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JTBC 초청 대선후보 토론회 잘 보셨나요? 그간 진행된 TV토론회 중 가장 매끄럽고 정책토론이 이루어지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시청률이 15%를 돌파하며 JTBC 개국 이래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고 하죠. 손석희 앵커를 필두로 한 JTBC에 대한 신뢰도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달 초 JTBC 뉴스룸에서 손석희 앵커와 논란을 빚은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가 시작부터 "JTBC가 제일 편하다. 그동안은 벌 서는 것도 아니고"라며 만족감을 나타낸 데 이어 "오늘 손 박사(손석희 앵커)가 점잖더라. 시비 걸지도 않고 끝까지 점잖게 잘했다"고 평가했을 정도였죠.
관전 총평
전반적인 평가를 내려보자면 이번에도 역시 가장 후한 점수를 주고 싶은 것은 정의당 심상정 후보입니다. 불필요한 부분을 최대한 말을 아끼면서도 공격해야 하는 부분은 영점을 맞춰 정확한 타격을 하고 빠지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가장 '진보'라는 단어에 적합한 대선후보의 면모를 보여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를 입증하기라도 하듯 지지율이 8%대에 올라섰죠.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 역시 지난 선관위 주관 TV토론에서 "아유~ 유승민 후보님 실망입니다" "제가 갑철수입니까 안철수입니까?" "제가 MB 아바타입니까?"와 같은 주옥같은 말을 쏟아내며 징징거리는 유치한 모습을 노출했다는 점을 복기한 듯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더불어민주당(이하 더민주당) 문재인 후보에 대한 공격을 줄였다는 점인데요. 그동안 여러번 말했다시피 어떻게든 문재인 후보를 밟고 올라가려는 모습보단 묵묵히 자신의 비전을 보여주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지지율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하지만 표를 의식하여 어느 쪽으로도 적극적이지 못했던 부분이나, 대선후보보단 CEO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 면도 있다고 봅니다.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에 대해서는 무척 실망스러웠습니다. 바른정당 내에서 후보 의지와는 상관없이 단일화를 추진하고 있어서 멘탈이 나간 것일까요? 토론 내내 말꼬리를 잡고 문재인 후보를 때리는 데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개혁적 보수를 표방하면서도 지극히 '한국형 보수'라고 볼 수 있는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에게 밀리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죠. 자신의 지지층으로 흡수해야 할 대상조차도 명확하지 않아 보입니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는 이번 토론이 제일 불안정했습니다. 끊임없이 달라붙던 유승민 후보의 작전에 말려든 것으로 보이는데요. 유승민 후보의 뒤를 이어 홍준표 후보가 동성애 카드와 노무현 전 대통령 모욕을 시전하자 하얗게 불태우고 말았습니다. 유승민·홍준표 후보가 쏟아낸 말들의 진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시청자들은 문재인 후보의 감정기복을 확연히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되네요.
가장 약진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였습니다. 다른 부분은 모두 차치하고, 자신이 끌어와야 하는 지지층을 후보들 중에서 가장 잘 파악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닮고 싶은 리더십으로 박정희를 뽑은 것이 대표적인 예죠.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홍준표 후보의 지지율은 올라가고 있습니다. 안철수 후보로 치우쳤던 보수 민심이 홍준표 후보에게로 되돌아오고 있다는 분석이 신빙성있습니다. 두뇌를 거치지 않고 발언하는 듯한 그의 세상 모습을 보면서 가장 대통령에 대한 욕구가 없어 보인다는 건 저만의 생각일까요? 초반만 해도 자유한국당의 파산을 걱정하는 처지였으나 이미 10%를 돌파하면서 선거비용의 50% 지원을 확보했는데요. 제 판단으로 홍준표 후보의 목표는 15%의 득표를 받아 선거비용 전액을 보전받고 자유한국당을 장악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홍준표의 함정에 제대로 걸려든 문재인
자, 오늘의 주제를 시작해볼까요. 언제나 변함없는 모습과 발언을 보여오던 홍준표 후보였지만, 막 던지는 와중에 교묘하게 기술이 들어가 상대방에게 적잖은 내상을 입힌 공격이 있었습니다. 바로 군가산점과 동성애.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는 남녀를 갈랐고, 동성애 지지·반대를 매우 효과적으로 갈라놨죠. 군가산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문재인 후보의 말에 "5.18 가산점은 찬성하면서 군가산점은 반대하냐"며 기술 들어간 홍준표. 저 역시도 군가산점에 적극 찬성은 물론 오히려 더 확대시켜야 한다는 입장이기에 군가산점 대신 제시한 호봉 가산이나 연금 크레딧 등의 대안도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그래도 크게 이슈가 되진 않았습니다. 문재인 후보가 정말 제대로 걸려든 문제는 동성애였어요. 우선 어제 관련 토론 내용을 잠시 살펴보시죠.
홍준표: 군 동성애 문제가 군 사기 저하를 일으키고 아주 심각한데 동성애 반대합니까?
문재인: 반대합니다.
홍준표: 반대합니까?
문재인: 그럼요.
홍준표: 박원순 시장은 동성애 파티도 서울 거기 앞에서 하게 해줬는데?
문재인: 서울광장을 사용할 권리에서 차별을 두지 않은 것입니다.
홍준표: 차별금지법이라고... 이게 사실상 동성애 허용법인데... 동성애 반대하는 게 분명합니까?
문재인: 저는 뭐...동성애 좋아하지 않습니다. 합법화 찬성하지 않습니다.
기어코 문재인 후보의 입에서 '동성애 반대한다'는 끌어내고만 홍준표 후보. 이에 대해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는 tbs교통방송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보수 기독교의 선을 그은 것, 또 군대 내 동성애 합법화 문제하고 동성애 혐오 문제, 소수자 인권 문제를 순간적으로 뒤섞었다"고 설명하며 "이 공방은 우리나라 대선 토론상 처음 등장한 이슈다. 홍준표 후보의 편을 가르는 큰 기술이 들어간 것"이라고 평했습니다.
이 논란에서 가장 점수를 딴 것은 다름아닌 심상정 후보. 두 후보의 논쟁 뒤 1분 찬스를 사용한 심상정 후보의 발언은 동성애에 관해 정치인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모범답안이라고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심상정 후보의 발언을 살펴보면 굳이 찬/반을 대답할 필요도 없던 문제인데, 홍준표 후보의 함정에 말려들었음을 여실히 알 수 있죠.
동성애는 찬성이나 반대를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성 정체성은 말 그대로 개인의 정체성입니다. 저는 이성애자이지만 성 소수자의 인권과 자유는 존중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노무현 정부 때부터 추진됐던 차별금지법... 계속 공약으로 냈었는데 이제는 후퇴한 문재인 후보에게 매우 유감스럽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홍준표 후보의 공격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2부 주도권 토론 중 자질 검증에서도 홍준표 후보는 다시금 동성애 문제를 들고 나왔습니다. 하지만 두번째 함정에서는 문재인 후보가 말려들지 않았는데요. 동성애 찬성 반대 의견 대신 동성혼 합법화 반대로 입장을 정리하려는 문재인 후보에게 홍준표 후보는 재차 동성애 반대 답변을 듣기 위해 질문을 던지는가 하면 '동성애 때문에 에이즈(HIV)가 창궐한다'는 편견에 기반한 혐오발언을 쏟아내기도 했습니다. 이 대화 역시 한번 살펴보시죠.
홍준표: 아까 동성애 반대한다고 하셨죠?
문재인: 동성혼 합법화할 생각 없습니다.
홍준표: 합법화가 아니라, 동성애 반대한다고 했죠?
문재인: 차별은 반대합니다.
홍준표: 동성애 때문에 얼마나 대한민국에 만4천명 이상 에이즈가 창궐하는 줄 아십니까?
문재인: 그런 식의 성적인 지향 때문에 차별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과 동성혼을 합법화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비록 두 번째 공격에서 멘탈을 부여잡고 답변하긴 했습니다만, 문재인 후보는 '동성애 딜레마'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동성혼 합법화에 관련해서는 심상정 후보(동반자등록법 제정)를 제외하고 나머지 네 후보가 모두 반대 입장입니다. 하지만 홍준표·안철수·유승민 후보는 동성혼, 동성애 모두 적극반대 의견인데 비해 문재인 후보는 동성혼에 대해선 "민법상 허용되지 않는다"며 반대하면서도 동성애에 대해서는 "불합리한 사회적 차별에는 반대한다"는 식으로 발을 걸쳐뒀죠. 홍준표 후보는 바로 이 점을 노렸던 것입니다. 어짜피 보수층에서 동성애에 긍정적인 사람은 없다는 판단하에 문재인을 지지하는 진보층을 가르겠다는 생각인 것이죠.
홍준표 후보의 이러한 공격은 효과가 좋았습니다. '문재인 동성애 반대'라는 언론의 보도가 쏟아지고, 동성애를 지지하는 이들의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문재인이 무슨 자격으로 개인의 성 정체성에 대해 찬성한다 반대한다 왈가왈부하냐'부터 시작해서 진보성향의 대선후보 입에서 나온 발언이라곤 믿기 어려울 만큼 실망스럽다는 반응이 주를 이뤘습니다. 오늘 국회에서 있었던 '국방안보 1000인 지지선언'에 참석해 연설을 마친 문재인 후보의 앞에서 성소수자들이 문 후보의 사과를 요구하며 기습 항의 시위를 벌이기도 했죠. 시위 참가자들은 이후 경찰서로 연행됐으나 더민주당 측에서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경찰 측에 알렸다고 합니다.
문재인 후보 지지자들은 댓글을 통해 '다른 후보들한테는 왜 가만히 있고 문재인 후보한테만 난리냐'는 등의 방어를 했는데요. 그 이유를 모른다면 설명해드릴 수 있습니다. 다른 후보들한테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고, 애초에 사과, 대화 등을 통해 보다 나은 미래를 이끌어낼 가치조차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죠. 진보 성향을 표방한 문재인 후보에게 기대를 걸었지만, 그의 입에서 '동성애 반대합니다'라는 명확한 워딩이 흘러나왔고 이는 성소수자 뿐 아니라 동성애를 지지하는 이들에게 실망을 주기에 충분했던 것이죠. '왜 문재인 후보한테만 난리냐'가 아니고 문재인 후보 역시 홍준표·안철수·유승민 후보와 별반 다를게 없어진 겁니다. 원래 기대치가 없던 사람보단 기대중이었다가 실망한 사람에게 성토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요?
20년 전 대선후보들의 동성애 인식은 어땠나
문재인 후보의 동성애 논란을 지켜보던 경향신문이 20년 전인 제15대 대선을 언급하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1997년 11월 28일자 한겨레신문에서 당시 대선후보들에게 동성애자들의 운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을 던졌는데요. 그 답변을 한번 살펴보시죠.
동성애자들의 사생활도 인정받고 인권도 보장돼야 한다는 데는 공감이 가는 점도 있다. 그러나 동성애가 일반인들에게 정상적인 것으로 비치지 않는 현실에서 이들의 사회운동화를 선뜻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으로 본다
이회창 신한국당(현 자유한국당) 후보
사회에 저항하고 자신의 성아이덴티티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긍정적... 중요한 것은 동성애자를 하나의 신성한 인격체로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
이인제 국민신당 후보
나는 동성애에 동의하지 않지만 동성애도 이성애와 같이 인간에 대한 애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조건 이단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동성애자 활동 역시 인권 보장의 한 부분으로 접근하는 시각이 필요하다.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현 더불어민주당) 후보
한국 사회가 동성애 운동을 수용할 수 있는 충분한 사회적 여건을 갖추었고, 당국 역시 이러한 사회 조류에 발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권영길 국민승리 21 후보
2002년 제16대 대선을 앞두고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커밍아웃과 성소수자의 인권을 위한 기본 정책에 대해 보수성향의 이회창 신한국당 후보는 "업무수행에 차질을 빚거나 조직생활을 할 수 없는 게 아니라면 상관없다" "사회적으로 해악을 입히거나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열린 눈으로 보아야 한다"고 답변했고,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는 "경우에 따라 커밍아웃이 무모한 일이 될 수 있기에 개인적으로 말리고 설득을 해보고 싶지만 관계가 달라질 일은 없을 것" "심정적으로는 동성애 정서와 관련해 동의하지 못하는 점이 많지만, 차이로 인해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입장은 분명하다"라고 밝혔죠. 여기서 알 수 있는 점은 2017년 대선후보들의 관련 발언은 20년 전에 비해 포용적이지 못하다는 점과, 이 사회가 그리 진보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저 역시도 이성애자이지만 동성애 이성애를 제3자가 나서서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성애자들이 '우리 사랑해도 되겠냐'며 사회에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문재인 후보는 아무래도 이 문제에 대해서 추후 입장을 정리해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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