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코미디계의 대부이자 '개그맨'의 창시자 전유성, 하늘의 별이 되다
'개그계의 대부'라 불리던 전유성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전유성은 25일 오후 9시 5분쯤 입원 중이던 전북대학교 병원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지난 6월 병원에 입원해 기흉 시술을 받았죠. 시술 후에도 호흡 문제를 겪고 있었고, 최근에 상태가 심각해 병원에 다시 입원한 것으로 전해졌다고 알려졌었습니다. 사인은 폐기흉 악화. 향년 76세.
한국방송코미디언협회 관계자는 "밤 9시 5분쯤 유일한 가족인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며 "마음의 각오는 했지만, 너무나 안타깝고 슬프다"고 말했습니다. 유족으로는 딸 제비 씨가 있으며 장례는 희극인장으로 치뤄지게 됩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지난 24일 병문안을 한 한국방송코미디언협회 김학래 회장은 "가족과 장례 문제를 놓고 협회 관계자들이 협의중"이라면서 "이미 코미디협회장이 결정된 상태이기 때문에 절차상의 문제는 없다"고 언론을 통해 밝혔습니다.
1949년생인 전유성은 서라벌예술대학 출신으로 1968년 TBC 동양방송 특채 코미디 작가로 일하다 코미디언으로 전향, '유머1번지' '쇼 비디오 자키' 등에 출연하며 인지도를 높였습니다. 희극인이나 코미디언으로 불리던 시대에 '개그맨(Gagman)'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인물로 알려진 전유성은 슬랩스틱 액팅이 주를 이루던 우리나라 희극 무대에 고영수, 송영길 등과 함께 언어 유희를 구사해 웃음을 주는 '스탠드업 코미디' 스타일을 소개해 '개그맨 1세대'로 불렸죠. 전유성의 희극 연기는 상황극이나 개인기를 넘어서 세태 비판과 냉소를 섞는 방식으로 이뤄졌습니다. 후배 최양락과 콤비를 이룬 KBS '유머 1번지'의 '도시의 사냥꾼' 등 꼭지에선 주인공인 최양략에게 말싸움에 밀리다가 냉정하게 일갈을 던지는 연기로 인기를 얻기도 했습니다.
전유성은 대중문화 관련 기획과 지역 문화 발전에도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1980년대 통금이 해제 된 후 심야극장 등 독특한 아이디어를 충무로에 전했고 대학로와 지방 소극장 공연을 기획하는 등 한국 희극계의 외연을 확장했구요. 많은 저서를 남긴 베스셀러 작가이기도 했습니다. 대표 저서로는 컴퓨터 등에 대한 입문서 시리즈 '1주일만 하면 전유성만큼 한다'와 '남의 문화유산 답사기',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즐겁다', '하지 말라는 것은 다 재미있다' 등이 있습니다.
전유성은 2007년 청도에서 사단법인 '청도코미디 시장' 대표이사직을 맡아 지역 공연 활성화를 이끌었습니다. 2011년에는 국내 농촌 지역 공개 코미디 전용 공연장 '청도 철가방극장'을 열었는데요. 철가방극장은 '코미디도 배달된다'는 이색 콘셉트로 인기를 끌며 7년간 4,400차례 공연을 통해 전국 각지에서 수십만 관객을 불러모았습니다.
전유성이 던진 돌, 한국 개그계를 정립시켰다
전유성이 코미디계에 데뷔하던 1970년대만 해도, 한국 코미디는 악극단 출신의 원로 코미디언 세대가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코미디의 문법은 단순하고 명확했죠. 과장된 분장, 우스꽝스러운 몸짓, 그리고 정해진 각본에 따른 '슬랩스틱'이 사실상 코미디 그 자체로 여겨지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유성은 고정관념의 틀을 깨고 코미디의 본질이 슬랩스틱처럼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운 '행위'만 아니라, '허를 찌르는 생각'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실제 개그스타일면에서도 전유성은 몸보다는 말, 말보다는 글로 웃음을 유발하던 개그의 선구자적인 인물이었죠.
진지한 톤에서 황당한 발언으로 허를 찌르거나, 한 템포 곱씹고 생각해야만 비로소 개그를 이해할 수 있는 그의 스타일은 즉각적이고 빠른 웃음을 유발해야 하는 TV 코미디의 문법과는 그리 맞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전유성이 굳이 '개그맨'으로 자신을 규정한 것은, 본인의 단점인 연기력 대신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희극인'이 되겠다는 의미를 담은 일종의 정체성 선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철학을 최양락, 이홍렬, 이경규 등 재치와 아이디어로 무장한 후배 스타 희극인들이 잇달아 이어받으면서 '개그맨'은 코미디계의 새로운 트렌드를 상징하는 표현이 됐습니다. 쟁쟁한 선후배 개그맨들도 아이디어가 부족할 때마다 전유성을 찾아와 멘토로 여기고 자문을 구했다는 일화 역시 유명하죠. 전유성이 웃음을 추구하는 방식에서 던진 새로운 화두는, 곧 한국 코미디의 주도권이 '몸의 시대'에서 '아이디어의 시대'로 서서히 넘어가는 전환점이 됐습니다. 전유성이 도입한 개그맨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작명을 넘어서, 코미디에 대한 철학적 재정의이자 지적인 혁명이었던 것이죠.
또한 설계자로서의 전유성의 면모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결과물이 바로 '개그콘서트'(이하 '개콘'). 오늘날에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공개 코미디 형식이지만, 당시로서는 방송가의 상식을 뒤엎는 파격적인 기획이었습니다. '개콘' 이전의 코미디는 방송국 스튜디오 안에서 완벽하게 짜인 각본과 편집을 통해 제조되는 방식이었지만, 전유성은 대학로 소극장에서 관객과 직접 호흡하며 아이디어 하나로 생사를 겨루는, 날것 그대로의 코미디를 브라운관으로 옮겨왔습니다. 이는 방송사에 거대한 코미디 실험실을 세운 것과도 같았죠.
공개 코미디 시스템 안에서 개그맨들은 더 이상 주어진 연기만 하면 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아이템을 기획하고, 대본을 쓰고, 주특기와 포지션을 나누어 조직적인 팀플레이를 펼치는가 하면, 무대 위에서는 관객의 즉각적인 심판을 받아야 하는 '창작자'가 되어야 했죠. 여기에 코너가 관객의 외면을 받으면 가차 없이 폐지되는 냉혹한 경쟁 환경은, 역설적으로 한국 코미디의 질적 수준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리는 동력이 됐습니다. 전유성이 직접 '개콘' 무대에서 활동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구상한 시스템은 오랫동안 한국 코미디의 주류가 되었고, 수많은 아이디어와 개그맨 스타들을 탄생시키는 산실이 됐습니다.
또한 전유성의 남다른 안목 역시 한국 대중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전유성은 한국 대중문화를 빛낼 수많은 스타들의 재능을 일찌감치 꿰뚫어보고 연예계로 이끌어줄만큼 남다른 안목을 가진 인물이었던 것이죠. 가수 이문세의 재치있는 입담을 발견하고 그를 최고의 라디오 DJ로 이끄는가 하면 주병진의 진행능력과 쇼맨십을 알아보고 훗날 한국 최초의 스탠딩 토크쇼 MC로 성장하게 되는 발판을 마련해줬습니다. 그 외에도 한영애, 故 김현식, 그리고 자신의 카페에 손님으로 왔던 한채영까지. '코미디 시장'이라는 코미디 극단을 운영하며 안상태, 김대범, 황현희, 박휘순, 신봉선, 김민경 등의 후배 개그맨들을 다수 양성하기도 했구요. 이것이 많은 스타들이 수십년이 흘러서도 전유성을 인생의 은인이자 스승으로 존경한다고 밝힌 이유입니다.
전유성이 명예위원장을 맡았던 부산국제코미디페스티벌조직위원회(아래 부코페)는 26일 오전 추모성명을 발표하며 "대한민국 개그계의 큰 별, 전유성 선생님께서 우리 곁을 떠나셨다"라며 안타까운 소식을 전했습니다. '부코페' 위원회는 "전유성 선생님은 '개그맨'이라는 명칭을 직접 창시하시고, 한국 최초의 공개 코미디 무대와 개그 콘서트 실험 무대를 선보이며 한국 코미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수많은 후배 개그맨들에게는 든든한 스승이자 멘토로서 영감을 주셨다. 아시아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코미디 페스티벌인 부산국제코미디페스티벌이 만들어지는 데 주춧돌이 되어주셨고, 한국 코미디가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도록 앞장서 전파하셨다"고 전유성의 업적을 기렸습니다. 이경실을 비롯해 박준형, 김영철, 조혜련, 김대범, 윤영미, 양희은, 김원효, 한상진, 신봉선 등 연예계에서는 추모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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