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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 주민등록번호·예비군·유격훈련·천리행군·교련 만든 '1·21 사태(김신조 사건)' 김신조 목사, 세상을 떠나다

자발적한량 2025.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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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 무장공작원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했던 1·21 사태 당시 유일하게 포로로 생포되어 대한민국에 귀순했던 김신조 목사가 9일 별세했습니다. 김신조 목사가 목회를 하다 은퇴한 서울성락교회 측에 따르면 김심조 목사는 9일 새벽 사망했다고 합니다. 빈소는 서울 영등포구 교원예움 서서울장례식장에 마련됐습니다.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 온 국민에게 충격 안긴 '김신조 사건'

1942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난 김신조 목사는 만 19세에 조선인민군 지상군으로 복무하던 중 124부대라고 부르는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공작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68년 1월 21일 새벽, 124부대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군사분계선을 넘어 청와대로부터 300m 떨어져있는 종로구 세검정 고개(현재의 자하문 고개)까지 침투했죠. 

 

자하문 초소에서 전투가 벌어진 뒤 인왕산과 비봉산, 의정부시 등지로 뿔뿔이 흩어진 나머지 공비들은 대부분 죽었습니다. 최종적으론 공비 31명 중 29명이 사살됐으며, 1명은 북한으로 복귀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김신조 목사는 하루 뒤인 1월 22일 새벽 인왕산 하단의 세검정 계곡에 있던 바위에서 투항했죠. 1·21 사태는 이후 '김신조 사건'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튿날 있었던 기자회견에서 침투 목적을 묻는 기자에게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고 말하는 장면은 국민들을 경악하게 만들었죠.

 

사건의 파장은 엄청났죠. '김신조 사건'은 주민등록번호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고, 예비군과 5분대기조, 육군3사관학교, 전투경찰대(전경)가 창설되었습니다. 유격훈련 및 천리행군 등 군대를 나온 남자들이 이를 갈 훈련도 실시됐고, 고등학교에서 교련 과목이 실시되기 시작한 것을 비롯해 휴전선엔 철책이 설치됐고, 광화문 광장에 위치한 이순신 동상이 이때 설치됐습니다. 또한 인왕산과 북악산 또는 청와대 근처 통행금지가 이루어졌고, 북악스카이웨이가 준공되었죠. 설악개발단, UDU, 684부대 등 보복부대가 창설되기도 했습니다. 북한에서도 제 발이 저렸는지 려행증(여행증)을 만들었죠. 

 

귀순 이후 목사가 된 김신조, 일단 그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김신조 목사는 전향 후 2년 넘게 효자동 방첩대에서 조사를 받으며 지내가 군에 많은 정보를 제공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0년 4월 10일 풀려났습니다. 그는 전향하여 공소취하로 석방된 후 결혼하여 1970년대 초부터 동작구 흑석동 시범아파트에서 살면서 중앙정보부의 감시를 꾸준히 받았죠. 1970년대 중반부터는 사당동으로 이사해 아내와 가게를 차리고 자영업을 했습니다. 

 

김신조 목사가 결혼할 때 아내를 어떻게 주선받았는지, 아내가 누구의 가족인지는 알려진 바가 없고 중앙정보부가 관여했을 것이라는 추측만 있는 상황. 다만 2022년 인터뷰에 의하면 김신조 목사의 아내인 최정화 씨가 기사를 읽고 김신조에게 첫눈에 반해 성경 구절이 쓰여진 편지를 김신조에게 보냈고, 둘은 결혼에 이르렀다고 하죠.

 

1996년 목사 안수를 받은 김신조 목사는 현재 이단 논란이 있는 서울성락교회에서 목사로 일하며 목회를 하다 은퇴하고 2010년 한나라당 복한인권위 고문에 임명돼 군대에서 안보 강연 활동을 했습니다. 일각에서는 살인자가 버젓이 방송에 나오고 목사가 됐다고 욕을 했지만, 김신조 목사가 투항 당시 총과 탄창에 탄약이 모두 가득 차 있었고, 총 내부에 화약흔도 없었다고 합니다. 즉, 발포한 적이 없는 것이죠. 해당 총이 김신조 목사의 것이 맞다면 실제로 김신조 목사는 사람을 죽인 적이 없었다는 것. 그래서 이러한 물증으로 인해 김신조 목사가 귀순 의사를 밝히자 검찰이 공소를 취하했고, 정부에선 한국화약에 일자리를 주선해주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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