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새로운 디자인의 지폐 사용을 오늘(3일) 공식적으로 시작했습니다. 일본이 지폐 디자인을 교체한 것은 2004년이 마지막이었습니다. 당시 1천엔권과 5천엔권을 바꿨는데요. 1만엔권은 1984년 이후 40년 만에 교체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폐 속 인물 3명 중 한 명이 과거 일본의 한반도 침략 과정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인물이라 오늘 잠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일본 정부 "경제 효과 기대" vs 소상공인 "부담만 가중될 것"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내세운 이번 새 지폐 발행은 위조 방지가 목적이지만, 내심 부수적인 경제 효과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당장 기존 자동판매기와 현금자동입출금기(ATM)가 새 지폐를 인식할 수 없어 새 기계로 교체해야 하니 경기 부양 효과가 생기겠죠. 노무라종합연구소는 ATM 교체 등에 드는 비용을 약 1조6천억엔(약 13조9천억원)으로 추정하며 일본의 연간 명목 국내총생산(GDP)을 0.27%가량 끌어올리는 경제 효과가 있다고 추산했습니다. 미쓰비시유에프제이(UFJ)은행, 미쓰이스미토모은행, 미즈호은행 이른바 '빅3' 은행들은 자사 전국 자동입출금기가 새 지폐를 인식하도록 준비를 마친 상황이죠.
각 금융기관과 소매점도 ATM과 계산대 개보수를 서두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코로나19 사태로 현금 없는 결제 시스템이 점차 자리를 잡고 있는데다 소규모 사업자에게는 부담도 커서 대응을 서두르지 않는 모습도 포착되고 있다고 합니다. 새 지폐 인식 기능을 갖춘 자판기 1대 당 대당 200만엔, 우리돈 1,750만원 정도가 들어가기 때문이죠. 일본이라면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음료 자판기도 마찬가지. 전국에만 220만 여대의 음료 자판기가 있는데, 한 음료 대기업 담당자는 "완전히 작업이 완료되려면 앞으로 2년 정도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고령층 등 개인이 집에 쌓아뒀던 이른바 '장롱 예금'이 밖으로 나오며 소비와 투자로 이어질 것이란 기대도 있습니다. 다이이치생명경제연구소는 일본의 장롱 예금이 약 60조엔(약 522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면서 이런 현금이 물가나 금리의 상승, 신 지폐 발행 등의 요인으로 움직이기 시작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는데요.
아무래도 이번 지폐 교체에 따른 경제효과는 뚜껑을 열어봐야 정확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장 식당 등 소상공인 일부는 자동판매기 교체를 명분으로 음식 가격을 인상하는 등 일본 정부가 기대하는 경제 효과를 반감시킬 요소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새 지폐가 불러올 일본 경제의 변화는 아직까지 미지수입니다.
새로운 일본 지폐 3종, 누가 그 속에 있나
우선 새로운 지폐들을 살펴보죠. 먼저 1,000엔권부터. 천엔권 앞면의 인물은 기타자토 시바사부로(1853~1931). 세계 최초로 파상풍균의 순수배양에 성공하여 파상풍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방법을 개발한 세균학자입니다. 기존의 천엔권에 있었던 노구치 히데요에 이어 의학자가 천엔권의 인물로 사용됐네요.
뒷면에는 우키요에 화가인 가쓰시카 호쿠사이가 그린 후가쿠 36경 속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神奈川沖浪裏)'가 그려져 있습니다. 가쓰시카 호쿠사이는 에도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로서 세계적으로도 유명합니다. 아마 어디서든 이 그림을 한번쯤은 보신 적이 있을 것 같네요. 미술에 크게 관심이 없는 저도 무척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5,000엔권에 들어간 인물은 쓰다 우메코(1864~1929). 쓰다 우메코는 일본 최초의 여자 유학생 중 한 명으로서 1871년에 미국으로 유학, 그 후 일본의 여자 교육에 힘썼고, 1900년에는 여성의 고등 교육을 목표로 하는 개인 학원 여자 영어 학원(현재 쓰다주쿠 대학)을 창설했습니다. 쓰다 우메코는 진구 황후와 히구치 이치요 작가에 이어 세 번째로 일본 지폐에 등장한 여성이 됐습니다. 뒷면에는 매년 4~5월경 피는 등나무 꽃이 들어갔구요.
10,000엔권의 인물은 시부사와 에이이치(1840~1931). 일본 최초의 은행인 제일국립은행(다이이치칸교은행, 현 미즈호은행) 설립한 인물로, 도덕 경제 합일설(경제와 도덕을 양쪽 모두 중시하는 생각)을 주창하였으며 약 500개의 기업에 관여해 '근대 일본 경제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인물입니다. 뒷면에는 도쿄역이 들어갔습니다. TMI를 잠시 말하자면 도쿄역을 설계한 다쓰노 긴고는 당시 유행하던 절충주의 양식을 따라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중앙역을 모방했고, 그의 제자이자 일본 건축계의 거장인 쓰카모토 야스시 도쿄대학 교수는 스위스의 구 루체른 역을 모델로 서울역(당시 경성역)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대한제국 화폐 주권 침략의 시작이었던 제일은행권, 그 속에 있었던 인물
그런데 우리는 10,000엔권 지폐 속 주인인 시부사와 에이이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분명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큼 일본 경제사는 물론 일본의 근대사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이는 일본의 입장이고 한국에서의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에 연관되어 있는 인물이라는 점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구한말 한반도에 철도를 부설하고, 일제 강점기 당시 현재 한국전력의 전신인 경선전기 사장을 맡으며 한반도 경제 침탈에 앞장선 인물입니다. 심지어 그는 대한제국 시절 이권 침탈을 위해 한반도에서의 첫 근대적 지폐 발행을 주도하면서 스스로 지폐 속 인물로 등장하면서 한국에 치욕을 안긴 인물이죠.
대한제국은 1901년 광무개혁의 일환으로 외국 돈의 유통 금지와 금 본위제의 채택을 내용으로 하는 자주적 화폐 조례를 발표했었습니다. 하지만 금이 부족한 대한제국은 금화의 생산량이 적었고, 백동화 등 기존의 화폐들은 회수되지 않았습니다. 위조 백동화에 상평통보가 어전히 유통되는 등 화페 시장이 막장으로 치닫고 있는 가운데 심지어 중앙은행 설립까지 이뤄지지 못하면서, 자주적 화폐개혁이 실패로 돌아갔죠.
이러한 상황에서 환전과 자금 회전에 어려움을 겪던 일본 상인들은 이미 대한제국에 지점을 설치하고 있던 일본 제일은행 발행 화폐의 한반도 유통을 본국에 요청했고, 1902년 일본 정부는 일본 제일은행권의 발행, 유통을 허가합니다. 이는 대놓고 대한제국 화폐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로 대한제국 정부와 상인들에 대한 도전이었고, 제일은행권 배척 운동이 전개됐지만, 일본은 이에 대한 무력시위를 하며 제일은행권 발행을 강행했습니다. 바로 이때 발행된 제일은행권에 들어갔던 인물이 시부사와 에이이치. 120여 년이 지나 일본의 화폐에 다시금 얼굴을 비추게 된 인물입니다.
이후 1904년 제1차 한일협약으로 대한제국의 화폐발행권마저 박탈당한 뒤, 대한제국의 재정고문이 된 메가타 다네타로에 의해 현재의 조폐국에 해당되는 전환국이 폐지되고, 1905년부터는 아예 대한제국의 공식 화폐가 일본 제일은행의 주도로 오사카 조폐국에서 제조되면서 대한제국의 화폐 주권은 일본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되죠.
이렇듯 제일은행권은 대한제국의 화폐 주권 침탈의 시작이었습니다. 멀쩡하진 않았지만 엄연히 대한제국이 스스로 화폐를 만들며 개혁을 시도 중인 상황에서 지네 멋대로 제일은행권이라는 화폐를 만들어서 유가 증권마냥 한반도에 이를 유통, 대한제국 화폐 시장의 붕괴에 결정타를 날렸죠. 현재 북한 장마당 등에서 북한 정부가 발행한 북한 화폐보다 미국 달러나 중국 위안화가 사용되는 것을 생각하시면 이해가 빠르겠네요. '장마당 경제는 중국 위안화로, 국영경제는 북한화폐로 분리됐다'는 말이 있다고 하죠? 특히 중국과 가까운 국경지역에서는 거의 중국 위안화가 공용화폐처럼 쓰인다고 하구요.
이쯤되면 사용되지 않지만 유로화 사용 이전 독일의 화폐였던 마르크화에 나치 독일의 경제 장관이었던 얄마르 샤흐트가 들어갔는 상황이랑 마찬가지일 것 같네요. 이번에 새로 발행되는 지폐 3종에 등장하는 인물은 2019년 아베 신조 정권에서 결정된 것입니다. 당시에도 한반도 침략의 역사를 대변하는 인물인 시부사와가 1만엔권 인물로 선정된 것에 대해 아베 정권의 역사 수정주의가 반영됐을 뿐 아니라 일제 식민 지배를 받은 한국에 대한 배려가 결여된 것이라는 비판이 나온 바 있는데요. 윤석열 정부 출범 후 표면적으로는 한일 관계가 경색 국면에서 벗어난 듯 하지만, 결국 일본 최고액권 지폐에 한국 경제침탈의 주역이 버젓이 들어가는 것을 보면 과거사에 대한 양국의 인식 차이가 여전히 크다는 생각을 지울 수 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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