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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인혁당 사건 발언, 헌정과 역사를 철저히 무시한 유신의 공주

자발적한량 2012.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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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인혁당 사건 관련 발언, 헌정과 역사, 국민을 부관참시한 독재자의 딸






 기가 차서 말이 안나옵니다. 그렇지 않아도 박근혜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이었습니다. 그동안 박근혜에 대한 논란에 대해 몇가지 소개한 적도 있죠. 오늘 쓰는 글 역시 박근혜 스스로 자신은 부정할 수 없는 유신의 공주이며, 아버지 박정희의 독재를 찬양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과 아픔을 안긴 그 시절을 미화하는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언급했던 인혁당 사건, 자세히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잠시 언급을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1975년 4월 9일에 있었던 인혁당사건. 정식 명칭은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입니다. 인혁당 사건은 1차,2차로 나눌 수 있는데, 이건 제2차 인혁당사건입니다. 1972년 12월에 있었던 유신체제 발족과 1973년 8월 8일 김대중 납치사건 등으로 독재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에 의해 데모 등을 통한 박정희 정부 반대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1974년 대표적인 유신 반대투쟁이었던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하자, 중앙정보부는 1974년 4월 25일에 긴급조치 4호와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240명을 체포합니다.



 그들의 죄상은, '인혁당 재건위원회'를 설립, 인혁당을 재건하여 민청학련의 국가 전복 활동을 지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중 대다수가 1975년 2월 15일에 사면, 복권되었으며 나머지 38명에 대해서는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이 내려졌는데, 이들 중 도예종, 하재완, 우홍선 등 피고인 8명에게는 사형, 김한덕, 나경일 등 피고인 9명에게는 무기징역, 김종대, 황인성 등 피고인 12명에게는 징역 20년, 전재권, 임구호 등 피고인 8명에게는 징역 15년의 유죄 판결을 선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사형 선고를 받은 피고인 8명은 판결이 내려진 지 불과 18시간 후에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스위스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이 사건으로 사형이 집행된 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하였죠. 당시 인혁당사건 연루자들과 이들을 지켜본 교도관들이 전하는 고문의 실상은 말 그대로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중앙정보부 수사관들과 파견 경찰관들에 의해 구타, 몽둥이, 찜질, 통닭구이, 물고문, 전기고문 등이 자행되었는데, 하재완 열사는 물고문으로 아랫배가 불룩하였고 온몸에 피멍이 들었으며, 우홍선 열사와 함께 고문 후유증 때문에 조사받은 뒤 업혀서 구치소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법정진술에서 우홍선 열사는 "고문받을 떄는 조사받는 3층에서 떨어져 죽고 싶었으며, 전기고문을 두번만 더 돌리면 심장이 파열돼 죽을 것 같았다. 고문 수사관은 술에 취해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박정희정권은 4월 10일 사형수들의 시신을 가족들에게 인도한다고 발표하였습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억울하게 죽은 희생자 8인의 장례식을 준비하며 추도 미사가 끝난 후 미군 관계 의사들이 시체를 검시하는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4월 10일 오전, 사형수의 시신을 실은 장의차 행렬이 명동성당 입구로 들어서자 3백여 명의 기동경찰은 삼엄한 경계 속에서 강제로 영구차를 돌려 벽제 화장터 쪽으로 몰고 갔습니다. 유족들과 실랑이가 벌어졌지만, 경찰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격분한 제임스 시노트 신부는 장의차 앞에 누웠지만 경찰에 의해 개처럼 끌려가 발길질을 당했죠.



 과연 어떠한 이유로 정부 전복을 기도했다는 '빨갱이'의 시체를 화장까지 시켜주는 친절을 보여주었을까요? 8구의 시신에 역력히 남아있던 잔인무도한 고문의 흔적이 알려지는 것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을까요? 마지막까지 증거인멸을 위해 시신마저도 훼손해버리는 폭력집단의 또 하나의 범죄행위이며 광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002년 9월 12일 의문사진상규명의원회는 인혁당 사건이 중앙정보부의 조작이라는 진상조사를 발표하였으며, 2005년 12월 7일 국가정보원 과거사위가 '인혁당 사건은 조작'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또한 재판부가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재심 소를 받아들여 2006년 12월 18일 검찰이 이례적으로 구형없는 논고를 하였고, 2007년 1월 23일 서울 중앙지법에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 8인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합니다. 2007년 8월 21일 희생자의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에서는 국가가 총 637억여원을 배상해야 된다는 판결을 내리며 기나긴 싸움을 마치게 되었죠.






 자, 박근혜 후보가 인혁당 사건에 대해 언급한 것은 이번 뿐이 아닙니다. 그녀는 2004년 8월 및 2005년 12월에 공개적으로 '인혁당 사건은 조작'이라는 국가정보원의 발표에 대해 가치가 없고 모함이며 진실성이 없다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제인 9월 10일.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해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똑같은 대법원에서 다른 판단이 나왔디 때문에..."라고 언급하며 피해 유족에 대한 추가적 사과나 새롭게 변화한 입장은 없다고 밝혔습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망언입니까? 이미 역사적, 사법적으로 판단이 내려진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수용하지 않겠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1975년 4월 8일 당시 8명의 피고인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대법원은 이미 유신 체제하에서 '정권의 시녀'로 전락한 상황이었습니다. 삼권분립 등 헌정절차가 정지된 박정희의 유신 때 이뤄진 유죄 판결과 민주화가 된 이후 사법부가 무죄로 교정한 판결의 효력을 동일시하는 박근혜 후보. 이 얼마나 무섭고도 끔찍한 아닙니까? 이번 발언은 역시 박근혜의 머릿속에는 아버지 박정희, 그리고 유신 독재에 대한 향수와 권력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행위라도 서슴치 않고 할 수 있다는, 그리고 그러한 행위는 설령 잘못이라 할지라도 용서될 수 있다는 그녀의 생각을 나타내줍니다.



 박정희라는 독재자 한명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무고한 피고인들에게 사형집행을 선고하고, 이에 모자라 18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해버린, 유신독재의 성격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인 인혁당 사건. 새누리당의 대선후보인 박근혜는 유신독재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동일시하는 모습으로 역시 '독재자의 딸'다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명불허전입니다. 헌정을 짓밟은 5.16 쿠데타를 미화함으로 모자라 세계적으로 비난받은 사법살인의 대표적 사건인 인혁당 사건에 대하여 미화, 왜곡을 서슴지 않는 그녀의 역사관. 말로만 '국민'을 외치며 아버지에 의해 저질러진 살인을 옹호하고 사법적 판단을 부정하는 사람은 민주주의의 땅인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될 자격이 심히 부족합니다.



 참고로 같은 날 김창종 헌법재판관 후보자는 인사청문회에서 '판결이 2가지가 존재할 수 있느냐'는 민주통합당 박영선 의원의 질문에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서 "최종적인 견해가 최종결론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습니다.



 다음 소셜픽 박근혜 인혁당사건 관련 베스트글에 선정되었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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