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탈출을 꿈꾸며/프랑스

현대 조각의 거장, 로댕 미술관과 콩코드 광장

자발적한량 2009.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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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댕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은 1728년에 세워진 귀족의 저택입니다. 이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다가 비롱 원수가 구입하게 되었고 지금도 비롱 관으로 불리우죠. 이후 수녀원과 교육 시설 등으로 사용되다가 로댕 박물관으로 문을 연 것은 1927년입니다. 오귀스트 로댕은 자신의 작품을 기증해 박물관으로 만든다는 조건 하에 숨을 거둘 때까지 사용하기로 국가와 계약을 하고 실제로도 숨을 거두는 해인 1917년까지 사용했답니다.


 건물 내부에는 로댕의 석고와 대리석 작품들과 함께 엄청난 양의 데생이 전시되고 있고 실외의 정원에는 '지옥의 문'과 같은 대형 청동 조각들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파리 인근 므동에도 로댕 박물관이 있는데, 이곳에는 주로 원형 석고상들과 습작품들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생각하는 사람'이 묘석에 올라가 있는 로댕의 묘도 므동에 있습니다.


 생각하는 사람 앞에서 한 컷..국민 포즈죠 이건 뭐....ㅋㅋ 로댕 박물관 정원에 있는 이 조각 은 너무나 유명해 아이러니하게도 보는 이들이 많지 않습니다. 원래는 대작 '지옥의 문'을 위해 제작된 것이었으나 이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복제되었죠. 가장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은 '왜 옷을 벗고 있는 나체의 형상을 하고 있는가' 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레슬링 선수를 연상시키는 생각하는 사람의 우람한 근육질 체격이구요. 이 두 질문에 대한 답은, 나체와 근육을 함께 생각하면 풀립니다. 다시 말해, 로댕은 유일하게 생각하는 동물인 인간 일반을 표현하기 위해 계층이나 신분, 빈부 등을 나타내는 모든 것을 생략한 것이고, 인간의 생각이 태초부터 이어져 왔다는 메시지 역시 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생각하는 사람'은 최초의 인간이었던 아담일 수도 있습니다. 우람한 근육은 최초의 인간부터 시작된 고뇌, 그 자체를 나타냅니다. '지옥의 문' 위에 올라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인간 군상을 내려다 보던 그 자세, 그 고뇌가 잔뜩 긴장한 근육을 통해 표출된 것이죠.


 1919년 개관한 로댕 미술관은 말년에 로댕이 생전에 거처했던 비롱관. 비롱관은 신앙공동체가 사용하던 건물로서 로댕은 1층 전부와 동측 건물 2층에 입주하고 있었으며 입주자들 중에는 장콕토, 앙리 마티스, 이사도라 덩컨, 릴케가 있었습니다. 말년에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던 로댕은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관을 갖고 싶었고 비롱관이 헐리게 되자 국가에 제안을 하게 됩니다.

‘나의 모든 작품을 국가에 기증한다. 여기에는 석고상, 대리석상, 청동상, 석상, 데생 그리고 예술가와 장인의 교육과 훈련을 위해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수집한 골동품들이 포함된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비롱관에 전시해 이곳을 로댕 박물관으로 정하고 내 여생을 이곳에서 지낼 수 있게 해줄 것을 국가에 요청한다.’

이에 1912년 국가 행정위원회는 로댕의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로댕은 말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미술관 개관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로댕 미술관의 대표작이자 로댕의 필생의 걸작은 '지옥의 문'. 로댕은 이 작품에 30여 년을 매달렸지만 끝내 미완성으로 남겼습니다. 1880년 프랑스정부는 새로 건립하기로 한 장식미술관의 출입문을 로댕에게 의뢰하였습니다. 그때까지 국가나 지방 단체에서 작품을 의뢰받지 못하고 있던 로댕은 동료들 사이에서는 실력을 인정 받아 파리 미술계에 입성을 했죠. 단테를 좋아했던 로댕은 '신곡'에서 영감을 받아 장식 박물관 입구를 지옥의 문으로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시 단테의 '신곡'은 파리 미술계에서 즐겨 찾던 소재였습니다. 단테의 '신곡'은 지옥, 연옥, 천국으로 되어 있는데 로댕은 인간의 고통을 다룬 지옥을 작품의 소재로 택합니다. 단테와 베르길리우스가 지옥을 방문하여 처절한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목격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로댕은 단테의 지옥을 표현하기 위해 데생에만 1년을 매달렸습니다. 하지만 인물들이 현실에서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은 로댕은 작업을 진행하면서 단테의 신곡을 재현하는 것에서 벗어나 사람들의 보편적인 감정을 표현하고자 했고, 끊임없이 수정하고 끊임없이 인물을 끼워 넣었습니다.


 로댕은 '지옥의 문'의 규모가 결정되자 우선 점토로 작게 제작된 186여 개의 작은 조각상들은 다시 석고로 제작되었고, 그 후 형상을 첨가하거나 떼어내는 등 여러 차례의 수정작업을 거쳐 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조각상들은 청동이나 석고, 대리석의 독립상으로도 제작되기도 하였습니다. '지옥의 문'은 2쪽의 패널로 구획되어 있는데 이러한 구성은 기베르티의 피렌체 세례당의 '천국의 문'에서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지옥의 문' 속에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각기 다른 모습의 인간 군상이 한데 얽혀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데 이러한 구성은 네모로 나누어진 청동문의 형식을 무시하고 형상과 문이 한데 얽혀 녹아 흐르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로댕 미술관. 그나마 T군은 정원만 관람을 하여 줄을 서지 않았습니다. 내부까지 관람하려면 한참 기다려야 했을 듯..


 건축가 가브리엘이 루이 15세를 기리기 위해 1753년에서 1763년 사이에 건설된 콩코드 광장은 여러 번 이름을 바꾸게 됩니다. 처음에는 루이 15세 기마상이 세워진 루이 15세 광장이었다가 대혁명 때는 단두대가 놓인 혁명의 광장이었고, 그 후 1795년 이후 지금의 이름인 콩코드 광장으로 불리게 됩니다. '콩코드'라는 말은 조화, 화합을 뜻하는 단어로 프랑스 전체가 하나라는 국민 화합을 다지기 위해 8대 도시를 상징하는 조각들을 파리 한가운데 광장에 갖다 놓게 된 것입니다. 옛날에는 이 조각들 밑에 사람들이 몰래 들어가 살기도 했다고 하네요. 예를 들면 보르도를 상징하는 조각 밑에는 포도주 장수가 들어가 살았는데, 자신의 고향을 상징하는 조각이라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광장에서 개선문을 바라보면 샹젤리제 가가 시작되는 입구 양쪽의 좌대에 두 점의 말 조각이 올라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조각가 기욤 쿠스투(1677~1748)가 조각한 이 조각은 원래는 마를르 궁에 있던 것을 1795년 콩코드 광장으로 옮겨 왔다. 조각의 원본은 공해를 피해 루브르에 소장 중이며 샹젤리제 입구에 세워져 있는 것은 복제품이다. 1950년대 중반 한 사기꾼이 어리숙한 미국인에게 이 조각을 팔아 넘겼다. 계약서까지 작성한 이 미국인은 약속한 날 인부들을 데리고 조각을 떼어내기 위해 콩코드 광장에 도착했다. 이미 사기꾼은 거액을 챙겨 도망간 후였고 경찰의 제지를 받은 미국인은 계약서를 내보였지만, 국가 재산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속은 것을 알았다고 한다.


 광장 한가운데는 이집트왕이 프랑스에 선물한 룩소르의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습니다. 기원전 1300년경 이집트를 통치했던 람세스 2세 때 만들어진 태양신을 숭배하는 이 탑은 높이 23m의 화강암 덩어리로 무게가 무려 230t이나 나갑니다. 당시의 수송 수단으로는 도저히 옮길 수 없는 무게였는데 프랑스 툴롱 항에 도착하는데 25개월이 걸렸고, 그 후 1836년 10월 25일 지금의 위치에 세워지는 데는 3년을 더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결국 5년이 더 걸린 셈인데, 당시의 수송 과정을 오벨리스크 하단에 금박으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양 쪽에 두 개의 분수대가 세워져 있는데, 로마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 있는 분수를 모방해 루이 필립 때 세워졌습니다. 84,000㎡에 달하는 광장 주위에는 각 모서리마다 두 개씩 8개의 여인 조각이 올라가 있는데, 리옹, 보르도, 툴루즈, 마르세유, 브레스트 등 프랑스 8대 도시를 상징합니다.


 콩코드 광장은 혁명 당시 기요탱이라는 외과 의사가 만든 단두대가 설치된 곳으로 유명합니다. 단두대는 크리용 호텔 앞에 설치되었는데,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가 처형되고 이어 단두대는 튈르리 궁의 철책 쪽으로 옮겨져 1794년까지 무려 1,200명이 넘는 왕족, 귀족, 성직자들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도 그 중 한 사람이었고 혁명을 주도했던 인물들인 당통, 로베스피에르 등도 남의 목을 자르던 같은 칼날에 자신의 목을 내주어야 했습니다.


 샹젤리제를 바라보면서 오른쪽으로 루브르 궁을 모방해 지은 두 채의 건물이 보입니다. 오른쪽 건물은 프랑스 해군성이고 그 옆 건물은 크리용 호텔이죠. 두 건물 사이로 보이는 성당이 오페라 가로 이어지는 마들렌느 성당입니다. 콩코드 광장을 건너 마들렌느 성당 맞은 편에 보이는 건물은 부르봉 궁으로 프랑스 하원 의사당입니다. 의사당 앞의 다리는 콩코드 다리로 바스티유 감옥을 헐어서 나온 돌로 지어진 다리입니다. 파리 시민들이 구체제의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을 밟고 다녀야 한다는 취지에서 일부러 그 돌만을 갖다가 썼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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