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기념 ②] 충무공 이순신의 성지 제승당에 친일파 이선근의 흔적이?

Posted by 자발적한량
2019.02.28 23:51 내가 밟고 있는 땅/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경남 통영시 한산도에 위치한 통영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 제승당으로 널리 알려진 이 곳은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삼도 수군을 지휘하던 곳입니다. 한산대첩으로 제해권을 장악한 이순신 장군은 이 곳을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으로 삼아 나라를 지켜냈죠. 이순신 장군은 1593년 7월 15일부터 한양으로 압송된 1597년 2월 26일까지 3년 8개월가량을 이 곳에서 머물렀으며, 난중일기 1,491일 분량 중 1,029일이 이 곳에서 쓰여졌기도 합니다.



제승당은 1597년(선조 30년) 폐진되었다가 1739년(영조 15년) 제107대 통제사 조경이 중건을 했고, 1959년 사적 제113호로 지정된 것에 이어 1975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6억2천만 원의 예산을 들여 9개월동안 제승당 성역화 사업이 진행,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무사를 비롯해 통제사 조경이 충무공을 기리며 세운 유허비, 해군작전사령관실과 같은 역할을 하던 제승당, 이순신 장군이 활을 쏘던 한상정, 수루 등이 있죠.


제가 제승당을 처음 가본 것은 2013년 여름이었습니다. 제승당을 둘러보다 눈길을 멈추게 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제승당 정화기념비. 박정희 대통령 재임 당시 이루어진 제승당 성역과 작업을 기념하여 세운 비석입니다. 비석에 새겨진 글씨는 국전 사상 최초로 서예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평보 서희환 선생이 썼고, 비문을 지은 사람은 당시 동국대학교 총장이었던 이선근이 지었습니다.



하성 이선근. 1905년 개성에서 태어나 휘문고와 와세다대학을 졸업했으며, 조선일보 정치부장과 송고고등학교 교사로 있었던 이선근은 광복 후 한성일보 주필이 되었다가 조선청년당, 대동청년단을 창단해 이승만을 총재로 추대하고 자신이 부단장이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국방부 정훈국장, 문교부(현 교육부) 장관을 지냈고, 제3대 대통령 선거에 개입한 것을 이유로 고발을 당한 뒤 국회에서 불신임안이 통과되면서 불명예 퇴진을 하게 됐죠. 하지만 그 이후로도 동아대 교수, 성균관대 총장, 대한상무회(현 재향군인회) 회장, 경희대 교수, 영남대 총장, 동국대 총장, 대한교련(현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 등을 지내며 박정희와 전두환을 찬양하며 유신 독재, 신군부 세력의 독재를 찬양한 나팔수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두 눈을 의심한 것은 이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그가 친일반민족행위자였기 때문이죠. 이선근은 1937년 만주국으로 가서 만몽산업주식회사 상무이사가 되어 관동군에 군량미를 공급했으며, 만주국 협화회의 협의원을 지내는 등 친일 반민족 행위를 벌였습니다. 

(전략) 대동아공영권의 가장 건실한 신(新)질서를 건설해야만 될 것은 유구한 인류역사가 우리에게 부과한 중대 사명으로 (중략) 좀더 솔직하고 좀더 용감하게 신체제 건설에 희생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중략) 특히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의 활동은 (중략) 민족협화(民族協和)의 신흥제국(新興帝國, 만주제국 지칭)에 있어서 가장 솔직한 자기반성으로 이 운동의 광휘 있는 실천은 장래 선계(鮮系, 조선인)국민에게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신적으로 반드시 좋은 영향을 가져오리라고 봅니다 (후략)


『삼천리』 1940년 12월호



그 당시 만주는 출세욕에 불타는 군인·지식인, 일확천금을 노린 모략자·협잡꾼들이 앞다퉈 모여들던 '동양의 서부'였습니다. 일본인과의 차별대우에 좌절을 맛본 조선 청년들에게 만주는 기회의 땅이었죠. '긴 칼 차고 싶어서' 문경보통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만주로 가 혈서까지 써가며 천황에게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맹세한 박정희가 대표적이었구요. 이선근 또한 개성 백만장자의 아들로 자신과 같은 와세다대학을 나온 공진항(전 농림부 장관)과 의기투합해 만몽산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조선인 유랑민을 동원해 안가농장이라는 대규모 농장을 만들었습니다.


안가농장은 총면적 7천만 평, 수용가구만 4천 가구에 달하는 커다란 규모였는데요.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우창따미(五常大米)'는 지금도 중국 최고의 쌀로 소문이 나있는데, 이렇게 거둬들인 쌀은 항일세력을 토벌하던 관동군의 군량미 충당에 사용되었습니다. 거의 보급기지였던 셈이죠. 당시 안가농장의 조선인 중에서는 이러한 사실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공진항과 이선근을 '오갈 데 없는 조선인들 거둬서 일하게 해주고 먹여 살려준 고마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이선근은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 활동을 했는데요. 1940년 10월 만주국 수도 신경(현 장춘)에서 발족한 이 단체는 관동군을 측면 지원하던 조선인 주축의 대표적인 친일조직이었습니다. 육당 최남선이 이 단체의 고문을 맡았었는데요. 이선근은 이 단체에서 상무위원을 지냈으며, 이러한 공로 덕으로 만주국의 국회 격인 협화회 협의원에 발탁되죠.


이런 친일반민족행위자가 해방 후 제대로 이미지 변신을 하게 됩니다. 화랑도 연구로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한국독립운동사'를 저술하기도 했죠. 이승만 정권 하에서 문교부 장관, 성균관대 총장을 역임한 뒤 박정희 정권에서는 그야말로 훨훨 날아다녔습니다. 박정희 정권 당시 '만주인맥'은 권력기반의 한 줄기를 두고 있었는데, 1968년 '국민교육헌장' 제정에 참여한 이후 위에서 나열했던 교육·문화계 요직을 두루 거쳤죠.


유신 옹호 논문을 쓴 것을 비롯해 동국대 총장 취임사에서 "민족, 국가가 총력을 기울여 추진하고 있는 유신 정신, 새마을정신으로 우리 동대의 발전을 위해 서로 협력하고..."라고 할 정도로 유신독재 체제를 선전하고 다닌 이선근은 광주 민주화 운동이 불과 3개월 지난 1980년 8월 인터뷰에서 "전두환 장군은 위기상황 극복의 최적임자" "전두환 장군을 다음 대통령으로 선출해야 된다는 데 국민의 여망이 모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국민의 의식수준이 높음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아부를 쏟아내기도 했습니다.



1983년 사망한 이선근은 을지무공훈장 상이기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5·16민족상 학예상 본상 등을 수상한 '국가유공자'의 자격으로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국가유공자 묘역에 묻혀 있습니다. 그의 외아들은 과학기술처 초대 원자력국장, 한국과학기술원(KAIST) 원자력 및 양자공학과 교수를 지내는 등 한국 원자력계의 거목이었던 故 이병휘 전 교수이며, 손자는 이인규 고려대 전기전자전파공학부 교수, 손녀는 이선호 세종대 수학통계학부 교수, 이선영 전 MBC 아나운서입니다. 큰 손녀사위는 금호아시아나 기내식 대란의 시발점이었던 샤프그룹의 백순석 대표이사이며, 작은 사위는 김명식 임페리얼 칼리지 교수입니다. 이선근의 자손들에게 그의 친일행각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마땅치 않은 일이나, 과연 그가 만주 벌판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사그라진 이름 없는 독립운동자의 자손들이었다면 현재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을까요? 이선근이 친일반민족행위, 유신 독재 찬양 등으로 쌓은 부와 명예는 고스란히 자손들에게 되물림되어 있습니다.


내일은 3·1운동이 있은 지 10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조선을 쳐들어온 일본군과 맞서 싸우며 풍전등화에 놓인 나라를 구한 성웅 이순신 장군의 숨결이 담겨 있는 제승당에,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흔적이 버젓이 있다는 것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습니다. 제승당의 관리 주체는 경상남도로 알고 있습니다. 경상남도에, 그리고 정부에, 이선근이 비문을 지은 제승당정화기념비를 철거할 것을 강력히 요구합니다.

[청와대 국민청원 바로가기]


오늘의 키워드

#3·1운동 100주년 #3·1혁명 #이선근 #제승당 #충무공 이순신 #제승당정화기념비 #이선근 친일 #이선근 자손 #만주국 협화회 #친일반민족행위자

여러분이 눌러주시는 아래의 ♡는 글을 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쿠야
    • 2019.03.04 23:00
    10여년전에 tv프로그램에서 보았을때 화가 너무 났었는데
    일본으로부터 훈장까지 받았던 반민족 친일파
    그런놈이 해방후에 또 훈장받고
    비석 철거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댓글을 비밀 댓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