 로마의 유적지는 팔라티노 언덕, 포로 로마노, 포리 임페리알리 등 세 곳의 유적지로 나뉩니다. 포로 로마노는 기원전 54년, 카이사르가 포룸을 신축하기 이전에 있던 옛 포룸입니다. 이 포로 로마노 뒷편으로는 로마 건국 설화의 발생지인 팔라티노 유적지가 자리잡고 있구요. 이 일대는 고대 로마의 건국 설화에서부터 카이사르와 네로 황제를 거쳐 기독교를 공인하고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4세기 때 황제를 지낸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까지 로마 공화정, 로마 제국 등의 역사의 현장이었던 곳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수많은 전쟁과, 화재 그리고 돌을 얻으려는 무지한 자들의 파괴 행위 등으로 거의 폐허가 되어 있습니다. 이곳을 둘러보는 것은 유럽 역사의 출발점을 보는 것이고 어떤 면에서는 세계사의 출발점을 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현재의 포로 로마노는 기둥과 건물의 기초 부분만 몇 개 남은 사이로 머리 잘린 동상들과 잘려나간 돌덩어리들만 나뒹구는 폐허의 모습입니다. 군데군데 푸른 풀들이 돋아있어 폐허의 분위기는 더욱 을씨년스럽기만 하죠. 하지만 포로 로마노는 로마의 정치, 경제, 문화 모든 것이 결정되고 시행되던 중심지였습니다. 바실리카 식 공회당과 신전, 법원과 시장 등이 공존하던 곳이었고 시민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교통과 의사소통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현재의 포룸 지역은 지형상으로 저지대여서 테베레 강의 범람이나 주위의 여러 언덕에서 흘러온 물로 인해 항상 물이 차 있던 늪지대였습니다. 기원전 750년 당시 이미 주위의 언덕에는 많은 민가들이 들어서 있었는데, 대부분은 농민들이거나 장인들이었고 군인들이 거주했습니다. 따라서 현재의 포룸이 들어서 있는 지역은 한 언덕에서 다른 언덕으로 통하는 길이었고 물물거래 등 상거래가 형성되는 곳이기도 했죠. 자연히 군사 훈련이나 모임 등도 이곳에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포룸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6세기 무렵입니다. 우선 길이 포장되기 시작했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묘가 사라졌으며 언덕만이 아니라 계곡에도 집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이 모든 것을 건축한 사람들은 로마 인들이 아니라 에트루리아 인들이었습니다.


 기원전 509년 마침내 에트루리아 인들을 몰아내고 로마 인들이 정권을 잡기 시작했고 공화정이 시작됩니다. 2ha 정도의 좁은 지역이었던 포룸 역시 급격하게 확장되기 시작합니다. 공화국 시대는 우선 무엇보다도 영토가 확장되던 시기였고 이는 곧 전쟁이 당시 가장 중요한 중대사였음을 의미합니다. 포룸은 이제 전쟁에 나가는 전사들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개선 장군들을 맞이하는 장소가 되어갔습니다. 공공장소로서의 기능 중 포룸의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은 상거래가 이루어지는 시장으로서의 역할이었습니다. 계속되는 승전은 노획물, 공물, 패전국이 바치는 전비 등 엄청난 부를 로마에 가져다 주었습니다. 기원전 3세기부터 로마는 이미 금융이 발달하기 시작해 중요한 금융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포룸은 바로 화폐의 교환, 융자와 투자 등 자본 이동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죠.


 로마 제국이 들어서기 전 5세기 동안 지속된 로마 공화정은 수많은 사건들로 점철된 시간이었습니다. 로마를 움직이는 명사들인 원로원은 쿠리아라는 건물에 모였습니다. 300명의 종신제 의원들로 구성된 원로원은 외교, 군사 작전, 공공의 안녕을 위한 각종 조치들을 마련해 공포하는 등의 일을 했습니다. 쿠리아 앞에는 연설장이 마련되어 있어서 이곳에서 웅변을 하곤 했습니다. 그 옆에는 외국에서 온 사신들이 기다리는 곳이 있었습니다. 기원전 180년경에는 대중들이 실내에서 모일 수 있도록 최초로 바실리카 형태의 공공건물이 지어집니다. 이렇듯 포룸은 로마 정치의 중심지였던 것이죠. 포룸은 또한 종교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공화국 이전부터 많은 신전이 있었지만 공화정 시대에도 이러한 신전 건축은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로마 인들은 갈수록 잔인해져 갔고 종교 역시 점차 사라져갔습니다. 이미 기원전 3세기 중엽부터 포룸에서 검투사끼리 결투를 벌이는 광경이 오락거리가 되어있을 정도니까요. 원로원에서 연설을 하던 이들끼리 싸움이 붙어 한 사람을 살해한 후 그 시체를 태우다 이 불이 원로원과 바실리카까지 옮겨붙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이 때가 기원전 52년으로 이후 권력을 잡은 카이사르는 당시의 포룸이 너무 협소하다고 판단을 하고 북쪽으로 포룸을 확장하게 됩니다.


 카이사르는 포리 임페리알리를 건설하며 포로 로마노를 대대적으로 확장했습니다. 이런 확장은 그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오르는 아우구스투스, 베스파시아누스, 네르바, 트라야누스 시대에도 계속됩니다. 이때부터 포룸에는 중대한 변화가 생깁니다. 다시 말해, 대중들의 집회나 군사 행진 등은 포룸이 아니라 별도로 지어진 연병장에서 거행되었고 포룸에는 서거한 황제를 신격화하기 위한 신전과 업적을 기리는 개선문, 승전탑 등 각종 기념물들이 들어서게 됩니다. 서기 3세기 들어서부터는 더 이상 공간이 없을 정도로 포룸은 각종 기념물과 건물로 포화상태에 달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후 로마에는 유일신을 믿는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가 급속하게 퍼지게 됩니다. 로마 황제들은 처음에는 기독교도들을 박해했지만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이르러 모든 그리스 로마 신들을 위한 신전이 폐쇄됩니다. 이 때부터 로마는 성 베드로의 유해를 간직한 도시로 기독교의 성지이자 총본산으로 전혀 다른 위상을 지니게 되죠.


 교황권이 강화되면서 포로 로마노의 건물들은 예배를 보는 성당으로 전용되거나 아니면 새로 지은 성당 건물의 일부분으로 흡수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로마 시대에는 장방형의 건물 형태를 지칭하는 공공장소에 지나지 않았던 바실리카가 성당을 지칭하는 말이 된 것도 이 때입니다. 물론 이렇게 중세 때 지어진 건물들도 지금은 상당수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12세기부터는 교황과 중세 왕들간의 권력 투쟁이 심각하게 전개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포로 로마노는 교황권을 지키기 위한 요새로 변하게 되어 많은 요새와 망루가 들어서게 되고 포로 로마노의 석재들은 이를 위한 건축 자재로 활용되기도 하는 등 그야말로 폐허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상당수의 교황들은 그들의 거처나 성당을 지으면서 포로 로마노의 옛 건물들을 장식하고 있는 아름다운 조각이나 기둥들을 떼어내 재사용하곤 했습니다. 또 어떤 때는 포로 로마노에 가마를 걸어놓고 귀중한 로마 건물들을 부수어 석회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버림받아온 포로 로마노는 르네상스 초기 이미 거의 파괴된 것은 물론이고 흙으로 덮여 양이나 소를 방목하는 목초지로 전락을 하고 맙니다. 심지어 대리석 수반 같은 귀중한 유물이 소의 여물통으로 쓰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대리석 수반은 후일 수거되어 현재 퀴리날레 광장에 옮겨 놓았다. 포로 로마노가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자처한 독일의 카를 5세가 로마를 침략해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을 때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20만 명이나 들어갔다던 마시모 대전차 경기장, 요즘 지어지는 현대식 경기장의 수용인원도 그것과 비슷한데 그 당시의 20만 명이면 로마시민의 10%에 해당합니다. 지금 현재 로마시민이 300만 명인 것을 감안할 때, 그 당시의 로마의 거대함이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것 같네요.


 약간 높게 언덕으로 되어있고 경사와 계단으로 되어있는 곳이 객석이고 중간의 평평한 부분이 전차들이 경주한 트랙에 해당합니다. 로마의 유일한 강인 테베레강의 잦은 범람으로 7~15m 이상의 퇴적물이 쌓여 있기 때문에 지금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을 것입니다.


 뒤로 보이는 자그마한 구릉지가 바로 로마의 기원인 팔라티노언덕입니다. 팔라티노, 팔라죠, 펠리스로 영어로 궁전의 어원이 되죠. 이곳은 로마의 7개의 언덕들 중에서도 가중 물 긷기가 좋았고 높이도 적당해서 로물루스가 터를 잡았습니다. 처음에 저런 조그마한 언덕에서 시작한 로마가 점점 커져, 기원 후 2세기가 되었을 때에는 전세계 인구의 25%가 로마 시민권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로마의 기원인 이 언덕은 로마의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들의 거주지로 인식되어졌고, 많은 정치가나 부자들이 이곳에 거주하고 싶어 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변호사인 키케로나 명 장군 폼페이우스도 예외가 아니었죠. 우리나라로 따지면 도곡동 타워팰리스 정도라고 생각하면 알맞을 듯 합니다.


 로마는 광장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광장은 건물들 사이에 공개되어 있고, 좁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넓은 공원의 필요성은 언제든지 있었죠. 이 대전차경기장이 발굴되지 않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로마에서 아주 큰 행사를 할 때 공원의 역할을 하는 것이 이곳입니다. 물론 그 이유뿐만 아니라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는 하나의 거대한 유적지이고, 이 때문에 이곳 말고도 발굴하고 복원해야 할 곳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는 것입니다. 발굴에는 시간과 돈이 들게 마련인데, 그에 따른 예산도 없을 뿐더러, 이보다 더 시급하게 발굴과 복원을 기다리는 수많은 유적지가 많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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