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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안동여행 포스트에서 안동을 정신문화의 수도라고 표현하면서 그 근간이 되는 퇴계 이황 선생에 관련된 곳들을 보았습니다. 오늘 포스트도 어떻게 보면 퇴계와 연관이 있습니다. 퇴계 이황의 14대손인 이육사가 바로 주인공입니다.
이육사 문학관 전경
퇴계 이황 묘소에서 굽이진 길을 조금 달리다보면 이육사 문학관이 나옵니다. 2004년 이육사 선생의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건립된 문학관은
광야 시구와 그의 흉상
이육사는 한국의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입니다. 본명은 이원록 또는 이원삼입니다. 경상북도 안동 도산면에서 태어났고, 본관은 진성입니다. 한학을 수학하다가 도산공립보통학교에 진학하여 신학문을 배웠습니다. 10대 후반에 가족이 대구로 이사한 뒤 형제들과 함께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1926년 일어난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처음 투옥되었습니다. 이육사라는 필명은 이때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받은 수인 번호 '264'의 음을 따왔으며, 나중에 이육사(李戮史), 이육사(李陸史)로 고쳤습니다. 또다른 필명으로 이활이 있습니다.
이육사 형제들이 어머니에게 쓴 것으로 기억합니다..ㅠㅠ
문단 등단 시기는 《조선일보》에 〈말〉을 발표한 1930년이며, 언론인으로 일하면서 중국과 대구, 경성부를 오가면서 항일 운동을 하고 시인부락, 자오선 동인으로 작품도 발표했다. 그동안 대구 격문 사건 등으로 수차례 체포, 구금되었습니다. 1943년 국내에서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다음해인 1944년 구금 중에 사망했습니다. 유고시집 《육사시집》(1946)이 동생이자 문학평론가인 이원조에 의해 출간되었습니다.
그의 독립운동 발자취
이육사에 관한 많은 것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조선혁명군사정치 간부학교 1기생으로 입교하여 훈련을 받는 미니어쳐부터 독립운동의 발자취들. 그리고 사후에 받은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애족장, 1983년 문화훈장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의 시를 인쇄해 갈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A4용지를 가져가서 판에 놓고 문지르면 이육사의 시가 찍힙니다. 찍혀나온 모습은 걸려있는 액자와 같은 모습이에요. 광야와 청포도. 그 시를 고등학교 졸업 이후 다시 만났습니다.
그가 사용하던 물건들과 친필
이육사가 사용했던 안경, 시계, 그의 친필, 사진 등 그의 신변잡기 또한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문득 봉평에서 갔던 이효석 문학관이 생각나네요. 그 곳도 이렇게 꾸며져 있을꺼라고 생각합니다. 들어가 봤어야 하는건데..
이육사의 수감 모습
그의 시를 선택하여 들어볼 수 있는 시스템도 갖추어져 있으며, 영상물도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육우당
이 건물의 이름은 육우당입니다. 원래 이육사 생가는 현재 청포도 시비가 세워진 자리에 있었으나 안동댐 수몰로 인하여 1976년 4월에 안동시 태화동 포도골에 이건 보존되고 있으며 이 집에서 애국지사 이원기 선생을 비롯하여 육사, 원일, 원조, 원창, 원홍 6형제가 태어나셨다하여 당호를 육우당이라 한다고 합니다.
그의 생가를 복원한 것입니다.
이 건물은 생가를 본뜬 모형 집으로서 구조는 '二'자 형태이며 앞쪽은 사랑채로 방 두칸, 중간마루 한칸이고 뒤쪽 안채는 방 두칸, 마루 한 칸, 부엌 한 칸으로 지어졌습니다. 사랑채의 오른편은 팔작 지붕인 반면 왼편은 맞배지붕이 특이하나 수리 과정에서 변형된 것으로 보입니다. 육우당 반대쪽에는 이육사의 등신상과 그의 작품 절정의 시비가 있었습니다. 퇴계 이황의 고장 안동. 또 이렇게 이육사와 같은 후손을 배출해냈군요. 그의 문학과 독립운동은 안동의 자랑, 대한민국의 자랑입니다.
한국이 대표하는 문학가 이육사!
안동 시내에서 도산서원, 도산온천, 퇴계종택, 퇴계태실 등이 있는 지역으로 갈 때 보았던 남근바위입니다. 와룡면 태리에 있죠. 안동 내에 대표적인 선돌이 7곳에 있는데, 이 중에 3개가 와룡면에 집중하고 있다고 합니다. 와룡면에 존재하는 남근석은 단순한 선돌이 아니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으뜸의 형상을 한 것이 태리의 남근석입니다. 안동에서 청량산 쪽으로 가다 보면 오른편에 커다란 암벽이 마치 산허리에 치마 두른 듯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맞은편으로는 커다란 남근이 도로 쪽을 향해 뻗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보통 사람이 보면 마치 의도적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 만합니다. 그러나 원래도 이런 모습으로 이곳에 위치했었다는 것이 마을 사람들의 말이다. 이 남근석의 설명문에는 불알바위(아들바위)라고 명시돼 있습니다. 불알이나 아들이나 모두 남성을 상징하는 성기를 의미합니다. 마치 받침으로 있는 두 개의 바위가 불알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정말로 남근과 같은 바위를 얹어놓아 사실감을 더합니다. 게다가 도로 맞은편에는 치마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를 비스듬하게 겨누고 있습니다. 드러누워 여성을 마치 거슴츠레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남근석과 여성바위의 결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남근바위..포스가..
이 바위는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현재 바위 옆으로 나 있는 도로를 만들면서 공사업체가 없애버렸었습니다. 그런데 안동지방의 신문이나 언론이 나서서 다시 복원하라는 항의가 빗발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공사업체가 현재와 같이 돌로 계단을 만들고 그 위에 남근석을 세웠다고 합니다. 태리의 남근석은 원래부터 유명했습니다. 이곳에서 치성을 드려서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전해지는 것도 그런 이유 중 하나입니다. 안동 지방 전설에 따르면, 옛날 대를 이을 자식을 낳지 못해서 애를 태우던 부자가 있었는데, 이를 불쌍히 여기던 한 노파가 이 바위에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말해주어 이 말을 들은 며느리가 바위 앞에서 정성을 드려서 정말로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 후부터 아들을 못 낳는 아녀자들이 이 바위에 와서 치성을 드렸기 때문에 아들바위라고 불렀다고 하구요. 이 전설은 부자라고 해도 자식을, 그것도 대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하면 행복한 삶을 이룰 수 없다고 하는 전통적인 사고가 깔려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바위를 남근석이나 불알바위라고 부르는 대신에 아들바위라고 했습니다. 이는 명칭이 상스럽지 못하다는 고정관념이 만들어낸 이칭이라고 하죠. 따라서 아들을 낳을 수 있기 때문에 아들바위라고 했다는 것은 온당하지 않습니다. 아들을 낳도록 만드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남근석이나 불알바위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적절합니다. 이 바위에 얽힌 속설은 비단 아들만 낳고 끝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즉 아들을 낳아도 10년 정도는 찾아와 치성을 드려야만 아들이 무사히 잘 클 수 있다는 속설이 전해집니다. 만약 아들을 낳고 치성을 드리지 않는다면 죽거나 병에 걸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안동지방의 삼신신앙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곳에서는 아기를 낳으면 첫이레와 두이레, 세이레는 물론 아기가 성장하면서 10살이 되기 전까지는 생일날에도 삼신상을 차려줍니다. 아이가 무사히 잘 자라기를 삼신에게 기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치로 이 바위를 찾아와서 치성을 드리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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