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지난 일이지만 꼭 얘기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지난 1일 언론을 통해 보도된 몇 장의 사진을 보고 충격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진 속 장소는 강릉 경포대 해변 인근에 위치한 강릉소방서 경포119안전센터 앞마당. 주차된 차량 10여대로 가득 메워져 있었는데요. 이 차들은 모두 새해 첫날 해돋이를 보기 위해 경포대를 찾은 시민들이 불법으로 주차해놓은 차량들이었습니다.
이날 경포119안전센터 소속 대원들은 오전 6시경 경포해변 해돋이 행사 안전 지원을 위해 구급차 등을 몰고 출동했던 상황. 오전 7시 40분경 복귀했으나 불법 주차된 차량에 남겨진 연락처로 일일이 연락해 차를 이동시켜 40분이 지난 후에야 차고로 진입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이 시간동안 비상 상황이 발생했다면 차고에 대기하고 있던 펌프차 등이 현장에 출동할 수 없어 아찔한 상황이 벌어질 뻔 했죠.
이번 사태는 29명의 사망자와 36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충북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참사가 벌어진 지 불과 한달도 안된 상황이라 더욱 심각하게 느껴집니다. 제천 화재 참사도 건물 앞에 불법 주차된 차량들로 인해 진화·구조 작업이 늦어져 피해가 훨씬 컸던 것이었거든요. 네티즌들이 댓글에서 비아냥 거릴 때 흔히 '중국보다 우리가 나은게 뭐냐'는 말을 하는데, 이러한 기사를 접할 때면 정말 한국의 시민의식이 아직 멀었다 싶은 느낌도 들고,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일본인들의 시민의식만큼은 정말 부럽다고 느꼈던 기억이 스멀스멀 되살아납니다.
미국의 경우 주마다 다르긴 하지만 소화전에서 최소 4.6m, 소방서 출입구에서 최소 6.1m 이상 떨어진 곳에 주차를 해야 하며 이를 어기면 50~100불의 벌금을 비롯해 화재 발생과 상관없이 바로 견인됩니다. 물론 비용은 차주가 부담. 영국은 미국보다 더 엄격한데요. 주거지 내 노상 주차를 전면 금지했습니다. 불법 주차 과태료는 최소 60파운드(약 8만6천원), 48시간 이상 불법 주차 후 견인될 경우 167파운드(약 24만1천원)을 내야 합니다. 일본도 화재경보기 1m 이내, 소방설비 주변 5m 이내에 차량을 잠깐이라도 정차했다가 적발되면 1만8천엔~2만5천엔(약 17만~22만원)을 내야 하죠.
우리나라도 관련 법규는 있습니다. 도로교통법 제35조와 같은 법 시행령 88조에 따르면 소방차 등 긴급차량 통행에 지장을 주면 20만원, 소방용 기계 및 기구, 소화용 방화 물통, 소화전 등으로부터 5m 이내에 주정차할 경우 과태료 5만원을 물게 됩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이와 같은 법이 무시되기 일쑤입니다. 경포119안전센터 사태 역시 계도 및 주의로 끝났습니다. 위의 예시로 든 국가들과 한국의 차이는 단속 기준과 방식이 예외없이 일정하다는 점. 한국에서 단속에 걸리면 어쩌다 한번 재수없게 운 나쁜 날이죠?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해보죠. 2014년 미국 보스턴의 한 주택에서 화재가 발생해서 소방차가 현장에 출동했는데, 화재 현장 근처 소화전 앞에 BMW 승용차가 주차되어 있어 소방호스를 연결하는데 제약이 있었습니다. 이때 소방관들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앞좌석 양쪽의 유리창을 박살내고 소화전에 호스를 연결했습니다. 당시 소방호스가 승용차를 관통한 사진이 미국에서 화제가 됐었는데, 고급 차량의 유리창을 깨뜨려서가 아니라 소화전 앞에 차량을 주차하는 경우를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어서였다고 합니다. 이 BMW 차주는 차량의 유리창이 박살난 것은 물론 무거운 불법 주차 벌금을 물게 됐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한국의 소방기본법에는 소방차를 가로막은 주차 차량을 소방관들이 옮길 수 있도록 되어는 있지만 이동 방식이나 파손이 발생했을 경우 처리 여부 등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습니다. 지난해 12월 소방기본법 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해 형사 책임이 면제되기 전까지는 차주들이 수리비를 요구할 경우 소방관이 이를 보상해야 했죠. 행정안전부에서는 "위급 상황 발생시 소방관이 불법 주차 차량을 파손해도 책임을 묻지 않는 방향으로 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지만 글쎄요. 이렇게 국민 안전에 직결되는 사안은 정말 신속하게 처리하는 것이 옳을텐데 앞으로의 행보가 궁금하네요.
관용이 필요한 사안이 있고 관용을 베풀어서는 안되는 사안이 있습니다. 만약 벌금이 수십만원에 이르렀다면 경포119안전센터 앞마당에 불법 주차된 차량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을까요? 그 당시에 긴급 상황이 발생했다면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는 누가 책임을 지게 됐을까요? 이것이 대한민국 시민의식의 현 주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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