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이 그룹 회장으로 승진했습니다. 2006년 신세계그룹 부회장에 취임한 지 18년 만의 승진인데요. 이날 그룹 수뇌부 인사를 통해 정용진 부회장의 모친이자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막내 딸,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의 여동생인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은 그룹 총괄회장으로서 신세계그룹 총수의 역할을 계속 하게 되었습니다.
1968년 정재은 신세계 명예회장과 이명희 회장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정용진 신세계그룹 신임 회장은 미국 브라운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한국후지쯔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한 뒤 신세계 전략기획실 전략팀 이사로 그룹에 입사, 신세계백화점 기획조정실 상무와 신세계 경영지원실 부사장, 신세계 경영지원실 부회장을 거쳐 신세계와 이마트의 대표이사 부회장을 차례로 역임헀습니다.
정용진 부회장의 나이가 이미 50대 중반이고, 1943년생 이명희 회장이 80세를 넘은 이 시점에서 최근 신세계그룹을 둘러싸고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변화가 필요하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왔습니다. 그룹의 주력인 이마트가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469억 원의 영업적자를 기록한 것. 표면적으론 이마트의 자회사인 신세계건설이 1,878억 원이라는 대규모 적자를 기록한 것이 이유지만, 이마트 자체 이익만으로 따져봐도 2018년 4,893억 원에서 지난해 1,880억 원으로 5년 사이 60% 이상 급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코스피가 지난 5년간 23%, 10년간 37% 상승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마트의 주가는 각각 59%, 70% 하락했죠.
문제는 이 분만이 아닙니다. 신세계와 이마트를 합한 총매출액도 2022년 37조 1,452억 원에서 지난해 35조8,293억 원으로 1조 원 이상 하락했습니다. 지난해 온라인 유통 시장을 장악한 쿠팡은 창립 13년 만에 매출액 30조 원을 넘기면서 국내 유통 시장의 선두주자로 발돋움한 것과 너무나도 상반되죠. 신세계는 지난해 9월 정기 임원인사에서 전체 최고경영자 40%를 물갈이하는 등 쇄신 인사를 단행하며 사실상 비상경영을 펼쳐오고 있었습니다. 호텔·레저사업부를 신세계조선으로 일원화하고, 애완동물 용품을 판매하는 전문 매장 '몰리스' 사업부를 폐지하고 패션·테넌트사업부로 통합하는 등 사업 구조조정을 벌이고 있죠. 정용진 신임 회장은 올해 초 신년사에서 "조직은 성과를 내기 위해 존재하고 기업은 수익을 내야 지속가능할 수 있다는 명제를 다시 한번 바로 세워야 한다"면서 수익성 개선을 경영의 최우선 과제로 내걸은 바 있습니다.
하지만 신세계 그룹 주주들과 경영계에서는 현재 신세계 그룹이 겪고 있는 위기의 이유가 다름 아닌 정용진 회장이라고 성토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금융투자업계와 법조계·학계 인사 90여명을 회원으로 두고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을 통해 자본시장 선진화를 추구하는 단체인 기업거버넌스포럼은 11일 정용진 회장의 회장 승진과 관련해 "승진보다 신음하는 이마트 주주에 대한 사과 및 기업 밸류업 대책을 내놓는 것이 옳지 않았나"라고 통렬히 성토했습니다.
포럼 측은 "그룹 전체 차입금 축소가 절실한데 정 회장과 경영진은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면서 이마트의 시가총액 2조원 대비 금융부채가 14조원으로 과도하며, 미국 와이너리, 스타벅스코리아, SSG랜더스 야구단 등 본업과 무관한 인수·합병(M&A)으로 후유증을 겪고 있다고 진단했죠. 차입금 축소 압박을 받는 신세계건설이 골프장 3곳이 포함된 레저부문을 1,820억원에 매각하기로 했지만, 인수 주체가 이마트 자회사 조선호텔앤리조트인 점을 두고 "최고 명문 트리니티클럽 매각이 아까운지 왼쪽 주머니에서 오른쪽 주머니로 옮긴 셈"이라고 꼬집었습니다.
포럼은 와이너리, 골프장, 야구단, 스타벅스코리아 등 본업과 무관한 자산 매각으로 차입금을 축소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정 회장이 그동안 등기이사는 아니어서 법적 책임을 부담하지 않고 보수는 많이 받는 책임 있는 경영자 모습을 보이지 않아 경영 위기가 초래된 것이 아닌가"고 반문하는 한편 "주주, 경영진, 이사회와 얼라인먼트(alignment·정렬)를 만들고 본인도 이사회 참여를 통해서 책임경영을 실현하라"고 촉구했습니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신임 회장은 2022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멸공통일 관련 게시물을 여러 차례 올린 뒤 중국과 관련해 논란이 일자 그제서야 회사 걱정이 됐는지 자신이 올렸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사진을 삭제하고 대신 김정은 사진을 올리면서 "나의 멸공은 중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해명을 올려 이를 두고 '친중멸공' '중국이 허락해준 멸공이냐' '면세점에서 돈써주는 중국인 돈은 달달하고 착한 공산주의냐' 등의 비판을 받았죠.
게다가 시진핑 사진을 삭제하면서 "사실 그 포스팅에 얼굴이 들어가 있는 줄도 몰랐다"라는 말 같지도 않는 찌질한 변명을 내놓아 비웃음을 사기도 했구요. '#이것도 지워라' 해시태그까지 달아가며 시진핑 사진을 올려놓고 결국 자기 손으로 이를 삭제하는 모습이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급기야는 중국식 잡채를 만드는 사진을 게시하면서 코미디의 끝을 달렸죠.
재밌는 것은 이후 이것이 국민의힘 내에서 '멸공 챌린지'로 이어져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대선 후보, 나경원 전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정갑윤 전 국회부의장, 최재형 전 감사원장, 오신환 전 바른미래당 의원,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 김연주 국민의힘 상근부대변인 등이 이마트에 방문해 장을 보며 멸치와 콩 등을 구입하거나 음식을 만들어 먹는 컨텐츠를 올렸고, 김진태 강원도지사, 황교안 전 미래통합당 대표, 김병욱 국민의힘 의원 등이 이를 응원했죠.
하지만 철 지난 색깔론이라는 지적과 함께 2030세대의 반중 정서를 자극하려는 전략이라는 분석이 나왔고, 김종인 전 국민의힘 총괄선대위원장이 멸공 인증을 한 사람들에 대해 "성향이 원래 그런 사람들이다. 선거를 전체 국민을 상대로 해야지 특정 계층만 갖고 선거를 할 수는 없다"고 비판한 것을 비롯해 원희룡 국민의힘 선대위 정책본부장은 "저도 사실 썩 동의하기는 어렵다"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고, 홍준표 대구시장은 "시대착오"라는 답변을 하는 등 당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죠.
문제는 논란 이후 신세계그룹 일제히 계단식 하락을 보였습니다. 대기업, 그것도 범 삼성가인 신세계의 주가가 그룹 부회장의 SNS에 좌지우지될 정도로 오너 리스크가 비정상적으로 크다는 뜻이기에 이후 정용진 부회장은 '오너 리스크의 인간화'라고 조롱을 받았죠. 정작 정용진은 신세계와의 지분 정리를 통해 신세계에 보유한 지분관계가 없는 상태에서 그의 경솔한 행동 때문에 주주들이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주가가 떨어져 손해를 보는 상황은 분명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내로남불인 게 본인 스스로가 단지 '혈연'에 의존해 신세계라는 대기업을 승계받게 되는 사람이면서 멸공이니, 북한이니 어쩌니 왈가왈부하는 것도 웃기지 않나요? 본인이 그렇게 싫다고 써대던 '북조선 백두혈통'이랑 정용진이랑 다른 게 뭘까요? 제 생각엔 없는 것 같은데.
당시 정용진의 경솔한 SNS 발언들은 중국과 베트남 관련 사업에 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한 주주들의 불만을 샀고, 신세계 주주들은 "애플과 테슬라도 큰손인 중국 눈치를 보면서 경영하는데 시진핑 기사까지 메인으로 들고 왔다는 건 오너가 공과 사 구분을 못하는 것 아니겠냐" "신세계가 앞으로도 국내 내수로만 먹고 살자는 말밖에 더 되겠냐. 면세점은 앞으로 장사를 안 할 생각이냐" "여기 대한민국에 공산당 좋아할 사람 있나요? 철부지 애도 아니고 대세가 미국으로 기운 것도 아닌데 기업가가 할 말을 어떻게 다하고 삽니까. 중국의 본격 대응을 받아 주주 불안을 야기할 필요가 있나요? 그냥 일기장에 써놓는 것이 좋지 않은지…" "멸공 리스크는 주식 인생에서 처음 본다" "부회장님부터 군대 다녀오세요" "유통주 샀는데 방산주였네" 등의 맹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이 외에도 정용진 회장은 SSG 랜더스 구단 운영 비선실세 개입 의혹, 삐에로쇼핑, 이마트 트레이더스, JAJU, 스타필드, 노브랜드 등 국내외 브랜드 표절 논란, 이마트 노조원 불법사찰 및 노조설립 방해 논란 등을 일으켰고, 앞선 2011년엔 미니버스(벤츠 스프린터 324)를 이용한 '꼼수출근' 논란으로 대중들의 지탄을 받기도 했죠.
한편 신세계그룹은 이달 21일 서울 중구 포스트타워에서 정기 주주총회를 열고 박주형 신세계 부사장과 허병훈 신세계그룹 경영전략실 경영총괄 부사장을 각각 신규 사내이사로 선임할 예정이며, 이마트 역시 28일 정기 주주총회를 열고 한채양 이마트 대표, 임영록 신세계프라퍼티 대표, 전상진 이마트 지원본부장을 각각 사내이사로 신규 선임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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