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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고의 미녀 정윤희, 남편 조규영 씨와의 간통 사건에서 아들의 사망까지

자발적한량 2018.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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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최고의 미모' 찬사 받던 여배우, 정윤희



배우 김수로가 JTBC '냉장고를 부탁해'에 출연해 대한민국 3대 미인으로 정윤희, 김성령, 손예진을 꼽으며 정윤희에 대한 네티즌들의 관심이 쏠렸습니다. 과거 KBS2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출연했던 박진영 역시 "수지를 처음 보는 순간 정윤희가 떠올랐다"고 언급했던 정윤희. 한때 배우 수애가 '제2의 정윤희'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구요. 흔히들 70년대 트로이카로 정윤희·유지인·장미희를 꼽지만, 많은 중년 네티즌들은 정윤희야말로 '단군 이래 최고의 미녀'였다며 정윤희를 한껏 추켜세우고 있죠.



1954년 경상남도 충무(현재의 통영)에서 태어난 정윤희는 1975년 영화 '욕망'으로 데뷔한 이후 박동명 사건으로 추락한 강경희와 양정화 대신 영화 '청춘극장'의 주연, 해태제과의 전속모델이 되며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77년 장미희와 함께 드라마 '청실홍실'의 주연으로 출연하며 스타로 급부상했죠.1978년 당시 유행이었던 호스티스 소재의 영화 '나는 77번 아가씨'의 주연을 맡아 흥행 성공을 이끌었고, 1979년 한 해에만 '죽음보다 깊은 잠' '도시의 사냥꾼' '가을비 우산속에' '꽃순이를 아시나요' 등 무려 4편의 영화를 성공시키며  여배우 트로이카로 자리매김했죠.



하지만 완벽한 미모의 정윤희에게도 한 가지 흠이 있었으니 바로 연기력. 연기력으로 주목받던 장미희에 비해 부족한 연기력으로 인해 '말뚝'이라는 굴욕적인 별명이 붙기도 했었고, 감독들은 정윤희의 미모와 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써야 한다고 하소연을 하기도 했죠. 하지만 1980년 이두용 감독의 영화 '최후의 증인'과 이듬해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에서 일취월장한 연기력을 보여준 정윤희는 1980년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와 1981년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를 통해 2년 연속 대종상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차지하며 배우로서 완벽하게 자리매김합니다.



당시 정윤희의 인기는 국내를 뛰어넘어 해외로까지 뻗어나갔는데요. 일본에서는 정윤희를 두고 '아시아 최고의 미모'라고 찬사를 쏟아냈고, 영화 시상식 참석을 위해 대만을 방문했을 때는 현지 기자들이 몰려 공항이 마비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배우 성룡이 정윤희의 열렬한 팬을 자처하며 이상형으로 정윤희를 꼽아 스캔들이 나기도 했죠. 요즘과 같이 한류 열풍이 불었던 것도 아닌 시기에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인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정윤희 조규영 간통 사건, 하지만 이조차도 영화 같았던 러브 스토리로



이렇듯 영화와 드라마, CF 모두에서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정윤희가 한국 사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킨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1984년 정윤희 조규영 간통 사건입니다. 사건 당시 조규영 씨는 중앙산업개발 전무 이사로 정윤희보다 8살 연상인 유부남이었습니다. 1982년 결혼해 부인 박모 씨와의 사이에 두 살된 딸과 4개월된 아들도 있었죠. 그런데 1984년 8월 18일 새벽 3시경, 정윤희의 집인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109동 1302호에서 정윤희와 조규영 두 사람이 함께 잠을 자다 조씨의 부인 박모 씨를 비롯한 처가 식구들이 들이닥쳐 현장에서 연행되고 구속되죠.




하지만 당시 양측의 주장이 엇갈렸습니다. 조규영 씨의 부인 박모 씨는 남편이 1983년 4월부터 정윤희와 만나왔으며, 도쿄와 괌 등을 함께 여행했다고 주장하며 두 사람을 간통죄로 고소했습니다. 이에 비해 조규영 씨는 박모 씨와의 불화로 1983년 10월부터 별거 중인 상태에서 친지의 소개로 정윤희를 알게 되었고 이혼 절차를 밟고 있는 상태라고 주장했죠.



하지만 간통죄는 완벽한 그 현장 증거를 잡아야 성립이 되는데, 두 사람은 정윤희의 집에 함께 잠옷 차림으로 있긴 했지만 가정부, 매니저, 조카, 운전사 등이 함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수사 기법이 발전하지 못해 DNA 증거 확보도 불가능했었구요. 이러한 상황에서 조규영 씨는 "당초 박모 씨가 7억원의 위자료를 요구했다가 합의가 이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고소한 것"이라고 주장을 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박모 씨는 곧바로 합의를 하고 고소를 취하해 두 사람은 5일만에 유치장을 나오게 되었죠.




당시 기사를 통해 알려진 합의 조건은 박모 씨가 두 자녀를 기르는 조건으로 해서 양육비와 위자료조로 1억원을 받기로 했다고 하는데, 정작 이 두 자녀를 모두 기른 것은 정윤희였습니다. 사건 초반 정윤희를 가정 파괴범으로 비난했던 여론도 점차 수그러들어 일각에선 정윤희에 대한 동정 여론이 나오기도 했죠. 하지만 이로 인해 정윤희는 방송국들로부터 출연금지 조치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정말 운명이었던 것일까요. 정윤희와 조규영 씨는 바로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강남 목화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오히려 간통 사건이 두 사람을 합법적인 부부로 맺어준 계기가 된 것이죠. 그리고 동시에 정윤희는 은퇴를 선택하며 연예계에서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정윤희가 컴백을 한다는 루머가 퍼진 적도 있고, XTM 공개구혼 프로젝트 '新 데릴사위'에 출연했던 민채린이 정윤희의 딸이 아니냐는 얘기가 돌기도 했었죠. 




은퇴 후 정윤희가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던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1988년 7월 14일에 열린 '스타의 광장' 행사에서 배우 이대근, 이영하, 강수연 등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과, 1993년 조규영 씨가 운영하던 하이츠가구의 신문CF 모델로 등장했던 것을 비롯해 2001년 7월4일 한국영상자료원이 주최한 '정윤희 영화주간' 행사에 큰 딸 조윤경 양과 막내아들 조용민 군을 동반한 채 깜짝 외출을 했던 것 정도가 전부죠.



안타까웠던 정윤희 막내아들의 사망 소식과 최근 근황



이혼설, 재혼설 등 잊혀질 만 하면 루머가 등장하던 것도 잠시, 서서히 대중들의 머릿 속에서 지워져 가던 2011년 어느 날, 정윤희에 대한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조규영 씨와의 결혼 5년 만에 낳은 친아들 조용민 군이 사망한 것. 중학교 1학년 때 서울대 과학영재센터에 합격하고, 이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LA의 명문 사립고교인 하버드 웨스트레익을 졸업한 뒤 인디애나 주립대를 거쳐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USC)을 다니던 아들 조용민 군은 친구들과 파티를 열고 술을 마시던 중 급성폐렴 증세를 일으켜 숨졌습니다. 부검 결과 사망 원인이 약물 중독으로 밝혀졌는데, 당시 불과 22살이었죠. 게다가 남편 조규영 씨가 회장이 되어 이끌던 중앙건설도 2010년 워크아웃에 들어간 데 이어 2014년 법정관리를 신청하면서 조규영 씨 소유의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와 경기도 고양시 소재 토지 등이 경매에 부쳐지기도 했습니다.




2013년 TV조선의 '뉴스쇼 판'에서 72시간을 기다린 끝에 정윤희의 근황을 단독 보도했던 적이 있습니다. 짧게 담긴 영상 속에서 소탈한 복장과 단정한 차림을 하고 있던 정윤희는 자신의 차를 몰고 어디론가 사라졌는데요. 이웃주민들은 "하고 다니는 거 보면 놀란다. 지금은 '어머 저 이가 배우랜다' 이럴 정도로 소박하다"며 최근 모습을 전하기도 했었죠.



비록 많은 세월이 흘러 수 많은 여배우들이 나타났다 사라졌지만, 아직도 그 시대를 살았던 대중들의 머릿 속엔 여전히 정윤희가 자리잡고 있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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