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수영구는 부산의 18개 선거구 중에서도 보수 성향이 유독 강한 지역구입니다. 그야말로 보수의 텃밭.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시작해 한나라당, 새누리당, 미래통합당 등 국민의힘의 전신 정당 후보들이 모두 금뱃지를 차지했죠. 다른 부산 내 지역구들에서 이변이 쏟아지며 파란 깃발이 꽂아지는 동안 그야말로 수영구는 난공불락이었죠.
그런데 이번 4·10총선에서는 상황이 좀 달라질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더불어민주당 유동철 후보에 대한 지지율 40.6%로은 지난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강윤경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득표율 41%와 엇비슷한 상황. 그런데 문제는 국민의힘이 공천을 철회한 장예찬 무소속 후보와 국민의힘 정연욱 후보간 표가 갈리기 때문. 정연욱 국민의힘 후보 지지율이 29.9%, 장예찬 무소속 후보 지지율이 22.8%입니다. 게다가 이 여론조사 외에도 그동안 실시된 모든 여론조사에서 오차범위 밖으로 유동철 후보가 앞서면서 어부지리로 당선을 거머쥐며 수영구에 민주계열 정당의 깃발을 꽂을 가능성이 유력한 상황입니다.
4월 1일, 장예찬 후보는 입장문을 통해 "보수의 승리를 위해 조건 없는 단일화 경선을 제안한다"고 밝힙니다. 조금 웃기지만 장예찬 후보는 "수영구에는 무소속 돌풍이 일고 있다. 유일한 수영구 토박이, 진짜 보수 장예찬을 지지한다는 민심이 커지고 있다"라고 주장했죠. 그러면서 "아무리 불리한 조건이라도 전부 수용하겠다. 여론조사 100%도 좋고, 당원 조사 100%도 좋다"며 "보수 단일화를 통해 수영구를 지키라는 것이 주민들의 명령이고, 단일화를 거부하는 사람은 민주당 편을 드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경선을 거부한다면 모든 책임은 정 후보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협박성 발언과 함께.
하지만 이에 정연욱 후보는 "장예찬, 수영구민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마라"며 "정치는 진정성을 가지고 다가가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또한 "무자격판정자의 보수팔이, 감성팔이를 넘어 수영구민까지 파는 행위를 납득하기 어렵다"고 장예찬을 비난했죠. "정치를 하려면 수영구민을 위한 진정성부터 가져라"는 충고와 함께.
장예찬 후보는 2일에도 "지금 민주당에게 수영구를 내줄 수 없다는 절박한 외침을 외면한다면 결국 단일화를 피하는 사람이 민주당 이중대라는 비판을 받게 될 것" "이분이 정말 수영구 주민들을 생각하고 위하는지 의심스럽다"이라고 거듭 단일화를 압박했고, 3일에도 "공당의 후보가 공당 당원들을 대상으로만 여론조사를 하자는데 피하는 것은 얼마나 경쟁력 없고 자신이 없다는 뜻인가"라며 "단일화를 거부한 쪽에 대한 책임론이 거세게 불붙을 것"이라고 압박했죠.
그리고 사전투표 시작 하루 전인 어제(4일) 새벽, 정연욱 후보는 자신의 SNS에 '장예찬 후보께 답장 드렸습니다'라며 인근 지역구의 국민의힘 후보가 장 후보의 사퇴를 주장하는 영상이 담긴 문자 캡쳐를 올립니다. 이윽고 장예찬 후보는 "어제(3일) 밤 12시 무렵에는 제가 저희 캠프의 청년들과 함께 상대 후보(정연욱 국민의힘 부산 수영구 후보)의 사무실 앞까지 찾아가서 계속 기다렸다. 아쉽게도 얼굴을 보거나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면서 정연욱 후보를 향해 "반윤 후보, 반정부 후보가 여당 후보라고 할 수 있느냐"라고 비난을 쏟아냈죠. "당내에서 정 후보가 윤 대통령을 공격하는 내부총질의 기수, 반윤 트로이 목마가 될 것"이라고도 말했구요. 정연욱 후보가 사실상 단일화 거부 의사를 밝히자 상당히 화가 난 듯 보였는데요.
국민의힘 내부의 의견은 매우 간단명료합니다. 장예찬 무소속 후보의 사퇴죠. 부산 남구에서 재선에 도전하는 박수영 의원은 "민주당 후보가 1등, 정연욱 국민의힘 후보가 2등, 장예찬 무소속 후보가 3등 한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와 있다. 3등이 포기하는 게 맞다"고 밝혔고, 정광재 국민의힘 대변인도 "장예찬 후보가 한때 우리 정당의 최고위원이었고 당에 몸을 담았던 분으로서 당에 애정이 남아있다면 헌신의 자세로 대승적인 후보 사퇴를 해야 한다"고 말했으며, 신지호 국민의힘 이조(이재명·조국)심판 특별위원회 위원장 역시 "이렇게 분열돼 민주당 후보의 당선, 어부지리를 준다면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라고 비판한 바 있습니다.
애시당초 공천을 확정했다가 취소하고 다시 새로운 공천자를 냈는데, 공천 취소된 사람이 단일화를 요구한다고 해서 이에 응한다는 것 자체가 국민의힘이 내린 결정에 대한 절차적 정당성을 부인하는 일이기 때문에 승낙할래야 할 수 없던 상황. 정연욱 후보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난교 막말, 부산 비하로 공천 취소된 당사자, 당과 약속 무시하고 뛰쳐나간 장본인이 수영구민께 사죄하고 사퇴하면 단일화된다"라고 썼는데, 사실 틀린 말이 없죠. 3등인 후보가 당의 결정에 무시하고 뛰쳐나간 뒤 국민의힘 후보에게 단일화를 요구하는 상황 자체가 코미디니까요.
장예찬 후보의 무슨 단내 나는 입김을 귀에 살랑살랑 불어주는 지는 몰라도 상당히 달콤한 상상을 하고 있는 게 확실해 보입니다. 장 후보는 한 라디오에 출연, 무소속 출마자에 대한 복당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당 방침에 대해 "권성동, 이철규, 장제원, 윤상현 등 기라성 같은 정치 선배들이 무소속으로 생환했다"며 "궁극적으로 복당된다고 확신한다"고 말했죠. 또한 무소속 출마 후 대통령실과 소통이 끊기는 거 아니냔 물음에도 무소속 출마나 정치적 결정과는 별개로 대통령실과의 원활한 소통이나 나중에 국민의힘에 저는 돌아갈 것이라고 100% 확신한다"며 "대통령 1호 참모다운 힘을 가진 초선 의원이 저는 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한 소통과 굳건한 신뢰에는 전혀 변함이 없다"고 답했구요.
현재의 상태에 대해 진시원 부산대(일반사회교육학과) 교수는 "단일화 성사 여부는 장 후보만이 알고 있다. 끝까지 완주하고 싶겠지만, 이성적으로 보면 끝까지 갈 수 없는 상황이라 지금 심각한 딜레마에 빠져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네티즌들은 '형은 예찬이를 미더~' '예수님 찬양~ 예수님 찬양~' '장예찬 역시 청년이 뚝심있게 밀고 나가는 맛이 있어.완주 가즈아~' '완주예찬 가즈아' 등 댓글을 달고 있습니다.
사전투표용지 기표란에 '사퇴'를 표기할 수 있는 기한은 사전투표 하루 전인 4일 오후 6시까지로, 이제 설령 단일화를 하더라도 사전투표에서 사퇴한 후보의 득표는 사표가 됩니다. 즉, 오늘 사전투표가 시작되면서부터는 설령 기적적으로 단일화가 이뤄지더라도 그 효과가 어마무시하게 떨어진다는 점이죠. 장예찬 후보 본인의 업보가 돌아와 정치 생명에 마침표를 찍을 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이 보수의 텃밭에 민주당이 깃발을 꽂는 어마어마한 나비효과를 일으키게 되겠죠. 국민의힘은 안정적인 의석 1개를 잃게 되겠구요.
결론적으로 부산 수영구의 이러한 상황은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리더십 문제입니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교통정리를 제대로 했으면 이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겠죠. 1석의 의석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직 정치에 입문한지 몇 달 안되서 감이 안서는 것인지... 오죽 령이 서지 않으면 별 이력도 없고 그 까도 까도 끝이 없이 논란을 야기시켜 공천을 취소당한 무소속 후보가 대놓고 "국민의힘에 돌아갈 것을 확신한다"고 말하고 다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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