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의 육성철씨가 쓴 책 <세상을 향해 어퍼컷>에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집단, 지자체, 군대, 혹은 국가를 상대로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든 무기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권리다. 맨손에 ‘인권’이라는 무기 하나만을 든 채로 이들은 힘 센 조직과 맞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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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증 뇌성마비 장애인 송인호씨
발가락으로 학교를 바꾸다
영주 제일고등학교 1학년7반 교실의 뒷자리에는 컴퓨터가 놓인 책상이 있다. 송인호씨(34)의 지정석이다.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인 인호씨는 수업에 컴퓨터를 이용한다. 비장애인과 다른 점이라면 손가락 대신 발가락을 쓴다는 것이다. 마디마다 힘을 줘서 한자 한자 겨우 찍어내는 인호씨의 발가락은 보기에 힘겨워 보이지만 대단한 발가락이다. 그의 발가락이 써내려간 글은 작은 고장 영주에 신선한 충격을 가져왔다.
인호씨가 태어난 뒤 백일 때 받은 검진에서 처음 이상이 발견되었지만, 인호씨의 아버지는 그것이 뇌성마비라는 사실을 2년 뒤에 알게 되었다. 인호씨의 아버지는 “없는 형편에 신경을 써주지 못하고 방치한 것이 아쉽다”라며 안타까워했다.
집밖조차 나가기 어려워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했던 인호씨의 삶을 바꾼 것은 우연히 얻은 컴퓨터 한 대였다. 발가락을 이용해 인터넷을 하고 글자를 써내려가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난 인호씨는 학교에 가고 싶었다. 복지관의 도움을 얻어 초등학교를 검정고시로 패스하고 서른한 살의 늦은 나이에 입학한 중학교는, 휠체어에 의지하는 인호씨에게 실망스러운 곳이었다. 입학식 날, 인호씨가 발가락으로 국가인권위원회에 올린 글 하나는 영주중학교가 장애인 시설을 갖춘 학교로 다시 태어나도록 했다. 인호씨 하나를 위해 도교육청의 지원이 이루어졌고, 영주중은 1억7천여 만원의 예산을 들여 엘리베이터와 이동 통로 공사 등을 할 수 있었다.
인호씨가 지금 다니는 영주 제일고등학교에는 지역 내에서 유일하게 장애 학생들을 위한 특수학급이 있다. 하지만 휠체어를 이용해 등교하는 학생은 인호씨가 처음이었다. 이세호 교감(영주 제일고)은 “인호가 영주중학교에 있을 때 인권위에 교육권과 이동권의 보장에 관해 문제제기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인호는 이미 지역 내에서 유명 인사였다. 인호가 들어올 것이라는 말을 듣고 입학하기 전에 모든 준비를 마무리하기로 결정했다”라고 말했다.
영주 제일고는 도교육청의 지원을 받아 인호씨를 위해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건물에 쉽게 드나들도록 1층의 한쪽 벽면을 뚫어 휠체어 길을 만들었다. 학교측은 지대가 높은 쪽으로 자주 올라가는 인호씨의 안전을 위해 가드레일도 설치할 계획이다.
인호씨는 대학 진학을 꿈꾸고 있다. 이미 전공도 정했다. 특수학급 담임인 신명희씨는 “인호가 컴퓨터를 이용하는 그래픽디자이너가 되고 싶어한다”라고 귀띔해줬다. 인호씨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비장애인 학생과 함께 온종일 수업을 받고 있다. 다른 장애 학생들의 경우에는 오전 시간만 비장애인 학생과 함께 공부를 한다. 현재의 학교에 만족하냐는 질문에 인호씨는 대답 대신 ‘씨익~’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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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YMCA 성차별철폐회원연대 김성희 위원장
“양성 평등, 내가 속한 단체부터 시작…”
”군사 독재 시절에 빛과 소금이 되었던 단체가 내부적인 모순을 정화하지 못하고 도그마가 되었다.” 서울 YMCA 성차별철폐회원연대의 김성희 위원장(45)이 평가하는 서울 YMCA의 모습이다. 서울 YMCA는 ‘2년 연속 회비를 낸 세례교인으로 만 20세 이상인 정회원에게 총회 구성원 자격을 준다’라고 헌장에 명시했지만, 여성 회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김위원장은 대학 시절 처음 연을 맺었으니 햇수로만 25년이 넘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서울 YMCA는 고인 물이 되어버렸다. 회원의 70% 이상이 여성이고 각종 활동에서 여성 회원의 지원이 90%에 이르지만, 간사급 이상의 의사 결정 라인에 여성의 비율은 매우 미미하다. 다른 지역 YMCA에서는 여성 이사장도 나오지만 서울 YMCA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다.
김위원장은 싸우기로 결심했다. 총회에 수차례 가처분 신청을 냈지만, 남성들만이 모인 자리에서 김위원장의 안건은 기각되거나 부결되었다. 얻은 것은 한국 YMCA 연맹에서 서울 YMCA를 제명시킨 결정이 유일하다.
“이제 저와는 무관한 단체죠.” 김위원장은 YMCA에 쏟았던 노력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중이다. ‘넘어서’라는 단체를 4년째 하면서 YMCA에서 할 수 없었던 풀뿌리 NGO 운동을 진행 중이고, 어린이집 원장인 본업을 통해 아이들에게 좋은 싹을 틔워주기 위해 노력 중이다. 인권 감수성을 길러주기 위해서다.
비록 무관하다고 말하지만 김위원장과 서울 YMCA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다. 김위원장은 “서울 YMCA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CEDAW(유엔여성차별협약) 조약을 통해 유엔에 이 문제를 제소하려고 생각하는 중이다”라고 향후 계획을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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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철도공사 이용석씨
지하철역에서 ‘배려’를 건축하다
이용석씨(36·도시철도공사 건축팀)는 부끄러워했다. 자신이 한 일은 단지 ‘일일’ 뿐이라며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 대단하지 않은 일을 살펴보자. 3천만원의 예산으로 지은 서울 이수역의 문화 공간은 노인들에게 좋은 휴식처이고, 90%가 넘는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다. 5호선 여의도역에는 처음으로 장애인의 인권을 고려해 화장실을 남성용과 여성용으로 분리했다. 세심함이 군데군데 묻어난다. 이씨가 가장 어려워하는 것은 장애인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다. “펜스 높이나 규격들은 규정으로 정해져 있다. 하지만 내 나름대로 생각해서 반영한 것이 현실과 안 맞을 때가 많다. 한 번은 장애인 화장실 내에 세면대를 크게 만들었는데 그것이 휠체어가 도는 데 방해가 된다고 고객에게 지적받은 적도 있다.” 장애인 단체와 지속적으로 연락해 작은 부분까지도 자문을 하는 이유다.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 공사는 장애인과 노인들에게 필수적이다. 다만 과거에 설치된 역사의 경우 수직 이동선이 고려되지 않은 곳이 많아 수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거여역이나 마천역은 주변에 장애인이나 노약자 시설이 많다. 하지만 처음에 그런 것이 고려되지 않아서 역이 삐뚤게 건설되어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수직 이동선을 찾느라 고생했다. 겨우 한 군데를 찾아내서 현재 공사를 추진 중이다.”
한 번은 준공이 끝난 엘리베이터가 잘 작동하는지 찾아간 곳에서 한 노인이 “여기서 30년을 살았는데 이제야 지하철 직원을 부르지 않고서 내려갈 수 있게 되었다”라며 엉덩이를 토닥여주었다. 이씨는 “공부하고 고민했는데, 그렇게 칭찬해주시니까 앞으로도 더 노력할 것 같다”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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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청소부 김순자씨
‘살 만한 일터’로 바꾼 아줌마들의 힘
한달 월급이 70만2천원인 울산지역의 한 대학교 청소부 아줌마가 있었다. 식대도 안 나왔고, 연장 근무에 대한 보상도 없었다. 생리 휴가도 쓸 수 없었다. 정규직보다 근무 시간도 길었다. 비정규직이 무엇인지, 노조가 무엇인지도 잘 몰랐던 김순자씨에게 대학과 용역업체의 횡포는 ‘더럽고 치사한 짓’이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횡포가 극에 달하자 김씨는 동료들을 모아 지난 2006년 6월13일에 노조를 결성하고 근무 시간 보장, 생리휴가 실시, 식사권 요구 등 너무나 상식적인 것들을 얻기 위해 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 2007년 1월 김씨를 비롯한 노조원들은 해고 통보를 받았다. 관리업체의 횡포에 맞서서 아줌마들도 싸웠다. 탈의실에서 점거 농성을 벌이다 직원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쫓겨난 후에는 본관 앞에 텐트를 쳤다.
김순자씨는 어려운 싸움 속에서도 얻은 것이 있다고 했다. “싸우는 동안 딴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우리를 위해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새우잠을 자며 도와주는 외부 사람들을 보면서 참 살아볼 만한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지난 5월9일 대학측은 아줌마들의 고용을 보장하고 체불 임금도 주겠다는 합의서를 썼다. “이 싸움을 통해 나 자신이 당당해질 수 있었다”라고 말하는 김순자씨는 자신이 받았던 도움을 되돌려주기 위해 비정규직 문제가 있는 사업장이면 오늘도 달려간다. 김씨가 애지중지하는 수첩 속에는 자신이 해주고 싶은 말과 그곳에서 들은 이야기들이 빼곡히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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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발 제한 규정’ 바꾼 이태준씨
“사람답게 사는 일, 직접 나서야”
지난 2005년 3월, 서울의 ㅅ고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태준씨(22)는 순식간에 학교에서 유명인이 되었다. 학교의 두발 단속이 학생들의 인권을 침해한다는 내용의 진정서를 인권위에 접수시키면서 학교가 발칵 뒤집혔기 때문이다. 교육적인 면에서 도움이 된다면 두발 단속도 당연하다는 학교측의 논리가 그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씨의 진정이 과연 어떤 효과를 가져다주었을까? “ㅅ고에서 요즘은 그때처럼 무지막지하게 자르지는 않는 것 같아요. 단속은 여전히 있지만 처벌은 완화된 것 같더라고요.” 이씨는 “다른 사람이 하겠지 하며 미루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런 사람들로 가득했다면 우리 사회가 변할 수 있었겠냐”라고 반문했다. 역사를 좋아해 어렸을 때부터 즐겨본 우리 근·현대사와 관련된 책들 속에서 우리 사회의 문제를 보았고, 그때 반골 기질이 길러진 것이 아닌가 스스로 짐작했다. 최근에 있었던 촛불 시위에도 자주 참가했다. 부모님은 걱정했지만 개인이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사회의 변화도 없다는 사실을, 이씨는 이미 고등학교 때 두발 단속 사건을 통해서 배웠다.
그가 생각하는 인권은 무엇일까? “사람답게 사는 거죠. 그거면 충분하지 않아요?”라는 간단 명료한 대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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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 정욜씨
‘동성애’에 대한 무지ᆞ편견에 ‘거침없이 하이킥’
벽을 허물면 또 하나의 벽이 앞을 가로 막는다. 그 벽 너머에는 또 다른 벽이 첩첩이 놓여 있다. 끊임없이 맞닥뜨리게 되는 거대한 벽의 위압. 한국 사회에서 동성애자는 이중·삼중의 벽 속에 갇혀 있다. 무지와 편견이라는 외부의 벽은 스스로를 통제하는 내부의 벽까지 쌓도록 강요한다.
정욜씨(31)는 지난 10여 년 동안 이러한 벽을 허물고 또 허물었다. ‘성적 지향은 모든 차별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라는 유엔 자유권위원회의 규약과는 너무도 다른 삶의 현장 속에서 그는 부수면 또다시 들어서는 벽에 맞서 지난한 싸움을 펼쳐왔다.
2002년 가을 동성애자인권연대의 대표로 있던 정씨는 주류 사회에서 호기심의 대상쯤으로 여겼던 동성애자의 인권 문제를 공론의 장으로 끌어냈다. 그는 국가인권위에 동성애 사이트를 음란 사이트로 규정한 것은 부당하다는 내용의 진정을 접수했다.
이듬해인 2003년 3월 결과가 나왔다. 국가인권위는 ‘동성애 자체를 청소년 유해 매체물 심의 기준으로 둔 것은 성적 지향에 의한 차별’이라고 결정했고, 청소년보호위원회는 ‘동성애’ 문구를 삭제하라는 인권위의 권고를 수용했다.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드디어 “싸워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이다. 그 힘은 2006년 군대 내 동성애자 사병에 대한 차별과 인격 침해에 대한 문제 제기로 이어졌고, 또 하나의 벽을 허물어뜨렸다.
인권위를 오가던 시절 학생이던 정씨는 현재 3년차 직장인이 되었다. 하루의 절반 이상은 회사에서 보낸다. 무지와 편견의 벽을 향해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렸던 그는 이제 ‘세상 속으로’를 외치고 있다. 정씨는 “우리들만의 공동체를 꿈꾸기도 하지만,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이 더 소중하다”라고 강조했다. 지난 6월 서울광장을 뜨겁게 달군 촛불의 행렬 속에는 동성애를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이 펄럭였다. 그 깃발 아래서 정씨는 세상과의 연대를 노래했다. ‘하이킥’에 이어 그가 준비하고 있는 ‘강펀치’는 연대를 가로막는 불신의 벽을 향해 있다.
군대 상대 소송 중인 김병훈씨
농약병 근무, 진실을 밝힌다
“남자라면 당연히 가야 하는 군대라고 생각해 대학 1학년 중간에 입대했다. 보직은 취사병이었지만 부대에서 운영하는 과수원에서 근무했다. 도시 출신이라 모든 일이 낯설었다. 농약을 치고 나면 옷에서 농약물이 뚝뚝 떨어졌다. 안전 장구가 없어 좀 찜찜했지만 고참들이 농약을 잘 치라고 했다. 하늘을 향해 뿌리면 나에게 떨어지지만 머리 위에 맺힌 과실에 고루 묻히는 것이 당시에는 더욱 중요했다.”
김병훈씨(28)는 2002년 5월에 전역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7개월 뒤 몸속에서 15㎝ 크기의 거대한 림프종이 발견되었다. 종양이 너무 커서 기도를 압박해 숨을 쉬기조차 어려운 상태였다. 머릿속에 농약이 먼저 떠올랐다. 국내의 유명한 예방의학과 교수가 가르쳐 준 의학 사이트에서 ‘농약’과 ‘림프종’을 검색했다. 엄청난 자료들이 쏟아졌다.
국가보훈처에 유공자 등록을 신청했지만, 김씨의 서류상 보직이 취사병이라는 점이 앞길을 가로막았다. ‘농약병’이라는 자신의 군 생활을 찾기 위해 김씨는 군대와 싸우기로 마음먹었다. 국가인권위에 제소했고, 인권위는 김씨가 군 생활 동안 농약 작업을 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결과가 바뀌는 것은 없었다. 김씨는 보훈처를 상대로 행정 소송을 신청했고 현재 1심이 진행 중이다.
김병훈씨는 우리 사회에서 싸우기 힘든 대상 중 하나라는 군대를 상대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동료들은 증언을 주저하고 있고, 2년여 동안 가족처럼 지냈던 군무원은 비협조적이다. 그래도 김씨는 희망적으로 바라본다. “만약 10년 전에 내가 이런 일을 겪었다면 사실을 밝힐 용기조차 있었을까 싶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나아진 것이라고 본다.” 김씨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고 있는 자신의 행동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대한화물자동차운전기사회 김경환 회장
“생계 수단 열어주는 것이 인권 보장”
화물차 운전사들은 요즘같이 기름 값이 비싸 밤낮으로 일해도 생계 유지가 힘들 때에는 한 번쯤 개인택시로의 전업을 생각한다. 지리도 잘 알고 운전 경험도 많다. 하지만 대다수 지자체는 개인택시 면허를 허가할 때 택시 출신 지원자들에게 우선권을 준다.
‘대한화물자동차운전기사회’의 김경환 회장(79)도 과천시에 개인택시 면허를 신청했다가 택시기사 출신 우대 규정 때문에 탈락한 후 지난 2004년 국가인권위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인권위는 2005년 9월 ‘택시 운전 경력자에게만 개인택시 운송 면허를 배정하는 것은 헌법상 모든 국민에게 부여된 균등한 취업 기회를 배척하는 것이다’라며 관련 규정을 개정할 것을 과천시를 포함한 6개 지자체장에게 권고했다.
하지만 지자체들은 지금도 대부분 권고를 무시하거나 면허의 2%만 타 업종 운전자들에게 허용한다. 김회장은 “사안별로 행정 소송을 하는 수밖에 없다”라며 본격적인 법적 대응을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김회장은 건물 임대 수입이 있어 생계에는 지장이 없다. 하지만 “밤낮을 운전해도 최저 임금이 안 되는 후배들의 생계 수단을 최대한 열어주고 싶어서” 또 총대를 멜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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