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음악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했습니다. 아무래도 타 대학, 타 전공에 비해 교수님과 조금 더 밀접한 학교생활을 하기 마련인데요. 교수님께서 짐이 많으시면 으레 "교수님, 제가 들겠습니다"라며 거들기 마련이었습니다. 굳이 누가 강제로 시켜서라기보단 어른이, 그것도 나를 가르치시는 교수님께서 무겁게 짐을 들고 계신데 내가 드는 것이 예의라는 생각에서 나온 자발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또한 선배들도 쭉 그렇게 해왔고, 나도 그렇게 하고, 후배들도 마찬가지이구요. 때때로 로비에서 밥을 먹다가 한 교수님은 빈손으로, 그 제자는 수많은 짐을 낑낑거리며 들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며 흉을 보았던 기억도 나네요. 그런데 당시 딱 2명의 교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짐 드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한분은 제 지도교수님. "교수님, 제가 들겠습니다"라고 하면 "아니야~ 내가 들 거야~"라며 주지 않으셨죠. 또 한분께서는 되려 "자네가 왜?"라며 되물으셨습니다. "이 짐은 내 짐이고, 내가 드는 것이 마땅하다"며 정 내 힘으로 벅찰 때는 부탁을 하겠노라고 하셨었죠.
대학 시절 이야기를 왜 꺼내는지... 뉴스를 보신 분들이라면 짐작을 하셨을 겁니다. 바른정당 김무성 의원의 이른바 '노룩패스' 논란이 네티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습니다. 김무성 의원은 어제인 23일 김포공항을 통해 일본에서 귀국했는데요. 입국장에 들어서면서 자신의 캐리어를 수행원에게 눈도 마주치지 않고 밀어 주는 듯한 장면이 포착된 것입니다. 이 영상에 대해 작게는 김무성 의원 본인, 크게는 한국 정치인의 권위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 아니냐는 비난이 쏟아졌고, 심지어는 외신들까지 나서 '한국 정치인의 스웨그'라며 상대를 보지 않고 공을 던지는 행동을 뜻하는 농구 용어인 '노 룩 패스(No look pass)'에 빗대어 김무성 의원의 행동을 지적했죠. 레딧(reddit) 등에서는 한국인 전체에 대한 매도마저 이루어지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오기도 하는데요.
한국에서는 역시 해학의 민족답게 이미 수많은 패러디들이 쏟아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옥션과 지마켓 등에서는 '자율주행은 안됨' '소문이 무성한 그 캐리어'라며 #노룩패스 #컬링가능 등의 해시태그를 붙여 판매중이기도 하구요. 캐리어를 받은 수행원이 발로 차서 김무성 의원을 맞추는 짤도 등장했습니다. 김무성 의원이 캐리어로 컬링을 하는 짤도 등장. 실제로 tbs교통방송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나온 바른정당 이혜훈 의원은 '미스터 컬링'을 언급하며 민망한 듯 웃어 넘기기도 했죠.
가수 이승환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 영상을 게시한 뒤 "무성도사?! 믿겨져? 저(딴) 사람이 새누리당의 대선 후보일 수도 있었다는 게. 쓰고 보니 믿겨짐. 납득이 단박에 감"이라고 적으며 그를 비난했고, 바른정당 이준석 노원병 당협위원장은 "여러번 다시보기 하게 되는 묘한 마력을 지닌 장면임은 맞다. 하지만 희화화될 소지가 충분하고, 악재인 것은 맞다. 이런 모습이 자주 노출되면 곤란하다"면서 "어쩌면 그래서 당이 조금 더 젊어졌으면 하는 기대가 생기는 것은 맞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한편 인터넷의 이러한 논란에 대해 김무성 의원은 덤덤한 반응입니다. 오늘 오전 바른정당 당사에서 열린 국회의원-원외위원장 연석회의에 참석한 김무성 의원은 "캐리어 논란이 외신에서도 크게 보도됐다"는 기자의 질문에 "그게 이상하게 보이더냐"고 되물으며 "아니, (수행원이) 보여서 밀어주었는데"라고 대답했습니다. "눈을 마주치는 부분이 없으니 논란이 된 것 같다"는 지적에 대해선 "그것을 내가 왜 해명해야 해? 관심도 없고, 해명할 생각도 없다"고 대답하기도 했구요. 후에 김무성 의원 측에서는 "수행원이 '입국장에서 취재진이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사전에 김 의원에게 전한 터라, 문이 열리고 수행원을 발견하자마자 가방을 빨리 넘기고 인터뷰에 응하려던 것이 오해를 사고 있는 것"이라는 해명을 내놓긴 했습니다.
사실 전 엄밀히 말하면 김무성 의원과 수행원이 서로 눈을 마주쳤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너무 김무성 의원을 선하게 판단하는 것일까요?ㅎㅎ 이미 김무성 의원이 입국장으로 들어오기 전 문이 열려있었고, 김무성이 나타난 방향과 수행원이 나타난 방향을 고려해볼 때 정면에서 촬영된 카메라 영상에는 잡히지 않았지만, 김무성 의원과 수행원은 아이컨택을 충분히 할 수 있는 각도로 보여요. 하지만 이번 논란의 본질은 '눈을 마주쳤다' '마주치지 않았다'가 아닙니다. 그것은 단순히 논란의 경중에 약간의 영향을 미치는 수준이구요. 캐리어를 그냥 훅 밀어서 수행원한테 떠넘길 정도로 다급한 상황도 아닌데 그의 힘조절과 방향 조준 등이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라는 것, 즉 익숙하다는 것이죠.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지 2주가 막 지난 지금, 언론을 넘어서 국민들 사이에 회자되며 칭송을 받는 것이 바로 문재인 대통령 내외의 탈권위적인 모습입니다. 열린경호로 국민들과의 접촉을 최대한 수용하려는 것을 비롯해 10년 전 민정수석 당시 사용하던 원형탁자를 창고 깊숙한 곳에서 꺼내와 회의에 도착한 순서대로 앉자는 제안을 하고, '아지오'라는 청각장애인들이 만든 수제화 구두를 신고 다니는 문재인 대통령, 여염집 주부와 다를 것 없는 옷차림으로 이삿짐을 꾸리다가 민원인의 손을 잡고 들어가 컵라면 한 사발이라도 대접해서 보내고, 김무성 의원보다 훨씬 큰 캐리어를 어느 누구의 도움 없이 끌다가 차에 직접 싣는 영부인 김정숙 여사의 모습은 '대통령 부부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인식을 국민들에게 심어주고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만 해도 탈권위적인 모습에 대한 찬사와 함께 '격이 떨어진다' '경망스럽다' '국격의 문제다'와 같은 비난도 존재했었지만, 이명박근혜 정권... 특히 박근혜 씨라는 유신공주를 4년동안 '모셔오면서' 많은 이들이 절실하게 깨달은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럴 것이라고 추호도 생각하지 않지만, 설령 문재인 대통령 부부의 이러한 모습이 기획된 모습이라 할지라도 변하지 않는 것은 국민들이 현재 바라고 있는 대통령의 모습은 바로 문재인 대통령이 보여주는 모습, 국민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려 하고 권위적이지 않고 일반 국민과 다를 것 없다는 것을 보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시대의 풍조라는 것이 있죠. 이러한 상황 속에서 김무성 의원이 보여준 모습은 문재인 대통령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과는 극명하게 배치되는 포지션으로, 그깟 캐리어 하나 자기 힘으로 끌기 싫어서 컬링을 하듯 수행원에게 툭 밀어 넘겨주었다, 권위적이다, 갑질이다 등등의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죠. 수많은 취재진들이 김무성 의원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귀찮게 굴어서 피치 못하게 자리를 빠져 나가기 위해선 짐을 좀 줄여야 하는 상황이었다거나 하면 이해라도 가죠. 그냥 그 캐리어를 끌고 느긋하게 기자들 앞으로 다가와 잠시 옆에 세워두고 인터뷰를 하면 안되는 것이었을까요?
문재인 대통령의 행동 하나하나가 찬사를 받고 있는 이유는, 그의 행동이 일반 국민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 그리고 '익숙하다'는 것. 김무성 의원이 국민은 물론 외신 등 해외 여론에서까지 비난을 받고 있는 이유는, 그의 행동이 일반 국민들과 상당히 다르다는 것. 그리고 가끔씩 선거 때 일반 국민과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이 익숙하지 않고, 너무 어색하다는 것. 하지만 전 김무성 의원의 이런 모습이 좋습니다. 쭉 그렇게 행동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계속. 쭉.
오늘의 키워드
#김무성 캐리어 #김무성 노룩패스 #김무성 컬링 #김무성 패러디 #탈권위 #갑질 #문재인 대통령 #김정숙 여사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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