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H-1B 비자 수수료 100배 인상...140만원이 1억4천만원 됐다
지난 19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전문직 취업비자인 'H-1B' 신청 수수료를 기존 1,000달러(140만원)에서 10만 달러(1억4000만원)로 무려 100배 인상하는 포고문에 서명한 이후 엄청난 파장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직격탄을 맞은 것은 인도, 그리고 다름 아닌 미국이라는 분석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미국 이민서비스청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H-1B 비자 소지자 가운데 인도 국적자가 약 71%(28만3,397명)로 가장 많았고, 중국(4만6,680명·12%), 필리핀(5,248명), 캐나다(4,222명), 한국(3,893명)이 뒤를 이었습니다. 그만큼 미국의 IT·금융·회계 분야에는 인도와 중국 출신 전문 인력이 폭넓게 포진해 있죠. 특히 IT 관련 일자리의 경우 80% 이상을 인도계가 차지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H-1B 비자 수수료 인상 직접 영향권은 인도, 그리고 다름아닌 미국
인도의 IT 인재들에게 H-1B 비자는 그야말로 희망 그 자체였습니다. 지방 도시의 코딩 전문가들은 미국에서 달러를 벌어들이는 인재가 됐고, 이들이 송금하는 돈으로 이들의 가정은 중산층으로 도약했죠. 항공사부터 부동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산업 전체가 전 세계를 누비며 새롭게 등장한 인도인 계층을 고객으로 삼아 움직여왔습니다. 인도는 미국 내 전체 이민자의 약 1%를 차지하는 주요 집단이며, 이들이 매년 본국으로 송금하는 규모는 약 350억 달러, 한화로 약 48조8000억원에 달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8월 인도산 수출품에 50% 관세를 부과하며 양국간 외교 질서를 뒤흔든 바 있습니다. 이는 러시아산 원유 수입에 대한 제재 차원이기도 했죠. 이후 무역 협상이 재개되고 트럼프가 모디 총리에게 생일 축하 전화를 걸며 양국 긴장이 완화되는 듯했지만, 이번 비자 규제 조치로 화해 무드는 다시 흔들리게 됐습니다. 이번 H-1B 비자 수수료 인상 발표는 인도 피유시 고얄 상무장관의 방미 직전에 나왔습니다. 고얄 장관은 무역 협상 차 미국을 찾을 예정이며, 수브라마냠 자이샨카르 외무장관도 뉴욕에서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과 회담을 가질 계획인데, 지금까지 미·인도 무역 협상은 주로 상품 분야에 집중됐지만, 이번 조치로 서비스 무역을 비롯해 이번 비자 문제까지 핵심 의제로 논의될 전망입니다.
한편 미국 역시 H-1B 비자를 통해 전국의 연구실, 교실, 병원, 스타트업 등에 인재를 공급해왔고, 그 결과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IBM 등의 기업은 인도계 경영진이 이끌고 있으며, 미국 내과의사의 거의 6%가 인도 출신이라고 하죠. 하지만 2023년 기준 신규 H-1B 발급 근로자들의 급여 중간값이 9만4000달러였으며, 기존 H-1B 보유 근로자들의 급여 중간값이 12만9000달러인 점에 비춰볼 때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한 H-1B 비자 10만달러 수수료 정책이 얼마나 현실성이 없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인도 뉴델리의 사회발전협의회 소속 비스와짓 다르 교수는 "(H-1B 비자 수수료 인상은) 인도 전문가들의 진출을 (미국이) 막으려는 의도"라고 평가했죠.
인도 학생들이 미국 내 외국인 유학생의 25%를 차지하는 가운데, 미국의 대학들도 이번 조치에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120개 대학의 회원 2만5000명을 대표하는 '북미 인도 학생 협회'의 설립자인 수단슈 카우식은 9월 학기 등록 직후 이 같은 발표가 나며 많은 신입생들이 당황한 상태라고 전했습니다. 카우식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학생들은 직접 공격당한 기분을 느낀다. 왜냐하면 이미 등록금은 납부한 상태라 학생당 5만~10만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매몰 비용이 발생했다. (그런데) 미국 노동시장 진입의 가장 좋은 경로가 없어진 셈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서 인도 학생 대부분이 '영구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국가'를 선택하기에 이번 수수료 인상 결정은 내년 미국 대학 신입생 모집에 타격을 줄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H-1B 수수료 인상 조치로 기업으로 인도 현지 채용 가속화 될 듯
이번 조치로 인해 미국 기업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바라는 대로 미국인을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신규 H-1B 인력 채용 비용을 피하기 위해 멕시코나 캐나다 등 인접국에 인력을 배치하거나, 인도 내 '글로벌 역량 센터(GCC)' 등 해외 거점으로 업무를 이전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이미 JP모건, 시티그룹, 골드만삭스 등 월가 주요 은행들은 인도의 '글로벌 역량 센터'의 최대 고용주들이죠. 이 센터는 거래 지원, 위험 관리, 소프트웨어 개발 등 기술적 지원을 담당하며, 소프트웨어 엔지니어·계량분석가·회계 전문가 등을 고용하는데, 미국 은행들은 이를 통해 본국에서 확보하기 어려운 숙련 인력을 저비용으로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 뭄바이, 벵갈루루, 하이데라바드 등 인도 IT 허브에는 190만 명 이상의 인력이 이미 근무하고 있죠.
때문에 이번 조치가 오히려 은행들의 인도 내 사업 확장을 자극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20년 넘게 미국 은행들과 협력해 온 채용업체 안라게 인포텍(Anlage Infotech) 창립자 우메시 찻제드는 "오프쇼어링(해외 이전)에 새로운 규제가 없는 한, 외국 은행들은 인도 역량센터에 더욱 의존하게 될 것"이라고 바라봤죠. 법무법인 트릴리걸(Trilegal)의 파트너 파르바티 타라멜도 "인도는 이미 글로벌 은행들의 핵심 허브 역할을 하고 있다"며 "새로운 H-1B 규제가 이 추세를 더욱 가속화시켜, 더 많은 첨단 기술과 고부가가치 업무가 인도로 이동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이번 조치로 인한 변화가 미국 사회에 미칠 영향은 매우 심각할 수 있습니다. 병원들은 의사를 구하기 힘들어질 것이고, 대학은 STEM(과학·기술·공학·수학) 전공생 유치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구글이나 아마존 같은 파워를 갖추지 못한 스타트업들은 가장 큰 타격을 입게 되겠죠. 미국 싱크탱크 '케이토 연구소'의 이민학 전문가인 데이비드 비어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이번에 (비자 수수료가 인상되면서) 미국 기업들은 채용 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상당량의 업무를 해외로 이전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면서 "아울러 창업자들과 CEO들이 미국 내 사업을 관리하러 오기도 힘들어질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연회비 아니라 일회성 수수료" 현실에 부딪혀 한 발 물러선 백악관
일각에서는 이번 H-1B 발급 수수료 인상 조치가 외국인 근로자에 대한 과세라기보다 미국 기업과 경제가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 알아보는 테스트에 가까워 보인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H-1B 비자 소지자와 그 가족들은 240억달러의 연방 급여세, 110억달러의 주·지방세를 포함해 연간 약 860억달러를 미국 경제에 기여하는데요. 이번 정책에 대한 기업들의 대응 방식에 따라 미국이 혁신과 인재 유치에서 계속 선두를 지킬지, 아니면 해외 노동자들을 더 환영하는 경제권에 자리를 내줄지 결정될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20일 캐롤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은 이날 자신의 X에 H-1B 비자 수수료와 관련해서 "이것은 연회비가 아니라 (최초) 청원시에만 적용되는 일회성 수수료(one-time fee)"라며 "갱신이나 현재 비자를 소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이는 서명식 당시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이 "(수수료의)핵심은 연간이며, 6년간 매년 10만 달러를 내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을 하루 만에 바꾼 것으로, 외국 전문직 없이 운영되기 어려운 미국 산업계의 반발에 따른 조치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