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서울고등학교의 당시 학생용의복장규정 제2조(두발) 제1항에는 '앞머리 4cm 이내, 뒷머리는 셔츠 깃을 덮지 않는 스포츠형으로 조발한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등교 시, 수업 시 두발단속을 통해 체벌 및 강제이발 등이 자행됐죠. 학생회는 이에 대해 소리를 낼 생각조차 없었습니다. 이에 반발해 학교 홈페이지에 글을 쓰는 학생들은 IP를 추적해 학생부로 소환되었고, 선생님들은 이들에게 "서울고 들어오고 싶은 애들 줄섰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두발규제를 '명문' 서울고등학교를 지탱하는 원동력으로 여기는 분위기였죠.
전 국가인권위원회에 이 문제를 진정하기로 마음을 먹기에 이르렀습니다. '학생이 머리를 기르면 술담배를 사고 싶어지고(종종 청소년도 '뚫을 수 있던' 시절이었기에), 멋을 부리고 싶어지고, 여자를 만나서 연애하고 싶어지고, 그럼 공부에 소홀해지고, 성적 떨어지고, 대학 못하고, 결국 인생 망하고'로 귀결되는 논리에 전혀 공감할 수 없었습니다. 파마를 하고 염색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냥 깍두기같은 스포츠형(소위 귀두컷) 및 원숭이마냥 밀어둔 반삭발이 아닌, 내 얼굴형에 어울리는 머리를 하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고, 벌어질 일들이 무섭기도 했지만, 그저 시스템에 순응하고 사는 기계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아티스트 중 한 명인 서태지의 '교실이데아' 속 가사 '왜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를 떠올렸죠. 얼마 뒤 각 언론사에서 전화가 쏟아져 두발규제 문제를 인권위에 진정한 절 취재했습니다. 대부분의 신문에는 실명을 싣지 않고 전교조에서 발행하는 신문인 '교육희망'에만 실명과 사진을 싣었는데, 그 다음주 월요일 교무회의에서는 학교 측에서 제 기사를 복사해서 모든 선생님들에게 나눠줬더군요.
그리고 국가인권위원회는 '서울고등학교에서의 두발단속 시 강제이발 관행은 헌법 제10조가 규정한 학생의 인격권 및 행복추구권상의 자기결정권, 개성의 자유로운 발현권의 침해임을 인정하고, 서울고등학교장에게 강제이발의 재발방지를 권고하기로 결정한다'는 최종결정을 내렸으며, 교육인적자원부장관 및 각 시·도 교육감에 "학생의 의사에 반한 강제이발은 인권 침해이므로 재발 방지를 위한 적극적 조치를 강구할 것"이라고 권고했습니다. 또한 공정택 당시 서울시 교육감은 일선 학교에 "현재의 두발 관련 규정에 대해 학생들이 개정안을 만들게 하고 학교운영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결정하라"는 지시를 내렸죠.
2005년 고등학생이었던 제게는 학생의 인권이 절실했습니다. 당구큐대로 맞든 장구채로 맞든 자로 맞든 체벌은 솔직히 제가 고등학교 시절 그냥 일상적이었던 것이었죠. 교과서를 안가져와서, 숙제를 안해와서 등등 이유도 참 다양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그렇게 맞을 정도의 일인가 싶었지만, 선생님들은 그것이 학생을 통제하고 '학생다운 학생'으로 지도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했겠죠.
이후 교육감 직선제가 실시되었고, 진보성향 교육감들의 대약진 속에서 이들은 '학생인권'을 외쳤습니다. 경기도와 서울이 학생인권조례를 시행한 것을 시작으로 광주광역시, 전라북도, 충청남도, 제주특별자치도, 인천광역시가 뒤를 이었죠. 지역별로 조금씩 다르지면, 체벌 금지, 야간자율학습 및 보충수업 강제 금지, 두발규제 금지, 복장 및 두발 등 용모에 대해 자기의 개성을 실현할 권리 보장, 휴대전화 자체 금지 불가, 양심에 반하는 내용의 반성문 및 서약 등 진술 강요 금지 등이 있죠.
시간이 흘러, 전 30대가 되었습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기 전부터 고등학교 오케스트라 지도를 맡아 7년간 다시 학교 울타리 속에 있었고, 그 사이 교육에 뜻을 품고 교육대학원에 진학해 석사과정을 마쳤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저는 교직의 길을 포기했습니다. 무너지는 교육현장에 발을 담글 생각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수업 중 엎드려 자는 여고생의 어깨와 팔을 툭툭 쳐 깨운 교사가 성추행으로 고소당해 직위해제가 되고, 교단에 누워 교사를 촬영하는가 하면, 학부모가 교무실로 쳐들어와 교사를 폭행하거나 협박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학생이 교사를 폭행하기도 합니다. 여교사에 대한 성희롱 및 학부모들의 과도한 교권침해는 일상이 되었습니다. 수 많은 민원, 그리고 방과 후에도 이어지는 카톡 등까지. 교권은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는 바닥까지 떨어졌습니다. 내가 두발자유를 위해 용기를 냈을 때는, 그리고 학생인권조례를 지지했을 때는 이러한 미래를 그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번 서울 서이초등학교 교사 자살사건을 보면서 가슴 한켠이 먹먹합니다.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끝내 교사의 길을 걷진 않았지만, 교원자격증을 방 한구석에 놓아둔 채 또 다른 방향의 교육활동을 하고 있는 저로서는 그 안타까움이 더욱 크게 느껴집니다. 말 안듣는 아이들, 니 까짓거 민원 한 방이면 깨갱하게 만들 수 있다는 식의 학부모,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는 교감, 교장 등 교육 시스템. 교사의 사명감에 이 모든 것을 감내하라고 하기에는 그 무게감이 너무나도 잔인합니다.
교권이 무너지고, 교육현장이 망가지고, 한국교육이 무너지면 결국 그 피해는 누구에게 돌아갈까요. 왜 국가가 약 539조 원의 1년 예산 중에 보건·복지·고용 분야의 뒤를 이어 2위 규모, 약 18%인 96조 원을 교육에 투입하는 걸까요. 국민이 국가의 근간이고, 교육이 국민의 근간이기 때문입니다. 공교육이 붕괴된다면 과연 국민들은 각자 스스로 이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의 학교에 교사들이 없다면 어떨까요? 아니면 따로 사범대, 교육대학원 등 국가에서 마련한 교원양성과정을 거치지 않은 일반인들도 회사원들처럼 누구든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다면 어떨까요? 회사원들보다 낮은 급여에 수업, 제반업무를 수행해가며, 민원들까지 일일이 처리해 나가고 있는 교사들을 어디까지 몰아세울 생각이신가요? 그것이 정녕 여러분의 자녀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서이초 교사의 자살에 충격을 받아 이틀 내내 거의 잠을 자지 못하고 쓰린 마음만 움켜쥔 채 달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고작 23살이었습니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사회 초년생. 그럼에도 이 서이초 교사는 당차게, 그리고 최선을 다해 그 직무를 수행해 나간 것으로 보여집니다. 해당 교사가 자신이 가르쳤던 학생에게 남긴 편지를 보면, 얼마나 아이들을 사랑과 정성으로 가르쳤는지가 느껴집니다.
교사가 되기 위해 배우는 교육학이론을 보면 교직관의 3가지 종류 중에는 성직관이 있습니다. 고도의 정신적 봉사 활동과 소명 의식이 필요하고, 세속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직업이 되어야 한다, 교사는 오로지 사랑과 봉사정신에 입각해 학생을 교육해야 하며, 성인 군자적인 교사를 이상적인 교사상으로 본다, 교사가 하는 활동은 주로 미래 지향적이기 때문에 현실 사회보다는 다가오는 이상사회의 실현을 위하여 학생들의 힘과 마음을 기르는 직업이어야 한다, 교사는 높은 도덕적, 윤리적 행동 수준을 지녀야 하며 교사의 정신적 만족감과 정신적 보상을 강조한다, 교사는 한없는 사랑과 헌신, 희생, 봉사, 정신적 활동에 전념하는 직업이다... 지금 2023년 대한민국에서 교사들이 더 이상 성직관을 가슴에 담고 교단에 설 수 있습니까?
잘못된 학부모, 잘못된 교육행, 잘못된 나라, 잘못된 세상을 만나 너무나 빨리 이 곳을 떠나버린 서이초 교사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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