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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통영국제음악제, 임윤찬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으로 막을 올리다

자발적한량 2025.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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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로 불리는 통영국제음악제가 28일 막을 올렸습니다. 지난 28일 경남 통영의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에서는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TFO) 단원들과 악장인 베를린 필하모닉 소속 바이올리니스트 한드 쿠든이 입장하고, 뒤이어 지휘자 파비앵 가벨이 등장하면서 통영국제음악제 개막공연이 시작됐습니다.

 

처음 울려퍼진 것은 윤이상의 '서곡'. 1973년 작곡된 이 곡은 윤이상의 작품 세계가 동아시아의 사상을 결합한 데서 한국적인 울림을 담아내는 쪽으로 변화할 때 과도기에 있던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곡이 만들어질 당시 윤이상은 1967년 동백림 사건으로 간첩 누명을 쓰고 한국에서 옥고를 치른 뒤 1969년 서독으로 추방된 직후였죠.

 

이러한 배경에 기인해 '서곡'은 음울함이 가득합니다. 현악이 어두운 분위기를 형성하는 가운데 바순, 플루트 등의 관악기, 팀파니 등의 타악기가 가끔 끼어들며 분위기를 유지해나갔는데, 고요하게 시작한 곡은 점점 많은 악기가 합주하며 음을 더해갔지만, 그 음울함을 지우지는 못했죠.

 

'서곡' 다음으로 연주된 것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이 곡은 깊은 우울증에 빠졌던 작곡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가 3년간 작곡 활동을 접었을 정도로 심각한 신경쇠약 증세를 겪던 자신을 치료해준 박사에게 헌정한 곡입니다. 이날 피아노 협연자는 올해 통영국제음악제의 상주 연주자를 맡은 피아니스트 임윤찬. 

 

멀리서 들리던 종소리가 점차 가까이 다가오는 듯한 강렬한 도입부와 오케스트라의 거대한 음향까지도 거뜬히 뚫고 나오는 임윤찬의 명료한 타건은 그야말로 압권이었습니다. 건반을 누르는 깊이와 무게, 페달 움직임, 피아노의 배음과 잔향의 효과를 아주 세밀하게 조율하면서 때론 반짝이는 윤슬 같은 신비로운 형상으로, 때론 묵직하면서도 뜨거운 화염의 움직임으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을 선사하며 1악장을 마쳤죠.

 

2악장에선 과도한 힘이나 꾸며낸 소리 하나 없이 오로지 라흐마니노프가 악보에 써낸 음악적 언어, 견고한 짜임새를 담담히 풀어내면서 작품 본연의 몽환적인 잔상을 그려냈습니다. 임윤찬은 빠르고 힘있게 두 손을 교차하며 고음을 연주하다가도 여리고 섬세한 연주로 관객들에게 라흐마니노프의 짙은 애수와 비애, 깊은 고독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현악을 시작으로 경쾌하고 힘있게 분위기가 전환된 3악장은 서정적인 멜로디도 오가면서 슬픔을 딛고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듯 했습니다. 피아노의 초고난도 기교가 쏟아지는 마지막 악장에서 임윤찬은 집중력과 여유를 잃지 않으면서 무대를 완전히 장악해나갔죠. 전체를 관통하는 긴 호흡을 유지하면서도 날카로운 리듬과 기교 처리는 그야말로 압권이었습니다. 

 

후반부 피아노가 주도적으로 연주 속도를 높이며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구간에선 몸이 뒤로 젖혀질 정도로 강하게 발을 구르면서 광활한 울림을 만들어냈고, 임윤찬이 불러낸 강한 응집력, 휘몰아치는 에너지는 쉬이 숨을 내쉴 수 없어 갈비뼈가 뻐근해질 정도의 압도적 경험을 선사했습니다. 긴 어둠의 터널을 걸어온 라흐마니노프가 마침내 마주한 '희열' 그 자체였죠.

 

연주를 마친 임윤찬은 지휘석에 올라가 격정적이었던 연주의 열기가 남아있는 모습으로 가벨과 뜨겁게 포옹했고, 관객들은 환호성과 기립 박수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임윤찬은 이에 화답하며 앙코르곡으로 리스트의 '순례의 해: 두 번째 해 이탈리아' 중 페트라르카 소네트 104번을 다시금 건반 위에 올려놓았죠.

 

다음으로 연주된 곡은 차이콥스키 '교향곡 4번'. 지휘자 가벨은 긴 호흡으로 시종일관 악구의 흐름을 긴밀히 조율했고, 악단은 통일된 호흡으로 변화하는 악상의 성격을 명료하게 드러냈습니다. 피날레의 순간 광적이면서도 격렬한 음향을 불러내며 드라마틱한 서사를 만들어낸 점도 인상적이었죠.

 

이날 통영국제음악당에는 개막 공연 관람을 위해 문재인 전 대통령과 부인인 김정숙 여사도 모습을 드러내 공연 전 객석에서 환호가 들리기도 했습니다.

 

통영국제음악제는 둘째 날인 29일 또 다른 상주 연주자인 스페인 출신의 첼리스트 파블로 페란데스가 TFO와 함께 프랑스 작곡가 앙리 뒤티외의 첼로 협주곡 '아득히 먼 나라…'를 연주할 예정이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영웅의 생애', 라벨의 '거울' 중 제3곡 '바다 위의 조각배'도 함께 연주될 예정입니다.  

 

또한 파블로 페란데스는 30일 다시 한 번 무대에 올라 피아니스트 선우예권과 함께 브루흐의 '콜 니드라이'를 시작으로 베토벤 첼로 소나타 3번,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 브람스의 첼로 소나타 1번을 들려줄 예정이며, 임윤찬 역시 30일 피아노 리사이틀을 갖고 작곡가 이하느리의 신작 '…라운드 앤드 벨버티-스무드 블렌드…'(…Round and velvety-smooth blend…)와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들려줄 예정입니다.

 

이 외에도 세계 정상급의 현악사중주단으로 꼽히는 벨체아 콰르텟과 에벤 콰르텟은 다음 달 1∼2일 이틀에 걸쳐 협연할 예정이며, '고(古)음악의 거장' 르네 야콥스가 지휘하는 비록(B'Rock) 오케스트라도 다음 달 2일 헨델의 오라토리오 '시간과 깨달음의 승리'로 무대에 오른다. 소프라노 임선혜와 카테리나 카스페로, 카운터테너 폴 피기에, 테너 토마스 워커가 함께 할 예정입니다.

 

올해 '내면으로의 여행'이라는 주제로 열흘간 심금을 울리는 향연을 펼치는 통영국제음악제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을 기리기 위해 2002년부터 그의 고향인 경상남도 통영에서 열리는 음악제입니다. 매년 붐과 가을 두 차례로 나누어 진행되며, 가을 시즌에는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도 함께 진행되죠. 

 

특히 올해는 윤이상 타계 30주년을 맞아 29일 윤이상의 '협주적 단편'과 '밤이여 나뉘어라'가 연주되며, 호소카와 도시오(細川俊夫)의 '드로잉', 황룽 판의 '원인과 결과', 백병동의 '인간이고 싶은 아다지오' 등 윤이상 제자의 작품도 들려줄 예정입니다. 이는 대만의 웨이우잉 국제음악제의 상주단체인 웨이우잉 현대음악 앙상블이 연주할 예정.

 

게다가 올해는 작곡가 피에르 불레즈 탄생 100주년이기도 해서 다음 달 5일 세계적인 현대음악 전문 연주단체 '앙상블 앵테르콩탕포랭'이 불레즈의 '삽입절에' 등을 들려줄 예정. 그 밖에 상주 작곡가인 한스 아브라함센의 '바이올린, 호른, 피아노를 위한 여섯 개의 소품'도 다음 달 3일 아시아에서 처음 연주됩니다.

 

이 밖에 러시아의 스타 바이올리니스트 일리야 그린골츠, 소리꾼 이자람, 피아니스트 선우예권, 소프라노 황수미와 조지아 자먼, 테너 마일스 뮈카넨, 베르비에 페스티벌 체임버 오케스트라, KBS교향악단 등도 무대에 오르는 통영국제음악제는 다음 달 6일 성시연이 지휘하고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브리튼의 '전쟁 레퀴엠'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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