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간하면 어정쩡하게 알면서 다 아는 것마냥 얘기하는 사람들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는데, 오랜만에 키배를 좀 떴습니다. 인스타그램에서 '인도 발리우드 영화 찍는 법'이라는 게시물이 있었는데, 거기서 인도 카스트 제도가 없어졌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길래, 설명을 해줬더니 끝까지 인정을 안하더라구요. 그래서 결국 조목조목 근거 제시해서 반박을 하니 막판에는 카스트가 철폐된 게 아니고 차별을 금지한 게 맞다고 인정하는 듯 말하더니 갑자기 또 물타기를 하면서 인도의 민주주의가 어쩌네 투표율이 어쩌네 헛소리를 하길래 걍 팩트로 후드려 까버렸는데요. 기왕 이렇게 키배를 뜬 김에, 오늘은 바로 인도의 '카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우선 '카스트'라는 단어 자체는 포르투갈어 '카스타'(Casta)에서 파생된 신분 질서 제도를 말하는 일반명사입니다. 하지만 제가 오늘 언급하는 것은 인도의 카스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인도 내 최대 종교인 힌두교 특유의 신분제입니다. 물론 기독교나 이슬람교 안에서도 자신들 나름대로 카스트 제도 비슷하게 계급을 만들었으나,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은 힌두교의 그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해만 언급하겠습니다. 아마 많은 한국인들이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 대해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배웠을 텐데요. 교과서에 의하면 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사제인 '브라만', 왕족과 무사인 '크샤트리아', 평민인 '바이샤', 노예인 '수드라', 그리고 이에는 포함되지 않는 불가촉천민인 '찬달라'로 나뉘어져 있다고 배웠을 겁니다.
잠시 불가촉천민에 대해 언급하자면 불가촉천민은 산스크리트어로 '부정 타는 자' '닿으면 안 되는 것'이라는 뜻으 '찬달라'였는데, 오늘날에는 암베드카르 인도 초대 법무부장관이 제안한 달리트(억압받는 자) 혹은 간디가 제안한 하리잔(신의 아들)이라고 불리죠. 그런데 사실 이보다 더 아래도 존재합니다. '불가촉천민'을 넘어 '불가시천민'(Thurumbar)이 바로 그것인데요. 이는 쳐다보기만 해도 부정해진다는 뜻으로, 이들은 거주지 밖으로 이동할 때는 항상 밤에만 이동해야 하며, 이동할 때에는 발자국이 부정을 남기지 않도록 뒤에 야자나무 잎을 매달아야 합니다. 불가촉천민들조차 이들을 차별하는데, 봐서도 부정을 탄다는 특성 때문에 잘 알려지지조차 않았죠.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은 카스트 제도의 두 가지 개념 중 하나인 '바르나'(Varna)입니다. 이는 색깔이란 뜻으로, 피부색을 의미하죠.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인도는 기원전 약 19세기 경부터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인도아리아인들이 진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지배체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카스트를 만들죠. 4성 체계의 바르나 중 브라만, 브샤트리아, 바이샤는 피부색이 비교적 밝은 인도아리아인이고, 수드라는 원주민 특히 드라비다인입니다. 결국 피부색에 의한 인종차별이죠. 인도인들보다 피부색이 밝은 사람들이 보면 도찐개찐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지 간에요.
또한 이 바르나는 기록에만 있을 뿐 현실에는 없습니다. 관념적인 계급제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카스트 제도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것과 인도 현실 간에 괴리가 생긴 이유는, 인도아리아인 브라만 계급을 통해 다수의 유색인종 드라비다인들을 다스리면서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뒤에서 언급할 실제적 카스트 개념인 자티(Jati)를 바르나에 끼워 맞춰 명문화를 했기 때문에, 실제 인도인들이 피부로 느끼는 사회계급제가 아닌 영국이 제도적으로 만들어낸 바르나에 의한 카스트 제도 인식이 고착화된 것이죠. 실제로 브라만 계급임에도 불구하고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을 보기도 했고, 수드라 계급임에도 제법 부유한 사람을 보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영국 BBC의 'Viewpoint: How the British reshaped India's caste system' (영국인이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재구성한 방법)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영어가 익숙하지 않으신 분들을 위해 아래 '인도 및 남아시아통'이라고 불리는 강성용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교수의 방송 출연 내용을 공유합니다.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인도를 식민지로 만들어 갈 때, 인도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소통 루트로 사제계급인 브라만을 선택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오랜 시간동안 내려온 인도의 많은 전통들을 모두 익힌 사람들이었으니까요. 그 때 브라만 계급들은 바르나를 답했습니다. 그런데 이면에 있는 것은, 이들 브라만들은 이후 네 계급간의 혼인으로 파생되는 계급을 무한대로 만들어 냅니다. 그 무한조합을 왜 만들었겠습니까? 자신들이 하는 말이 거짓말이니까, 현실에 대한 설명력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아무도 그 부분에 주목을 안하는 겁니다.
진정한 의미의 카스트는 바로 카스트의 또 다른 개념인 '자티'(Jati)입니다. 자티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고착화된 가문의 직업과 그 신분을 뜻하는데요. 실제로 인도의 카스트는 이 자티의 의미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인도에는 수천 개 이상의 자티가 존재하죠. 단순한 신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문을 뜻하기 때문에, 인도에서는 이름에 붙은 성을 보면 대강 그 사람의 카스트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즉, 지역기반 및 사회적 정보를 모두 알 수 있다는 것.
본래의 주제로 돌아와서, '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폐지되었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는 정말 심각하게 잘못된 정보입니다. 이광수 부산외국어대 교수가 쓴 칼럼 '인도 카스트 제도는 법으로 폐지된 적 없다'를 보면 그 설명이 나오는데요. 지금도 구글에 '인도 카스트제도 폐지'라고 검색하면 '1947년 독립헌법에 카스트 차별 철폐를 명문화한 뒤 카스트제도는 법적으로 폐지됐다'고 나오는데, 한겨레를 통해 이러한 잘못된 정보를 검색되게 한 칼럼 '내 안의, 우리 안의 카스트'를 쓴 김문영 우송대학교 교수(전 KOTRA 서남아지역본부장 겸 뉴델리무역관장, KOTRA 인도경제경영연구소장)이 무슨 근거로 이렇게 주장했는지 되묻고 싶네요. 인도 근무기간만 8년이라고 하던데, 본인이 출간한 <인도 상인 이야기>에서는 '인도의 카스트, 종교, 문화, 그리고 경제적 여건이 드리우는 구속력과 중력이 현재에도 크다는 이야기다' '인도 정부도 이종 카스트 간 결혼을 정책적으로 장려하고 있는데...(후략)' '인도 결혼 중 94%가 아직도 같은 카스트(좀 더 정확히는 같은 직업을 뜻하는 Jati) 내 결혼이란 의미로 인도인의 일상과 문화에서 카스트가 미치는 영향력이 막강함을 의미한다' 등으로 기술하셨으면서 왜 한겨레 칼럼에는 저렇게 적어서 수 많은 사람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사실로 받아들이게 만드셨을까요.
자, 인도 헌법 제15조에는 The State shall not discriminate against any citizen on grounds only of religion, race, caste, sex, place of birth or any of them. (국가는 종교, 인종, 카스트, 성(sex), 출신지 가운데 그 어느 것에 의해 시민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카스트에 의한 차별을 금지한 것이지 카스트를 폐지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잘못된 정보의 출처는 어설픈 전문가 뿐이 아닙니다. 국가 기관인 주인도한국대사관 역시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데요. 한국 대사관도 마찬가지. 주인도 대한민국 대사관 [한·인도 관계] 메뉴에서 '인도 사회문화'를 보니 '수천년 동안 인도인의 생활을 규율해 온 카스트 제도는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고, 근대화 및 교육의 영향으로 점차 약화되고 있으나 아직도 많은 인도인들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회관습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소개해뒀더군요. 그 외에도 [인도정세 동향]의 '전반적인 특징'에서 '종교없는 생활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종교가 생활에 밀착되어 있으며, 카스트제도는 헌법상 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뿌리깊게 남아 있음'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웃긴 점은 수시로 올리는 인도 정무언론동향에서는 또 카스트를 그대로 언급하고 있는 것. 2023년 3월 28일 인도 정무언론동향을 살펴보면 카르나타카 주정부의 무슬림 할당제 폐지를 언급하면서 '한편, 카르나타카 집권당인 BJP는 무슬림 취약계층을 위한 할당제를 폐지하면서 동 할당 비중 4%를 힌두교 Lingayat 및 Vokkaliga 카스트에게 배분함'이라고 적어뒀더군요. 또한 2021년 9월 17일 인도 정무언론동향에서도 모디 총리의 구자라트 주총리 교체 후 대대적 장관 조직개편 강행을 언급하며 'BJP당은 신임 구자라트 주총리 임명 후 다양한 카스트 및 청년층 리더들을 포함하여 총 24명의 신임 장관을 영입'이라고 적었구요. 즉, 그냥 근거없이 생각없이 '카스트 제도가 폐지됐다'고 적었다는 이야기.
이광수 교수는 자신의 칼럼 말미에 "카스트라는 것은 누군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폐지할 수 없는 사회적 단위이자 체계다. 카스트는 자신에게 천부적으로 주어진 속성이라는 것이다. 다만 그것으로 타인을 공적으로 차별하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갑오경장에 의해 반상제가 폐지되었던 것과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반상제는 국가가 관리하는 제도이기 때문에 폐지할 수 있지만, 인도의 카스트는 국가가 관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누가 폐지하고 어떻게 하고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적었습니다.
인도 비즈니스 컨설팅 (주)비티엔 이야호 책임 컨설턴트의 브런치를 보니 '우연히 EBS에서 세계지리 수능특강을 보게 되었는데, 인도의 카스트제도가 현재 법적으로 폐지되었다고 밑줄까지 치며 가르치고 있었다'면서 "EBS에서, 수능에서 그렇게 가르치는데 어떤 학생이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겠는가'라고 언급하더군요. 찾아봤는데, 이야호 책임 컨설턴트가 말한 강의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류성완 EBSi 및 강남구청 인터넷 수능방송 강사가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설명하면서 "법적으론 금지되었다"고 설명하군요. 어설프게 아는 척 하는 개인이야 제대로 알려주고, 팩트를 알려줬음에도 인정 못하고 우기면 팩트로 후드려 까면 되겠지만, 최소한 대사관 같은 국가기관에서는, 그리고 공립교육에서는 제대로 된 정보를 국민들, 학생에게 제공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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