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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 이승만 독재에 맞선 대한민국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자발적한량 2018.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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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입니다. 건국이념과 정부의 정통성을 나타내며, 민족단결과 정의·인도·동포애의 실현을 헌법 이념으로 규정하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확립과 국가의 책무를 규정했죠. 오늘은 그 헌법 전문에 등장하는 4·19 혁명이 58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4·19 혁명은 1960년 4월, 국민들이 혁명을 통해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종식시킨 민주주의 시민혁명을 말합니다. 6·25 전쟁이 끝난 이후 국민들 사이에서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은 날로 강해졌지만,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은 1954년,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없앤다'는 내용을 주요 골자로 하는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종신 집권의 길을 열어두는 등 국민들의 뜻과는 정반대의 행보를 보였습니다.

 

혁명의 도화선을 붙인 것은 1959년 6월 29일 자유당 전당대회. 말 그대로 당대표 등을 뽑는 전당대회였으나 돌연 이승만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는 입장을 밝히자 그 자리에서 정부통령 후보 지명대회로 변경이 됩니다. 당시에는 대통령 선거가 농번기를 피해 5월에 치러졌기에 1년 가까이 남은 상황이었죠. 그리고 7월 31일, 이승만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죽산 조봉암이 진보당 사건으로 인해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합니다. 바로 전날 재심이 기각되어 변호인들이 다시 재심을 청구하려고 했는데, 바로 다음날 처형이 된 것으로 사법살인이었죠. 조봉암을 제거하라는 이승만의 지시가 있었다는 증언도 나왔구요.

 

그나마 이승만에 대항할 수 있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조병옥 뿐이었지만, 그는 당시 중병을 앓고 있었고 1월 29일 병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이승만과 정부는 '농번기를 피해야 한다'는 이유로 조기선거를 주장했고, 2월 초, '3월 15일에 정부통령선거'를 실기한다고 공표했죠. 그리고 조병옥은 2월 15일 미육군병원에서 사망했구요. 민주당에서는 그야말로 망연자실. 거리낄 것이 없어진 이승만은 "1956년 선거에서처럼 대통령과 부통령 당선자가 서로 다른 당에서 나오면,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응종치 않겠다"는 기절초풍할 2·13 담화를 내뱉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4·19 혁명의 첫 시위는 현재 보수의 성지가 된 대구에서 있었습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장면의 유세가 2월 28일 일요일이었는데, 정부에선 학생들이 유세장에 가지 못하게 영화 관람, 추가시험 등을 명목으로 강제 등교를 시켰죠. 이에 경북고를 비롯한 대구지역 8개 고등학교 총 1,200여 명의 학생들이 '학원을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며 시위를 벌였고, 정부는 학생들이 공산당 사주에 의해 시위를 벌였다며 경찰을 동원해 강제 해산시키고 관제시위를 동원해 '학생들은 자중하라. 학원으로 돌아가라'는 구호를 외치게 했습니다. 어버이연합과 엄마부대 등이 마구마구 떠오르는 장면이죠? 하지만 시위는 전국 각지로 번져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학생들이 앞장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행동을 시작했죠.

 

결국 다가온 3월 15일, 이날은 한국 민주주의의 흑역사로 기록된 3·15 부정선거가 벌어진 날입니다. 3·5인조 투표, 개표통 바꿔치기(올빼미표), 이승만을 찍지 않은 표에 개표원의 지장을 마구 찍어 무효표 만들기(피아노표), 야당 참관인 쫓아내기 등 정말 다양한 수법이 동원되었습니다. 만여 명이 넘는 마산 시민들이 이에 반발하여 시위를 벌였는데, 소방차가 전신주를 들이받아 전기 공급이 끊어져 일대가 어둠에 잠기자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했고, 총 8명 사망에 80며명이 부상을 입는 제1차 마산의거가 발생합니다. 

 

이승만은 이에 대해 공산당의 사주로 벌어진 시위라고 발표했고, 이승만 정권은 사망한 마산고 1학년 김용실의 주머니에 날조된 삐라를 집어넣는 등 천인공노할 조작을 감행하죠. 게다가 부통령에 당선된 이기붕은 "총은 쏘라고 줬지 놀라고 준 게 아니다"는 망발을 내뱉기도 했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앞서 평화적 시위대를 향한 정부 수립 최초의 대민발포였기에 더욱 파장은 컸습니다. 이후 정부에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장인인 홍진기 법무장관을 내무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후속조치를 벌였지만 홍진기 장관 역시 공산당 사주설을 주장함과 동시에 경찰의 실탄 발포를 지시하는 등 마찬가지의 행보를 보였죠.

 

그리고 4월 11일, 마산 신포동 부둣가에서 故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떠오르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3월 15일 시위에 참여했다가 최루탄을 맞고 죽은 상태로 발견된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경찰이 바다에 버려 은폐하려 했던 것. 미국제 최루탄이 눈에 박힌 그의 시신 사진이 부산일보의 특종으로 보도되자 마산은 그야말로 울분과 분노에 휩싸였고, 시민들은 마산 경찰서와 시청에 난입하며 제2차 마산의거가 터졌습니다. 정부는 이번에도 공산당 사주설을 주장하며 발포, 2명의 시민이 사망했죠. 

 

학생 뿐 아니라 마산시민들이 대거 참여한 마산의거가 보도되면서 전국은 혁명의 분위기가 감지되었습니다.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는데,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아 수십 명의 학생들이 다쳤죠. 그리고 다음날인 4월 19일, '피의 화요일'이라 불리던 날이 밝았습니다. 그동안 시위가 고등학생들의 주도로 이루어졌다면 이날은 그동안 잠잠했던 대학생들이 대대적으로 들고 일어났는데요. 서울에서만 10만 명 이상의 학생과 시민들이 몰려나왔고,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를 하면서 서울에서만 104명, 부산 13명, 광주 6명이 사망한 것을 비롯해 수백 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정부는 19일 오후 3시 서울지역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후 부산, 광주, 대전, 대구, 전주, 청주, 수원 등으로 반경을 넓혔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계엄군은 중립을 지켰는데, 이에 대해서는 군이 라이벌 의식을 느끼던 경찰 세력을 이승만이 비호했기에 군부 내에서 이승만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지배적. 또한 박정희가 계엄군을 위장해 이승만을 끌어내리고 쿠데타를 하려는 모의를 하고 있었기도 하죠. 

 

이후에도 경찰·계엄군과 시위대는 총격전을 벌이는 등 충돌을 이어가다 극적인 상황으로 해결이 됐으니, 시위대가 고려대학교에 모여 최후의 저항을 준비하던 중 서울지역 계엄을 담당했던 15사단의 사단장인 조재미 준장이 부관 2명만을 대동한채 캠퍼스에 들어와 학교 강당에 놓인 희생자들의 시신 앞에서 깍듯하게 조의를 표한 것. 이를 지켜보던 시위대들은 전원이 무기를 버리고 해산하고 계엄군에 연행되면서 이날의 시위는 일단락 되었습니다.

 

다음날인 20일, 이승만은 "어제의 난동으로 본인과 정부 각료들은 심대한 충격을 받았다"며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그러자 미국이 나서 월터 패트릭 매카나기 주한미국대사가 학생들의 행동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한 것을 비롯해 미 국무부 장관이 주미 한국대사에게 항의각서를 보냈죠. 그러자 국무위원이 일괄 사표를 낸 것을 비롯해 이기붕이 부통령 당선 사퇴를 고려하겠다고 발표하고 이승만이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겠다고 밝혔지만, 국민들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25일, 대학 교수 258명이 모여 시국선언문을 채택하고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로 나서 다시금 시위에 불이 붙었습니다. 교수들이 요구한 것은 이승만의 하야. 당시 교수라는 신분은 사회적 권위와 책임이 현재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기 때문에 경찰들이 얼씬도 못할 정도였다고 하는데요. 이들을 중심으로 모인 시민들은 서대문에 위치한 이기붕의 집을 파괴하고, 파고다 공원에 있는 이승만 동상을 철거했습니다. 

 

이날의 시위에는 어린이들까지 참여를 해 시위 군중이 10만 명으로 불어났죠. 출동했던 계엄군들은 시민들을 진압하지 않았고, 오히려 시위대의 환영과 박수를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이후 시위대와 계엄군의 탱크가 함께 움직이며 오히려 시위대를 보호하는 모습을 보이기에 이르렀죠.

 

26일, 김정렬 국방장관이 이승만에게 하야를 권유했고 이승만은 하야로 점차 가닥을 잡고 있었습니다. 송요찬 계엄사령관의 주선으로 시민·학생대표 5인과 이승만이 면담을 했는데, 이 자리에서 시민대표는 이승만에게 하야와 망명을 요구했죠. 결국 이승만은 10시 20분경 사임할 것을 발표했고, 시민들은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습니다. 이후 이승만이 다시금 국회에 제출한 사임서에 사인을 하지 않고 버티는 등 노욕을 부렸지만 오래 버티지 못했고, 수석국무위원인 허정이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게 되며 제2공화국이 출범, 이승만은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했죠.

 

당시 희생자들은 서울 수유동에 위치한 국립 4·19 민주묘지에 안장되어 있고, 오늘도 오전 10시 이낙연 국무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제58주년 4·19 혁명 기념식을 거행했죠. 참고로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와 김성태 원내대표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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