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밟고 있는 땅/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3·1운동 100주년 기념 ③] 친일파 안익태·윤치호가 만든 애국가, 이대로 둬야 하나?

자발적한량 2019.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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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삼일절 100주년입니다. 일제강점기였던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고 전국적인 만세 시위를 벌인 날로,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케이스의 대규모 집단 저항 운동이죠. 3·1 운동을 계기로 하여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이는 대한민국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1920년 3월 1일 임시정부가 경축식을 시작한 이래 국경일로서 기념되고 있는 삼일절이 100주년을 맞이하게 된 것을 무척이나 뜻깊게 생각합니다.


삼일절을 맞이하여 정한 오늘의 포스팅 주제는 '애국가'입니다. 법적으로 명시되어 있진 않지만 사실상 대한민국의 국가로 인식되어 있는 '관습상 국가'죠. 영국의 'God Save the Queen'도 마찬가지이고, 일본의 기미가요(君が代)가 관습상 국가였다가 1999년 법률상 국가로 규정되었죠. 프로야구·프로축구 등 스포츠 경기를 시작할 때나, 어떠한 행사를 할 때 국민의례가 행해지는데, 이 때 애국가 제창을 하게 됩니다. 故 함태호 오뚜기 명예회장은 1969년 오뚜기 설립 이후 매월 첫날 아침 조회 때마다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게 하는 등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는 것이 애국심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는 등 애국가는 국가관 강조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제가 오늘 삼일절 100주년에 이 애국가를 주제로 정한 것은, 바로 애국가의 작곡가과 작사가 때문입니다. 공식적으로 알려진대로 애국가의 작곡가는 안익태입니다. 그리고 작사가는 미상인데, 안창호설과 윤치호설이 존재하죠. 문제는 안창호를 제외한 안익태와 윤치호의 행적입니다. 두 사람은 친일반민족행위자입니다.



안익태는 1906년 평양에서 태어나 숭실학교를 다니다가 일본 도쿄의 세이소쿠 중학교에 음악 특기생으로 입학, 도쿄고등음악학원(현 구니타치 음대)에서 첼로를 전공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신시내티 음악원, 커티스 음악원, 템플대학교 음악대학원에서 첼로와 지휘를 배웠습니다. 카네기홀에서 독주회를 갖는 등 첼리스트로 활약했죠. 이후 헝가리, 이탈리아, 독일,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유럽 각지의 관현악단을 객원 지휘했습니다. 추축국을 중심으로 음악활동을 이어오던 안익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자 중립국인 스페인으로 거점을 옮겼고, 1946년 스페인 여성인 롤리타 탈라베라와 결혼합니다. 이후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가 되었고, 스페인으로 귀화했죠.



안익태가 다시 고국의 땅을 밟은 것은 1955년 3월입니다. 이때 애국가를 발전시켜 만든 곡인 한국환상곡의 한국 초연을 지휘했죠. 1962년부터 1964년까지 매년 서울에서 국제음악제를 주관하는 등 한국에서의 활동을 도모하였으나, 안익태에게 적대적이었던 일부 음악인들의 반발 및 재정 문제 등에 의해 무위로 돌아갔습니다. 1965년 7월 4일 런던의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마지막 공연을 한 후 건강이 악화되어 그해 9월 16일 바르셀로나에서 세상을 떠났죠.



그가 애국가를 작곡한 것은 1935~1936년 쯤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모든 음악대학 과정을 마쳤을 땐데요. 그리고 이것을 발전시켜 만든 곡이 한국환상곡입니다. 독일 후기 낭만주의의 교향시 스타일의 한국환상곡은 1938년 아일랜드의 더블린 방송 교향악단을 객원 지휘했을 때 초연되었죠. 2015 신년음악회에서 한국환상곡이 연주되는 등 이 두 작품은 그간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해왔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전혀 달랐습니다.


2000년에 안익태의 베를린 지휘 영상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 음악회 실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연주한 것은 안익태가 작곡한 '만주환상곡'. 그리고 만주환상곡에는 한국환상곡과 똑같은 멜로디가 들어가 있습니다. 안익태가 유럽의 오케스트라들을 지휘하면서 공연에 올렸던 곡들은 만주환상곡, 일본의 궁중음악을 소재로 한 '에텐라쿠', 교향적 환상곡 '교쿠토(극동)' 등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유럽 주재 일본 외교관들의 눈치를 봐가며 유럽 활동을 위해 보신술을 발휘한 것이라는 평이 있죠.



또한 안익태의 또 다른 이름인 에키타이 안(Ekitai Ahn). 그는 미국에서 음악 공부를 할 때부터 쭉 '안익태'가 아닌 '에키타이 안'을 사용했습니다. 서재필의 비서였으며, UN 주재 한국 대사를 역임했던 임창영은 안익태가 에키타이 안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을 보고 "왜 서양해서 활동하는데 굳이 일본식 이름을 쓰냐"고 꾸중을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데요. 일본의 추축동맹 관변단체였던 일본-독일협회'에서 활동한 것을 비롯해 1941년 메이지 천황의 생일인 명치절을 기념하여 루마니아 일본 공사관에서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를 피아노로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올해 1월, 안익태의 친나치 전력이 알려졌습니다. 1944년 히틀러의 생일 기념으로 파리에서 열린 '베토벤 페스티벌'을 비롯해 추축국, 점령국, 우방국에서 활동했으며, 나치독일에서 유일한 조선 출신 제국음악원 회원이 되었습니다. 회원증에 적힌 그의 출생지는 평양이 아닌 도쿄. 베를린 주재 만주국 외교관으로 위장한 일본의 유럽 첩보망 총책이었던 에하라 고이치와의 관계를 볼 때 그를 에하라의 '특수공작원'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주장도 제기됐죠. 이후 그는 프랑스에서 기피 인물로 지정되기도 했습니다.



애국가의 작사가는 크게 두 개의 설이 있습니다. 안창호가 작사했다는 설과 윤치호가 작사헀다는 설.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다룬 적도 있었죠. 의견이 분분하지만 윤치호 작사설은 근거로 내세우는 자료가 많은 반면 안창호 설은 대부분 증언에 의존하고 있는 터라 윤치호 작사설이 좀 더 신빙성있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애국가의 작사자를 조사했는데, 윤치호가 11대 2로 앞섰습니다. 하지만 만장일치가 아니란 이유로 기각됐죠. 당시 만들어진 애국가 작사자 규명위원회의 위원장은 친일반민족행위자인 최남선, 그리고 조사위원회 역시 모두 친일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일각에서는 애국가의 작사자가 친일파라는 것을 공표해서 오는 사회적 파장이 두려워 회피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죠.


좌옹 윤치호. 3·1 운동을 두고 '만약에 거리를 누비며 만세를 외쳐서 독립을 얻을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남에게 종속된 국가나 민족은 하나도 없을 것'이라는 평가를 내린 친일반민족행위자입니다. 많은 친일파들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친일반민족행위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개화파로 독립협회와 만민 공동회, 신민회, 청년 학우회의 창립 주역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계몽 운동이 실패하고 민중들의 배척을 받게 되자 민중을 경멸하게 되었죠. 


하지만 그 전부터 자신의 일기장에 '조선이 지금의 야만적 상태에 머무느니 차라리 문명국의 식민지가 되는 게 낫겠다' '인종 편견과 차별이 극심한 미국, 지독한 냄새가 나는 중국, 그리고 악마 같은 정부가 있는 조선이 아니라 동양의 정원이자 세계의 정원인 축복받은 일본에서 살고 싶다' '만약 내가 마음대로 내 고국을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일본을 선택할 것이다. 오, 축복받은 일본이여! 동방의 낙원이여!'라고 쓰는 등 제국주의적 시각을 나타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윤치호의 친일파적 사고의 뿌리를 이 시기로 잡고 있죠. 하지만 외무부 협판 당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주장하고, 한일병합이 단행되자 벼슬을 버리고 개성으로 내려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부친 윤웅렬이 사망하자 남작 작위를 습작합니다. 하지만 1912년 데라우치 총독 미수 사건(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몰리며 조선 귀족 남작 작위를 박탈당하고 서대문형무소와 경성 형무소에 수감됐죠. 징역 6년형을 받았으나 2년 만에 독립운동에 가담하지 않을 것을 서약하는 조건으로 출소하게 됩니다. 3·1 운동 당시 민족 대표로 나서달라는 최남선, 신익희, 송진우의 부탁을 거절하긴 했지만 곧바로 본격적인 친일의 길을 걸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최남선을 촉망받는 학자라며 존경했지만 그가 친일 성향을 보이자 교류를 끊기도 했고,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행사 및 천황, 황후의 생일 등 기념 행사에도 대부분 불참했죠. 조선총독부가 중추웜 참의직을 제안했으나 이 역시 회유책이라 생각하여 거절합니다.


오히려 윤치호는 관변 단체에 명의만 집어넣는 등 소극적 참여를 보였을 뿐 독립 운동가들의 신원 보증을 서주고 석방시키거나, 안창호의 석발을 주도하고 조선어학회 사건 관련 인원들을 보호하려고 애쓰는 등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조선총독부는 그를 미행·도청했고, 윤치호는 이에 충격을 받는 한편 일본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글을 많이 적었죠.


그랬든 그가 적극적인 친일의 길을 걷게 된 것은 1940년대. 창씨개명을 한 윤치호는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학도병 강연, 징병 권유 글 작성 등 적극적인 친일 행위를 시작합니다. YMCA와 감리회의 일본화 작업을 주도했고, 국민 정신 총동원 조선 연맹, 조선 지원병 후원회, 조선 임전 보국단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핵심 인물로도 참여하죠. 중추원 참의직을 수락하는 한편 일본 제국 귀족원 칙선 의원으로 임명되기도 했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이승만, 김구, 존 하지 미군정 장관에게 편지를 보내 어쩔 수 없이 국내에 남아서 협력해야 했던 사람들의 사연을 소개하고 조선의 독립은 독립 운동가라고 하는 사람들의 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는 등 그가 보여준 친일파의 말로는 초라했습니다. 결국 1945년을 넘기지 못하고 뇌졸중으로 사망했죠. 그의 유언은 "모든 친일파와 민족 반역자는 삼가라."


사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애국가의 작사자 논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구 선생이 "우리가 3·1운동을 무엇으로 했는가. 태극기, 선언서, 애국가로 했는데 그 작사자가 왜 문제인가?"라고 말하며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죠. 하지만 당시는 현재의 곡조가 아니었고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의 멜로디가 맞춰 부르던 때였죠. 만약 애국가의 작곡가가 윤치호라면, 애국가는 두 명의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작사·작곡한 곡이 되는 셈입니다. 과연 이러한 노래를 일제강점기의 고난 속에서 힘겹게 벗어난 대한민국의 국가로 사용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요? 전 그래서 야구장에 가면 애국가가 울려퍼질 때 일어나지도, 부르지도 않습니다.


아, 윤치호의 후손들도 적어둬야죠. 언제나 말했지만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자손이라고 하여 그 친일행각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선조의 친일행각으로 쌓은 부와 명예를 바탕으로 여전히 그 부와 명예를 누리고 살고 있는 점 하난 확실하죠. 우리가 반드시 기억은 하고 있어야겠죠? 윤치호의 장남 윤영선은 1950년 농림부 장관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그의 손녀사위가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이죠. 삼남인 윤장선은 샌프란시스코 총영사를 역임했습니다. 삼남 윤기선은 재미 피아니스트로 활동한 한국 1세대 피아니스트죠. 윤치호의 동생인 윤치왕은 해방 후 군의감을 지냈으며, 윤치창은 1949년 초대 주영공사를 지냈습니다.



윤치호의 외손자인 정태진 씨가 SBS '그것이 알고 싶다'와의 인터뷰에서 "외할아버님은 순수한 애국자이면서 나라에 대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누구보다도 높은 사람이고 교육과 도덕성을 제일 중요시했기 때문에 살아남아서 배워라. 개죽음하지 마라. 그러려면 벙어리가 되어라. 그것이 친일파가 아니다. 그것이 애국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했죠. 신문 기사 중에서도 독립운동가 윤치호라고 소개하는 기사가 종종 있습니다. 이게 다 친일의 잔재를 말끔히 씻어내지 못한 대한민국의 과오입니다.


오늘의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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