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탈출을 꿈꾸며/일본

[도쿄여행#12] 야스쿠니신사 첫번째 이야기, 반성과 양심을 삼킨 망령의 거처

자발적한량 2016.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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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여행기 첫째날

도쿄여행기 둘째날

도쿄여행기 셋째날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도쿄여행기 연재 중 다른 장소는 글 하나로 끝냈지만, 야스쿠니신사에 대해서는 신사 내 전경과 유슈칸(遊就館)으로 나누어 포스팅합니다. 이는 야스쿠니신사가 빼어난 관광지어서가 아니라, 모든 여행사 패키지에 야스쿠니신사가 포함되어 있지 않고, 자유여행을 가더라도 야스쿠니신사를 방문지에서 빼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야스쿠니신사를 돌아보는 내내 상당히 불쾌하였으나, 직접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그들의 광기어린 과거로의 향수를 확인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마지막으로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야스쿠니신사 합사 문제는 현재 진행형이라는 생각에 도쿄를 방문할 때면 매번 야스쿠니를 향하곤 합니다. 이 포스팅을 보고 한 분이라도 더 야스쿠니 문제에 관심을 갖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한 가지 더, 지난 번 포스팅과 마찬가지로 다시 한번 언급을 해두고자 합니다.

일본어로는 '덴노'라 부르는 일본 천황에 관한 문제인데요. 한국에서 꽤 많은 분들이 천황이라는 호칭을 쓰지 않고 대신 '일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죠. 제가 일본의 군국주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지도, 친일사상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전 '천황'이라는 호칭을 중국의 '천자', 이란의  '샤', 러시아의 '차르'와 같이 하나의 고유명사로 봐야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포스팅 전반에 걸쳐 '일왕'이라는 호칭이 아닌 '천황'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겠음을 미리 고지하고자 합니다.  



고쿄를 갔다가 다음 행선지의 담벼락을 따라 이동하는 중. 발걸음이 무거운 길입니다.



도리이가 보이는 것을 보니 신사라는 추론이 되겠죠. 일반적으로 일본의 민속 신앙인 신토에서 닭을 신의 전령이라고 여기는 것에서 유래를 찾아 '새가 거하는 곳'이라는 한자(鳥居)를 쓰는데요. 우리나라의 홍전문(홍살문)과 비슷한 형태의 이것은 불경한 곳과 신성한 곳을 구분짓는 경계입니다. 이 신사에는 총 3개의 도리이가 있는데, 사진 속 도리이가 '제1도리이(다이이치 도리이)' 혹은 '대도리이(오도리이)'라고 불리며 25m로 가장 큽니다. 1943년에 본래의 도리이는 철거되었다가 1974년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일본인들이 기증하여 다시 지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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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눈에 보일 수 밖에 없는 이 동상은 '일본 근대 군대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오무라 마스지로. 일본 육군 창설자입니다. 존왕양이 운동의 중심지였던 조슈 번 출신으로 사무라이 중심의 군대가 아닌 신분제를 타파한 서구식 군사 이론과 개념으로 군대를 훈련시켜 막부군을 격파하면서 메이지 유신을 성공으로 이끌었죠. 



메이지유신 이후 오무라 야스지로는 결국 기득권을 잃게 된 사무라이들의 습격을 받아 암살됩니다. 사후 만들어진 이 동상은 1893년에 제작된 일본 최초의 서양식 동상이기도 합니다. 일본 육군의 창설자 동상이 있는 신사라...스멀스멀 피와 칼의 기운이 느껴지시나요?



또다시 나타나는 도리이. 그 앞에는 下乗, 이 곳에서부터 차를 타고 갈 수 없는 곳입니다. 그 뒤로는 15.5m의 제2도리이(다이니 도리이)가 보이네요. 에도막부 시대 번국들에게서 받은 대포를 녹여 '오사카 포병공창'에서 1887년 제조된 청동 재질의 도리이입니다. 옆쪽으로는 이 곳의 영령들을 만나기 전에 몸을 정결하게 하라는 의미로 손과 입을 씻는 전각인 미타라시가 마련되어 있구요. 1940년 미국에 사는 일본인들이 기증한 것인데...군국주의에 찌든 정신부터 정결하게 해야할 것 같습니다만...당연히 전 씻고 들어갈 이유가 없겠죠.



전국 각지에서 봉물로 헌납된 사케 항아리들이 가득합니다. 일본의 신사 혹은 신궁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입니다. '우리꺼 제사용 술로 써주세요~' 죠 뭐.



국화문장(菊花紋章, 기쿠카몬쇼). 국화문(기쿠몬)으로 줄여 부르기도 하는 이 문장의 정식 명칭은 십육변팔중표국문(十六弁八重表菊紋)으로 일본 황실을 상징합니다. 가마쿠라 막부 시대의 일본 제82대 고토바 천황이 국화를 좋아해 자신의 징표로 사용한 이후 천황과 일본황실의 상징으로 굳어졌는데요. 현재는 일본 여권 표지에도 이 문장이 그려져 있죠.


이 곳 야스쿠니신사에 황실의 문장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일본 민족신앙의 시설인 신사에는 관폐대사, 관폐중사, 관폐소사, 별격관폐사, 국폐대사, 국폐중사, 국폐소사, 부사, 현사, 향사, 촌사, 무격사로 나뉘는 등급이 존재하는데, 이 야스쿠니신사는 천황의 조상신이나 황족을 모시는 신사 바로 다음으로 천황에게 충성을 다한 신하들을 모시는 별격관폐사에 속하는 곳이기 때문이죠. 일본정부가 야스쿠니신사 관련 문제가 불거져 나올 때마다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우며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이 떨어지는지 알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기쿠몬이 달려있는 신문(神門, 미카도)은 수령이 1천 년도 넘은 대만의 전나무를 베어 1934년 만든 것입니다. 대만 역시 당시에는 일본의 식민지였죠.



자, 이곳에서부터는 황족까지도 탈 것에서 내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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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눈에 가장 익숙한, 야스쿠니신사의 배전(拜殿, 하이덴)이 보입니다. 배전 앞에 있는 제3도리이는 2006년에 다시 만들어진 것으로 사이타마현에서 자란 노송으로 만들었습니다. 중문도리이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이 배전에서부터가 야스쿠니신사의 참배시설입니다. 1901년 만들어진 배전은 방문객들이 참배하는 공간이구요. 그 뒤에는 이곳 야스쿠니의 영령들이 깃든 신체(神體)를 보관한다는 본전(本殿, 혼덴)이 있는데, 일반인에겐 공개가 되지 않고 총리나 도지사 등을 비롯한 정치인 등이 참배를 하는 곳입니다. 1872년 세워진 본전의 뒤에 있는 영새부봉안전에는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영혼들의 이름이 적힌 영새부가 보관된 곳으로 역시 일반인에겐 공개되지 않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영새부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를.. 영새부는 후생노동성에서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될 대상자들의 명단인 '제신명표'를 보내오면, 이를 적어두는 명부를 말합니다. (후생노동성이 합사에 관여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2012년으로, 이전까지는 '합사는 전적으로 신사 측의 결정'이라는 것이 일본정부의 공식 입장이었습니다) 이 영새부를 야스쿠니신사의 신체인 거울과 칼에 비춰 이것들에 죽은 이들의 영혼이 깃든다고 믿는 것이 합사의 과정이지요. 이 명부에 적힌 이름이 246만 명을 넘는데요. 


문제는 합사자 중 2만1천여 명에 달하는 조선인들이 이 곳에 합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당시 조선과 일본은 하나였다는 논리에 의해서... 더군다나 이 곳에는 도조 히데키와 같은 A급 전범 14명도 합사가 되어 있습니다. 통탄할 노릇이죠. 이 조선인들의 유족들은 수 차례에 걸쳐 영새부에서 제외해 줄 것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지만, 일본 정부는 '합사는 정부가 관여하지 않고 신사 측이 결정한 것'이라는 정교분리 논리로, 야스쿠니신사는 '이미 영혼이 합쳐져 일본의 신이 되었기 때문에 다시 떼어낼 수 없다'는 해괴망측한 논리로 분리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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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늦었지만 이 야스쿠니신사의 역사에 대해 잠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려면 간단히 일본의 당시 상황을 알아야 하는데요. 에도막부 말기 천황지지세력 이른바 존왕양이론자들과 바쿠후(막부) 지지세력으로 나뉘어 싸우던 중 안세이 대옥(安政の大獄, 안세이 다이고쿠)이 일어나 존왕양이론자들이 숙청당합니다. 이후 이들에 대한 명예회복운동이 일어나 교토에서 거행된 초혼제를 계기로 전국에서 초혼사가 건립되기 시작하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869년 6월 29일 건립된 도쿄 초혼사(招魂社, 쇼콘샤)가 바로 야스쿠니신사의 전신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설립 배경이 표면적인 기만이며 실제로는 존왕양이파의 거점인 조슈 번의 전사자들의 넋을 달래고 신으로 승격시킨 행사를 수도로 옮긴 것이라는 주장 또한 상당한 설득력을 갖습니다.


도쿄 초혼사의 건립은 천황의 지시에 의해 훗날 육해군성이 되는 군무관이 실행했으며, 천황은 운영비로 1만 석의 농토를 하사합니다. 메이지천황의 신정부군과 막부군의 내전 속에서 전사한 정부군측 사망자(3,588명)들을 위한 제1회 합동 초혼제가 거행되었을 때 피아 구분 없이 혼령을 위로하던 일본의 전통과 달리 정부군 사망자만을 대상으로 했죠. 이후 1877년 세이난 전쟁에서 전사한 정부군측 사망자(6,665명)에 대한 제사를 치르면서 합사를 하면서 제신의 수가 늘어난다는 야스쿠니신사만의 특수한 전통이 확립됐죠.



이 무렵인 1879년 쇼콘샤라는 이름은 메이지천황에 의해 '나라를 안정케 한다'는 야스쿠니(靖國)로 개칭됩니다. 별격관폐사의 지위가 부여됐으며, 천황을 상징하는 국화문장을 사용할 수 있게 됐죠. 다른 신사들은 내무성 관할이었지만 야스쿠니신사는 육해군성의 관할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야스쿠니신사는 천황가의 조상신이인 태양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모시는 신토 내 최고 지위의 이세신궁과 더불어 일본에서 가장 중요한 신사로 여겨지게 됩니다.


이후 야스쿠니신사에는 청일전쟁을 비롯해 러일전쟁, 태평양전쟁의 전사자들이 합사됩니다. 전쟁의 광기에 사로잡힌 일본 제국주의 시대 속에서 야스쿠니는 전사자에 대한 추모 뿐 아니라 신사를 천황제 대한 절대적인 충성과 군국주의 전파 및 확립에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죠.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이 '죽어서 야스쿠니에서 만나자'고 외친 것에서 알 수 있듯 야스쿠니신사는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이 신으로 거듭나는 군국주의의 상징적 장소였습니다. 


야스쿠니신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이후 연합군에 의해 국가기관으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인 종교시설이 되었지만, 이후에도 합사 권한을 일부 이양받은 후생노동성은 유족들의 동의도 없이 200여만 명의 전몰자들을 합사시켰고,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2만1천여 명의 조선인, 심지어는 생존한 사람들까지도 합사를 하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1978년엔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A급 전범들이 합사되기도 했죠. 이 모두가 '일본을 수호하는 신'이라는 존재가 되어.


참, 야스쿠니신사의 규모는 8만여개 일본 신사중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9만3,00여㎡입니다. 



여느 신사와 마찬가지로 부적인 오마모리를 판매하는 것을 비롯해 오미쿠지(운세쪽지)를 판매합니다. 1년 운세가 적힌 오미쿠지를 뽑은 뒤 흉한 것이 나오면 새끼줄에 매달아 액을 막습니다. 물론 단 한푼도 야스쿠니에서 쓸 이유가 없지만요.



야스쿠니신사에 봉납된 사케들의 브랜드 전시회. 



이건 2012년(헤이세이24년) 여름에 도쿄에 갔을 때 찍은 사진인데요. 헤이세이(평성)는 제125대 아키히토 천황이 즉위하면서 사용하게 된 연호죠.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바로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 제2차세계대전 중 동아시아 지역에서 벌어진 태평양전쟁을 부르는 일본식 표현입니다. 아시아를 식민지로 만들려는 서구에 대항하여 아시아의 해방을 위해 아시아를 대표하는 일본이 싸운다는 명목의 대동아공영권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침략전쟁을 합리화하기 위한 명칭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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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 경내를 돌아다니면 몇가지 동상들이 눈에 띕니다. 먼저 군견위령탑. 일본군 병사들에게 사랑받던 독일산 셰퍼드의 동상으로 1992년 봉납되었구요. 전몰마동상은 실물 크기의 동상으로 전쟁에 쓰였던 군마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1958년 봉납되었습니다. 지구본 위에 날개를 편 비둘기 동상 이름은 구혼탑인데, 전령 역할을 수행한 비둘기를 기리기 위해 1982년 봉납된 것입니다.



어머니상. 1974년 완성된 것으로 전쟁이 이어지던 시절 외로움과 고난에 맞서 자녀들을 키워낸 당시의 미망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헌정된 동상입니다.



이 기념비의 주인공은 Dr.팔, 정확히는 라다 비노드 팔(Radha Binod Pal) 판사입니다. 그는 일명 '도쿄재판'이라고 불린 극동국제군사재판의 인도대표판사였는데요. 재판관들 중 유일하게 전범들에 대해 전원 무죄를 주장했다 하여 이렇게 기념비를 세워준 것입니다. 당시 도쿄재판에서 심리 도중 사망한 1명과 정신이상을 일으킨 1명을 제외하고 25명 전원이 유죄판결을 받은바 있죠. 팔 박사는 무슨 생각으로 무죄를 주장했을까요? 뭐 덕분에 야스쿠니에 이렇게 기념비까지 세워져서 참 좋겠습니다. 엄청 좋겠네. 엄청. 확 그냥.



흡연구역. 불 안나나요? 확...



구멍 뚫린 철모와 반합, 각종 군용품들. 



호국 해방함 조각상. 그 뒤로는 전쟁 중 바다에 수장된 함선들의 이름 혹은 호수가 적혀있습니다.



1854년 이즈반도에 정박해있던 러시아군함 디아나호가 대지진의 여파로 인해 좌초되었을 때 살아남은 승무원들이 막부에 도움을 청해 겨우 귀국한 적이 있었습니다. 후에 러시아정부가 감사의 표시로 디아나호의 30파운드 선박용 캐논포 52개를 일본에 선물했는데, 이 것이 그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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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본 정말...어처구니 없음을 떠나서 분통이 터지던 동상. 바로 가미카제 특공대의 동상입니다. '특공용사지상(特攻勇士之像)'이라고 명명된 동상인데...그 앞에 있는 비석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특공용사를 칭송함


전국이 점점 악화된 대동아전쟁 말기, 육군 항공 니시오 소좌 이하 1,344명, 의례공정대 오오야마 소좌 이하 88명, 전차대 니와 준위 이하 9명, 해상정진전대 오카베 소좌 이하 266명, 해군 항공 세키 대위 이하 2,514명, 특수잠항정 이와사 대위 이하 436명, 카이텐 가미벳푸 대위 이하 104명, 운양 이시카와 대위 이하 1,082명, 합계 5,843명의 육해군인은 과감히 떨치고 일어나 적함선 등에 돌입, 산화되어 오늘날 평화와 번영을 누리는 우리 일본의 주춧돌이 되었다.

그 숭고한 순국의 정신은 국민 모두가 추도하여 영구히 계승해 나갈 것이다.


헤이세이17년(2005) 6월 28일

재단법인 특공대전몰자위령평화기념협회


아무래도 평화(平和)가 뭔지 잘 모르나 봅니다. 여러분은 여기까지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야스쿠니신사가 일반적인 신사와 별다를바 없게 느껴지시나요? 야스쿠니신사는 말이 신사지 우리나라의 국립현충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일제가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웠듯 정교분리를 내세우며 눈가리고 아웅하는 격이죠. 그들은 강제로 징병당한 조선인에 대해서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피해보상을 거부하면서 합사 취소에 대해서는 '이미 하나로 합쳐진 일본의 신'이라는 말도 안되는 논리를 펼치고 있습니다. 강제로 합사당한 이들에게 있어서는 아직도 대한 독립은 이루어지지 않은 셈입니다. 아베 총리가 집권한 이후 극명하게 우경화되고 있는 일본사회. 이제는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것이 뭐가 문제냐고 되려 큰소리를 치고 있죠? 다음 편에서 이어지는 유슈칸 이야기를 보면...더욱 가관이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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