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는 폴란드 공식 방문을 마친 뒤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전격 방문했습니다. 역대 대통령 중 파병지가 아닌 전시 국가를 공식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지난 14일 오후 2시 30분, 폴란드 바르샤바 한 호텔에 설치됐던 순방기자단 프레스센터에서는 돌연 대통령실 관계자들이 프레스센터 문을 닫은 뒤 "여기 대한민국 기자 아닌 분 계십니까?"라며 외부자의 존재를 점검했고, 이후 우크라이나 공식 방문 일정을 알렸다고 합니다. 국내로 복귀 직전이었던 터라 이미 호텔 체크아웃과 수하물 체크인을 마친 상태였지만, 기자들은 부랴부랴 이를 취소했고, 보안상 이유로 전화, 문자메시지, 카카오톡 등의 사용도 모두 제한됐다고 하죠. 겨우겨우 텔레그램 메시지로 "순방기간이 연장됐다"고만 회사와 가족들에게 연락한 기자들이 복귀 후 전한 당시 상황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14일 저녁 항공기, 차량, 기차 세 가지 루트를 섞어서 14시간을 걸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현지에서 11시간을 체류하며 일정을 소화했고, 돌아오는 데에는 다시 13시간이 걸렸죠. 왕복 27시간에, 도중 드론 공격지까지 통과해야 하는 위험을 감수한 방문이었습니다. 방문 루트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및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등 주요국 정상들이 우크라이나를 방문할 때와 비슷한 동선이었던 것으로 추정될 뿐 안보상 이유로 구체적인 루트는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폴란드로 바르샤바로 복귀 후 있었던 기자회견에서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노후화된 철도 노선과 설비 때문에 기차가 자주 흔들려서 마시고 있던 음료수가 엎어지기도 했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는데요. 윤석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공식 방문을 결단한 배경에 대해 "몸소 눈으로 현장을 확인할 때 구체적인 상황을 평가할 수 있고, 피부로 느끼면서 무엇을 필요로 하고 어떤 협력을 할 수 있는지 정확히 식별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 인근의 부차시 학살 현장, 그리고 민간인 주거지역으로 미사일 공격이 집중됐던 이르핀 등지를 둘러봤습니다. 또한 수도 키이우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110분간 정상회담을 통해 안보·인도·재건 지원을 포괄하는 '우크라이나 평화 연대 이니셔티브' (이하 '우크라이나 이니셔티브')를 추진하기로 했죠. 이는 지난 5월 일본 히로시마 G7 정상회의 이후 젤렌스키 대통령으로부터 "대한민국이 향후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에 참여했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받은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이니셔티브는 ◎평화공식 정상회의 개최 ◎군수지원 확대 ◎식량·에너지 안보 협력 강화 ◎인도적 안전 장비 지원 확대 ◎재정 지원 확대 ◎우크라이나 아동 심리 치료 지원 ◎경제협력기금(EDCF) 및 공적개발원조(ODA) 지원 ◎교육 프로그램 지원 ◎윤석열·젤렌스키 장학금 설립 등 9가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윤석열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방문은 국내에서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국내가 기록적인 호우로 이해 침수 피해가 확산되는 상황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있어야 했을 곳은 우크라이나가 아니라 대한민국이었다는 비판이죠. 박지원 전 국정원 원장은 페이스북을 통해 "지금 시민, 소방대원, 공무원 등 전국 각지에서 우리 국민은 재난과 전쟁을 하고 있다"며 "대통령은 어디 계시냐"고 꼬집기도 했는데요.
이에 대해 대통령실 관계자는 "당장 서울로 대통령이 가도 상황을 바꿀 수 없었기 때문에 필요한 지시는 하겠다 생각해서 하루에 한번 모니터링하신 걸로 알고 있다"고 한국으로 곧장 복귀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젤렌스키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직후에도, 우크라이나에서 폴란드로 복귀하는 열차에서도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를 화상으로 연결해 점검 회의를 주재하며 인명 및 재산 피해 최소화를 지시했다는 것이 대통령실 측의 답변. 또한 국내의 호우 상황을 고려해 우크라이나에서의 현지 일정을 최소화했다고 부연 설명했죠.
두 번째 이유는 바로 러시아와의 관계를 순식간에 적대적으로 공인했다는 점입니다. 그간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긴 했지만 간접적, 그리고 인도적인 지원만 해왔던 우리나라는 이렇게 우크라이나를 전격 방문함으로써 한국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에서 누구의 편에 서 있는지 공식화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권칠승 수석대변인은 16일 국회 소통관에서 브리핑을 열고 "윤 대통령은 지난 4월 외신 인터뷰로 러시아를 자극해 우리 국민을 안보 위협에 빠뜨린 일을 벌써 잊었는가"라며 "이번 일로 러시아의 영향력 아래 있는 북한이 무장을 강화하는 등 한반도 긴장이 고조되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스럽다"고 윤석열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방문을 비판했습니다.
러시아는 우리나라와 15번째 규모의 교역 상대국입니다. 러시아에 진출해있는 우리 기업들도 다수이며, 16만 명의 교민들 또한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죠. 지난 4월 윤석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군사적 차원의 지원 가능성을 시사했던 외신 인터뷰에 자극을 받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제공할 경우 한국과 러시아 관계가 파탄날 것"이라고 강한 어조로 불쾌감을 표시했었습니다. 이에 대해 윤 대통령은 "살상무기를 공급한 사실이 없습니다만 어디까지나 우리 주권의 문제"라며 일축한 바 있구요.
국내의 호우 상황이 윤 대통령이 한국으로 바로 복귀했던들 변할 것이 없었다는 대통령실의 입장을 뒤집어서 얘기해보자면, 우크라이나에 간 것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을 크게 바꿀 수 있는 입장이어서 간 것인가요? 윤석열 대통령과 이번 정부의 외교력이 무척 아쉽기만 합니다. 주권을 운운할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서 균형감 있는 외교력을 보여줄 순 없었을까요? 자서전 <운명이다>에서 “비가 오지 않아도, 비가 너무 많이 내려도 다 내 책임인 것 같았다. 대통령은 그런 자리였다”고 쓴 故 노무현 전 대통령. "당장 서울로 대통령이 가도 상황을 바꿀 수 없었다"고 말하는 윤석열 대통령이 조금만이라도 대통령직에 대한 책임감을 느낄 순 없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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