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이치 사나에 전 일본 경제안보담당상, 자민당 신임 총재로 선출
다카이치 사나에 전 일본 경제안보담당상이 4일 일본 자유민주당(이하 자민당) 제29대 신임 총재로 선출됐습니다. 다카이치 사나에 신임 총재는 오는 15일 일본 임시국회에서 총리지명선거를 거쳐 제104대 일본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할 것이 사실상 확정되어 있습니다.
4일 도쿄 자민당 본부에서 치러진 제29대 총재 선거 결선 투표에서 185표를 얻으며 156표에 그친 고이즈미 신지로 농림수산상을 29표 차로 누르고 당선됐습니다. 앞선 1차 투표에서는 다카이치 신임 총재가 183표, 고이즈미 농림수산상이 164표를 얻어 1위와 2위를 차지하며 막판 '다크호스'로 부상했던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을 제치고 결선에 올랐습니다. 작년 9월 있었던 자민당 총재 선거 1차 투표에서 1위를 기록하고도 결선 투표에서 이시바 시게루 총리에게 역전당했던 다카이치 신임 총재는 당원들로부터 가장 많은 지지를 얻은 것을 비롯해 열세로 평가됐던 의원 투표에서도 보수 성향 의원들의 표를 모으며 2차 투표까지 그 기세를 이어갔습니다.
고이즈미 신지로 농림수산상 탈락 '이변'... 지역민심 작용했다
이번 다카이치 총재 선출은 일본 정치 구조에서 예상치 못한 이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민당 의원들 사이에서 지지세가 약한 다카이치가 1차 투표에선 이기더라도, 결선에선 고이즈미 신지로 농림수산상에 패하리란 관측이 지배적이었죠. 1차 투표에서 다카이치 총재가 얻은 의원표는 64표로, 고이즈미 농림수산상(80표)보다 적었습니다. 결선 투표는 의원 295표와 47개 도도부현(광역자치단체) 47표를 합쳐서 산출하기 때문에 국회의원 표의 영향력이 커지기 때문에 다카이치 총재가 불리할 것으로 보였죠.
하지만 의원 투표가 시작되기 전 도도부현별 당원표 결과 수치가 돌면서 흐름이 변했습니다. 다카이치가 당원·당우표를 119표나 얻어 84표에 머무른 고이즈미를 압도했기 때문이었죠. 2027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보수층의 이탈 우려가 커지고 있고, 지난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일본인 퍼스트'를 내세운 참정당이 약진하는 등 자민당의 기반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의원들은 지역민심을 거스를 수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아소 다로 전 총리가 자신이 이끄는 아소파 의원들에게 "당원 표를 많이 받은 후보를 지지하라"고 지시했고, 아소파 의원 43명이 사실상 다카이치 총재로 표를 모은 것으로 보입니다.
가는 길 마다 '여성 최초'... 국제무대 데뷔 빠르게 예정
자민당 최초 여성 총재로 선출된 다카이치 총재가 임시국회에서 일본 총리로 지명되면 일본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됩니다. 이로써 다카이치 총재는 일본 정계에서 가는 길마다 '여성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며 유리천장을 뚫은 상징이 됐습니다.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재집권한 2012년에는 당 요직 중 하나로 꼽히는 정무조사회장이 됐는데, 자민당에서 여성이 이를 맡은 것도 다카이치 총재가 처음이었죠. 2014년엔 장관직 중에서도 요직인 총무장관직에 올랐는데, 이 역시 첫 여성 총무장관이었습니다. 게다가 비세습 정치인이 총재가 된 것도 이례적.
당선을 확정지은 다카이치 총재는 "일하고, 일하고, 또 일하겠다"며 일성을 냈습니다. "모든 세대가 전력을 기울여 힘쓰지 않으면 (당을) 재건할 수 없다"며 "나 스스로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말을 버릴 테니 모두 마차를 끄는 말처럼 열심히 일해달라"고 말한 다카이치 총재는 자민당 70년 역사에 첫 여성 총재가 됐다는 점을 인식한 듯 "새로운 시대를 새겼다"며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도 덧붙였죠.
다카이치 총재가 일본 총리로 취임하면 국제무대에 빠르게 신고식을 치를 전망입니다. 당장 이달 말 말레이시아에서 열리는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정상회의가 있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해 미·일 정상회담이 예정됐죠. 이후 곧바로 한국 경주에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도 참석합니다.
'여자 아베' 다카이치 총재, 한·일관계 괜찮을까?
다카이치 총재는 그간 '여자 아베'로 불릴 정도로 극우 성향을 보여왔습니다. 아베 신조 전 총리와 국회 입성 동기이기도 하지만, 아베 내각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며 유력 정치인으로 발돋움했죠. 이번 선거에서는 보수적 색채를 희석하는 데 노력하긴 했지만 아베 신조 전 총리 정책을 계승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만큼 다카이치 총재는 자신을 지지해 준 보수층을 고려해 국정을 운영할 것으로 보입니다.
다카이치 총재는 과거 "한국같은 나라가 기어오르지 못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막말을 한 것 뿐 아니라 이번 선거에서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일본이 주장하는 독도 명칭)의 날' 행사에 참여하는 정부 대표를 차관급에서 장관으로 격상해야 한다"며 한국을 자극했습니다. 그리고 총재로 선출된 후 있었던 기자회견에선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관련해 "적시에 적절하게 판단할 것"이라는 모호한 입을 밝혔죠.
다카이치 총재는 "야스쿠니 신사는 전몰자 위령을 위한 중심적인 시설"이라며 "어떻게 위령을 할지, 어떻게 평화를 기원할지는 적시에 적절히 판단할 것"이라며 "이것은 절대 외교문제로 삼을 일이 아니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잃은 분들에게 경의를 표할 수 있는 국제환경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 가고 싶다"고 부연했죠. 하지만 다카이치 총재가 그간 제2차 세계대전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를 자주 참배해온 만큼 한국과 일본 양국 관계 경색에 대한 우려가 있습니다. 다카이치 총재의 당선에 대해 외교부 당국자는 "한일 양국은 격변하는 지정학적 환경과 무역질서 속에서 유사한 입장을 가진 이웃이자 글로벌 협력 파트너인 만큼, 앞으로도 미래지향적 관계 발전을 위해 양국이 함께 노력해 나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습니다.
고물가 잡고 추락하는 자민당 위상 되살려야 하는 과제 당면해
다카이치 총재가 당면한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습니다. 실제로 다카이치 총재는 당선 뒤 "지금 기쁘다기보다는 지금부터가 진짜 큰일(이라는 생각)"이라며 "함께 힘을 합쳐 해결 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죠. 자민당은 소수여당으로 정국 운영에 큰 어려움이 불가피한 상황입니다. 현재 연립여당을 꾸린 공명당 외에 또 다른 야당과 연립들 확대가 논의되는데 여당으로서 입지를 더 좁힐 수밖에 없는데요. 그간 일본 정치권에서 '절대 강자' 자리를 유지해오던 자민당의 추락을 어떻게 막아낼 것인지가 주요 관심사입니다. 1990년대 초반 당원 수가 500만 명을 넘었지만, 현재 90만 명대까지 떨어진 상황인 자민당은 당 인기 하락과 함께 지지층이 줄어드는 결과로 선거 때마다 득표율이 낮아지면서 집권당 자리를 위협받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죠.
국내적으로는 이시바 시게루 총리를 1년 만에 끌어내린 주요 원인인 고물가 상황이 개선될 조짐이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나라 곳간을 털어 5500억달러(774억원) 규모 대미 투자를 해야 하는 과제 등이 고스란히 남아있죠. 당분간 물가 상승 대책에 우선 대응하고, 임시국회에서는 야당의 협력을 얻어 추가경정 예산안을 통과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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